•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2 왕조의 중요한 국책사업, 사냥
  • 03. 고려시대의 사냥
  • 사냥 금지와 소송(訴訟)
정연학

사냥과 관련된 폐단은 왕의 경우는 관리들의 소송에 의해, 관리들의 폐단은 왕에 의해 금지되었다. 관리들의 수렵은 공무 나태, 분쟁, 백성들 피해, 동물 보호, 제사 지역 등의 이유를 들어 금지되었다. 고종은 14년(12월)에 관직자의 공무 나태와 일반인들의 잦은 분쟁으로 인해 매를 기르지 못하게 하였고, 충렬왕은 재추 이하 관원이 매를 놓아 사냥하는 것은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는 관직을 파면하도록 하였다.71) 직제.

공민왕은 12년 5월에 군관이 군사를 거느리고 새끼를 배었거나 알을 가진 짐승을 수렵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시켰다. 또 공민왕 21년 11월에는 원구(園丘), 모든 제단(祭壇), 왕릉(王陵), 진산(鎭山) 등지에서 수렵하거나 매를 기르는 것도 금지시켰다.

공민왕 때 경복흥과 최영은 한재와 충재가 있을 때 군대를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수렵을 하다가 백성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72) 『고려사』 경복흥. 사냥을 즐긴 신우도 5도에 설치된 익군의 두목들이 군대의 병사들을 농사철에도 집으로 보내지 않고 수렵에 데리고 다니면서 종처럼 부리자 헌사(憲司)에서 5도에 새로 설치한 익군의 폐지 요구를 받아들이기도 하였다.73) 군사훈련 병제사.

왕들은 특별한 날에는 수렵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봄에는 만물이 발육 및 짐승들이 알 낳는 시기라고 해서 수렵을 금지시켰고,74) 『고려사』 예종 2년 3월 갑자일 ; 원종 2년 3월 갑자일 ; 공민왕 1년 3월. 문종은 동짓달도 만물이 생기를 가지는 시기라고 해서 수렵을 금지시켰다.75) 『고려사』 문종 30년 11월 경오일. 또한, 왕이나 종친의 기일이나 병이 든 달에도 수렵을 금지하고,76) 『고려사』 성종 7년 12월, 문종 9년 9월 계해일 ; 문종 30년 5월 갑술일. 일식·월식 등을 불길한 징조라고 여겨 매사냥꾼을 해산하기도 하였다.77) 『고려사』 정종 9년 5월 정묘일.

충선왕은 국정을 쇄신한다는 의미에서 3년 동안 수렵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78) 『고려사』 충선왕 2년 12월 무신일. 그런데 공신들이 고종의 장례를 치르고 그 뒤를 이을 원종이 원나라에서 돌아오지 않은 상황에서 강화도에서 수렵을 하고, 장군 이인항(李仁恒)의 집에서 술잔치를 벌여 주민들의 비난을 받았다.79) 『고려사』 원종 1년 10월 임오일. 이러한 사실은 무신정권 시기에 사냥을 금지하는 조치들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하나의 사례로 보인다.

왕의 사냥은 인적·물적 등의 비용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들며,80) 『고려사』 충렬왕 11년. 그것이 모두 백성들의 고통으로 전가되었다. 심지어 충숙왕은 사냥 때마다 검교·낭장·별장 등에게 의복과 양곡을 준 것도 매번 몇 백 벌, 몇 백 석에 달하였다.81) 『고려사』 충숙왕 16년.

아래 글을 통해 왕의 수렵과 백성들의 피해를 엿볼 수 있다.

9월 초하루 정축일에 왕이 서해도로 사냥 갔다. 당시 환관들과 권세있는 고위 고관들이 모두 사전(賜田)을 받았는 바 많이 받은 사람은 20∼30결에 이르렀으며, 각각 양민을 차지하고 모든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다. 그런데다가 왕이 사냥하러 나가기만 하면 안렴사, 권농사들이 각각 연회를 만들어 왕을 대접하였으며, 혹시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고 연회를 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를 매질하였으므로, 모두 앞을 다투어 백성들을 침해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해독을 혹심하게 입었다.82) 『고려사』 충렬왕 15년.

충숙왕이 봉성(峯城)에 가서 사냥하였고, 신유일에 한양에서 사냥하였는데 삼사사 홍융(洪戎), 밀직사 조연수(趙延壽)와 원충(元忠), 대사헌 조운경(趙雲卿), 만호 장선(張宣), 조석(曹碩), 권준(權準), 대언 허부(許富) 등과 기병 3백여 명이 따라 갔다. 때마침 농사철이었기 때문에 인민들의 원성이 심하였다.83) 『고려사』 충숙왕 4년 2월 초하루 임자일.

왕의 수렵은 신하들의 주된 소송의 하나였다. 소송의 주된 내용은, 첫째는 농사철에 수렵을 금지하여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것이다.84) 『고려사』 충렬왕 13년 4월 계유일. 왕의 수렵에는 백성들이 몰이꾼, 길닦음 등의 노역에 동원되어 제때 농사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가뭄·충재 등으로 흉년이 든 지역에서의 수렵은 그 원망이 배가 되어 왕의 수렵 자제를 청하였다. 둘째는 짐승이 새끼나 알을 배는 시기의 수렵은 옛 교훈에 어긋난다는 점을 들었다. 주로 봄철 수렵에 대해 이와 같은 상소를 많이 올렸다.85) 『고려사』 충렬왕 12년 5월 정축일. 셋째는 왕의 안위를 걱정하여 수렵 금지를 건의하는 경우이다.86) 『고려사』 한강. 넷째는 수렵 자체를 재물과 여색을 탐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음풍(淫風)’이라고 규정하고 상소를 올리는 경우이다.87) 『고려사』 박의중, 이자송, 최영.

고려의 왕들은 신하들의 상소를 따르기도 하였지만,88) 『고려사』 이지저. 충렬왕은 나이가 60이 넘어도 수렵을 즐겼고,89) 『고려사』 충렬왕 22년 2월 병인일. 응방의 사치스러운 매 장식과 연희에 대해 상소를 올린 심양을 감옥에 가두기도 하였다.90) 심양. 충숙왕도 핑계를 찾아 수렵을 다녀오기도 하였다.91) 『고려사』 충숙왕 을해 후 4년 8월 기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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