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2 왕조의 중요한 국책사업, 사냥
  • 04. 조선시대의 사냥
  • 수렵 방법
  • 4. 사냥개
정연학

사냥방법 중 동물을 이용한 역사는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사냥에 능숙한 개로 풍산개·삽살개·진돗개 등을 든다. 풍산개는 호랑이와 맞설 정도로 용감하였고, 삽살개는 큰 덩치에서 나오는 힘으로 어지간한 짐승을 눌렀다. 진돗개는 진도의 명물로 용감하고 영리하기로 유명하다.

사냥개는 매와 더불어 동물을 이용한 사냥법의 대표적인 예이다. 때로는 매사냥에 개가 동원되어 짐승 몰이에 이용되었고, 우리나라 개는 사냥에 능숙하여 일찍이 중국에서 조공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사냥개는 민간에서 왕에게 진상하기도 하였다. 태종 때 계림부윤 윤향(尹向),204) 『태종실록』 권23, 태종 12년 2월 19일 갑술. 풍해도 도관찰사 심온이 사냥개[田犬]를 왕에게 진상하였다.205) 『태종실록』 권23, 태종 12년 2월 28일 계미. 이에 대해 태종은 적당한 시기에 사냥개를 바치었다 하여 저화 40장을 하사하였는데, 여기서 적당한 시기는 봄철 강무를 거행을 앞둔 시기를 말한다. 세종 때에 경상도 감사 신개(申槪)도 왕에게 사냥개 2마리를 바쳤다.206) 『세종실록』 권31, 세종 8년 2월 12일 병자.

사냥개 진상은 강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주로 해당 지역의 감사가 진상하였다. 세종이 평강 등지에서 강무를 하기 위해 풍천에 머물렀을 때 경기 감사가,207) 『세종실록』 권55, 세종 14년 2월 19일 무신. 양주에서 강무하고자 월개전(月介田)에 머물렀을 때도 경기 감사, 함길도와 평안도 도절제사 등이 사냥개를 바치었다.208) 『세종실록』 권57, 세종 14년 9월 27일 임오. 그러나 성종은 강무를 하지 않을 때는 사냥개를 바치지 못하도록 하였다.209) 『성종실록』 권102, 성종 10년 3월 6일 임술.

사냥개는 왕이 신하들에게 하사하기도 하였다. 태종은 지신사 김여지(金汝知)에게 사냥개를 내려 주었고,210) 『태종실록』 권23, 태종 12년 2월 26일 신사. 세조는 해주진 첨절제사와 황해도 관찰사가 진상한 사냥개를 종친과 재추에게 주었다.211) 『세조실록』 권22, 세조 6년 10월 9일 신해.

명나라 사신이나 황실에서는 조선의 사냥개를 애호하였다. 정종은 명나라 사신 황엄(黃儼) 등 5명에게 사냥개를 각각 3마리씩 선물하였다.212) 『태종실록』 권16, 태종 8년 10월 27일 신축 ; 태종 8년 10월 28일 임인. 결국 15마리를 선물한 셈인데, 그들은 본국에서 사냥개를 지휘하는 관원들에게 개 값의 2배를 받고 팔아 소득을 올렸다. 또한, 명나라 사신 윤봉(尹鳳)과 김만(金滿)도 사냥개를 요구하였고,213) 『세종실록』 권49, 세종 12년 7월 17일 을묘. 사신들은 황제의 칙서를 보였다.214) 『세종실록』 권44, 세종 11년 5월 7일 임자. 사냥개가 구체적으로 어떤 개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의 사냥개가 중국에서 유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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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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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냥과 사냥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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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는 명나라에 상납할 사냥개를 병조로 하여금 서울과 지방에서 선별하여 바치게 하였는데,215) 『세종실록』 권41 세종 10년 7월 8일 무오 ; 권46, 세종 11년 11월 10일 임자. 사냥개를 병조에서 관리를 하는 것은 오늘날 국방부에서 군견을 관리하는 것과 유사하다. 사냥개를 진상하러 갈 때는 숙련된 응사가 동원되었다.216) 『세종실록』 권41, 세종 10년 8월 4일 계미.

세조 때도 명나라에 사냥개 진상은 이루어졌으나217) 『세조실록』 권46, 세조 14년 5월 12일 신미. 명나라 황제 헌종(憲宗)은 칙사를 보내 사냥개 등을 진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가 이러한 행동을 보인 이유는 주(周)나라 무왕(武王)을 따르고자 한 것이고, 그러한 내용을 칙서에 명기하였다.218) 『세조실록』 권41, 세조 13년 3월 10일 을해. 그러나 명나라 사신들은 사냥개에 대한 애착이 무척 강하였다.219) 『세조실록』 권46, 세조 14년 4월 22일 신해.

사냥개는 명나라는 물론 일본, 요동의 수령 등도 탐냈다. 태종 때 일본이 우리나라에 요청한 물건 중 사냥개 한 쌍이 들어가 있고,220) 『태종실록』 권19, 태종 10년 4월 14일 경술. 일본 규슈에서 온 종금(宗金)이 우리나라에 토산물을 바치고 사냥개를 청해 2마리를 얻어갔다.221) 『세종실록』 권42, 세종 10년 12월 14일 신묘. 요동의 수령들도 조선의 사냥개를 탐내어 요청하였지만 대신들이 불허하였다.222) 『세종실록』 권38, 세종 9년 10월 27일 신사.

개사냥은 왕을 비롯한 상류층에게 놀이로서 유흥을 제공하지만 상대적으로 일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래서 신하들은 개사냥의 폐단을 끊임없이 상소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왕들은 매사냥과 마찬가지로 가을걷이 때 개사냥을 금지시켰고, 개사냥에 대한 규정을 만들기도 하였다. 태종 때 예조에서는 사냥과 관련된 규정 7개 조목을 상정하여 금수를 포위하면 개와 매를 포위망 안에 들어갈 수 없게 하였다.223) 『태종실록』 권23, 태종 12년 2월 11일 병인. 세종은 강무 때 사냥개를 대군과 좌의정·우의정·부원군·병조·대언이 각기 2마리씩을 데리고 가고, 다른 이들이 개를 가지고 가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를 어긴 자들이 있어 벌하기도 하였다.224) 『세종실록』 권27, 세종 7년 2월 30일 경오. 또한, 군사훈련을 빙자로 수군이나 육군의 장수들이 사냥개를 동원하거나225) 『세종실록』 권50, 세종 12년 12월 20일 병술. 강무장에서 사냥개로 짐승을 잡은 사람과 수령을 벌하였다.226) 『세종실록』 권39, 세종 10년 1월 21일 갑진. 곧, 철원 강무장에서 개사냥 사실이 발각되어 해당 지역에서 키우는 개를 모두 서울로 압송하였다.227) 『세종실록』 권39, 세종 10년 3월 8일 경인.

개사냥을 통해 잡은 포획물의 절반을 주인에게 주었다. 그래서 몰이 안에 들어온 짐승이 있으면 서로 다투어 개를 내쫓아 사냥을 하는데, 나라에 바치는 것은 1∼2마리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개인소유가 되었다. 그래서 병조에서 시위 군사가 포획한 짐승을 그 개인에게 돌려주지 않았다.228) 『세종실록』 권50, 세종 12년 10월 1일 무진. 한편, 활로 쏘아 짐승을 잡는 경우는 고기의 1/3을 받아 개를 이용한 사냥이 더 많은 고기를 가져갈 수 있다. 그래서 왕들은 사냥개의 수를 조절한 것이다.

사냥개를 애지중지한 왕은 연산군이다.229) 『연산군일기』 권40, 연산군 7년 1월 30일 기묘 ; 연산군 7년 5월 6일 계축. 연산군은 궁궐에 수많은 사냥개를 키워 궁궐 곳곳은 물론 조회를 보는 장소에도 개들이 드나들 정도였다.230) 『연산군일기』 권42, 연산군 8년 2월 5일 무신. 또한, 그는 사냥개와 매를 기르는 업무를 담당한 조준방(調隼坊)을 두었고, 먹이로 드는 비용이 1천을 넘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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