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2 왕조의 중요한 국책사업, 사냥
  • 04. 조선시대의 사냥
  • 호랑이 사냥
정연학

조선시대에 호랑이 사냥은 민간의 호환을 막는다는 의미와 용맹의 상징적인 의미로 행해졌다. 또한, 명나라의 진상품 가운데 호랑이 가죽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호랑이 사냥은 중시되었다. 또한, 호랑이 사냥은 조정에서 상이나 관직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일반인이나 군인들에게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호랑이 잡이에는 몰이, 활과 화살, 그물, 함정 등을 이용하였다. 조선시대 왕들의 호랑이 잡이에 대한 기록은 자주 나타난다. 세조는 봉현(蜂峴)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범[虎]을 에워싸서 잡았고,231) 『세조실록』 권36, 세조 11년 8월 12일 정해. 호랑이 잡이를 위해 전문적인 화살인 호전(虎箭)을 사용하였다.232) 『세조실록』 권46, 세조 14년 5월 12일 신미. 호랑이는 그리 쉽게 잡히지 않은 동물인데, 세조 때는 삭녕 추두모(楸豆毛) 수렵에서는 3마리를,233) 『세조실록』 권5, 세조 2년 10월 4일 경자. 토지산(兎只山)에서 2마리의 호랑이를 잡았다.234) 『세조실록』 권23, 세조 7년 2월 11일 임오. 세조는 호랑이 사냥에 용감한 왕이기도 하여, 동교(東郊)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고 친히 몰이사냥에 참가하였다.235) 『세조실록』 권37, 세조 11년 11월 18일 임술. 또 같은 달 28일에도 봉현에 호랑이 사냥을 나가려다 주변의 건의로 사냥을 멈추었다.236) 『세조실록』 권37, 세조 11년 11월 28일.

성종은 헌릉(獻陵) 남산 사장(南山射場)에서 호랑이 1마리를,237) 『성종실록』 권59, 성종 6년 9월 27일 계유. 선장산(仙場山)과 효일산(曉日山)에서 호랑이 몰이로 1마리를 잡았다.238) 『성종실록』 권59, 성종 6년 9월 30일 병자. 연산군은 호랑이와 곰을 사로잡아 온 것을 금원(禁園)에 풀어놓고 활을 쏘아 오락으로 삼았고,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맹수를 진상하게 하여 어깨에 산 호랑이와 곰을 메고 오는 자가 길을 잇달았다고 한다.239) 『연산군일기』 권57, 연산군 11년 3월 17일 임인.

호랑이 피해는 군사를 일으킬 정도이다. 중종 때 호랑이가 해가 갈수록 많아져 동대문 근처까지 나타났고, 금천·과천 지방에서는 사람을 해치는 일이 생기자 경기관찰사로 하여금 호랑이를 잡게 하였다.240) 『중종실록』 권46, 중종 17년 10월 7일 기묘. 포악한 호랑이가 횡행하는 것을 시강관 김섬(金銛)은 재변의 한가지로 보고 강무를 폐지하지 말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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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릉
헌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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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때는 창릉과 경릉에서 호랑이가 말을 물어 죽이기도 하였다. 왕은 능이 있는 곳에서 군마를 움직여서는 안 되지만, 참배가 끝난 뒤 몰이를 하겠다고 하자 주변의 신하들이 만류하였다.241) 『성종실록』 권83, 성종 8년 8월 28일 임술. 그러나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이 흉악한 짐승이 능원(陵園)에 있으니, 마병(馬兵)을 제외하고 불을 놓고 각(角)을 불어 보병(步兵)으로 하여금 몰아내자고 하자 그 의견을 따랐다. 본래는 능묘에서 사냥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조선시대의 왕들은 능에 제를 올리고 사냥을 하는 사례가 허다하였다. 성종은 경릉과 창릉에서 제사를 지내고 능침에 사나운 호랑이가 있는 것을 빙자하여 사냥을 하였다.242) 『성종실록』 권84, 성종 8년 9월 3일 정묘.

호랑이 사냥은 많은 폐단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성균관 주부 박경손(朴慶孫)이 세종에게 강무에 대하여 삼동(三冬)에 강무장의 호랑이와 표범을 잡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노루와 사슴을 해치기 때문이지만 사람과 말에게 폐단이 많음을 알렸다. 그 해결 방안으로 30리 안에 사는 백성을 징발하여 호랑이를 잡되 이틀을 넘기지 말고, 겨 울 석 달 동안 3차례를 넘게 하지 말자고 대안을 제시하자 왕이 이에 따랐다.243) 『세종실록』 권86, 세종 21년 8월 25일 신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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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몰이를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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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으로 호랑이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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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에 맞아 도망가는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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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때는 호랑이[白額虎]가 공릉·순릉(恭順陵) 주변과 고양(高陽) 등지에 출몰하여 사람과 가축 4백여 두(頭)를 죽여 조정에서 호랑이 사냥을 대대적으로 나서 포획하였다.244) 『선조실록』 권5, 선조 4년 10월 27일 병진. 고종 때는 궁궐 인근의 호환과 관련한 호랑이 잡이 내용이 보인다. 곧, 훈련도감이 북악산에서 3마리의 호랑이를, 총융청이 수마동(水磨洞) 부근에서 2마리의 호랑이를 잡았다.245) 『고종실록』 권5, 고종 5년 9월 20일 갑오. 고종 16년에는 북한산성 대동문 안에 호환이 발생하자 총융청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잡았다.246) 『고종실록』 권16, 고종 16년 8월 24일 을축. 현재 우리나라에 호랑이는 보이지 않지만, 고종 때까지 호랑이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호랑이 사냥은 용맹성 판단의 잣대로도 삼았다. 성종은 범을 잡아본 충청도 공주의 박효동(朴孝同)과 황해도 평산의 김효손(金孝孫)으로 하여금 국가 훈련인 강무 때 용맹성을 시험하여 호랑이와 표범 등 사나운 동물을 잡도록 하였다.247) 『성종실록』 권232, 성종 20년 9월 19일 갑술. 중종 때 좌의정 유순정은 군사들이 강무 때 호랑이를 두려워하여 활을 쏘거나 대항하는 자가 없 어 군사들의 용맹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248) 『중종실록』 권15, 중종 7년 1월 27일 계유. 중종은 호랑이를 두려워한 장군들을 문책하여 사나운 범이 앞에 쇄도하는 것을 발견하고 몰이를 중단한 좌위 부장 정세영(丁世榮)에게 벌을 내리고,249) 『중종실록』 권55, 중종 20년 11월 11일 병인. 인왕산에서 호랑이 잡이 임무를 소홀히 한 대장 김호(金瑚)를 파직하였다.250) 『중종실록』 권72, 중종 26년 12월 12일 신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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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 세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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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 문양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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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가죽은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진상품이었다. 세종 때 명나라 황제는 표범 가죽 진상을 요구하였고,251) 『세종실록』 권49, 세종 12년 7월 17일 을묘. 성종은 명나라 사신 정동(鄭同)에게 호랑이 이빨을 진공하는 어려움에 대하여 논의하고 이를 빼주기를 요청하였다.252) 『성종실록』 권157, 성종 14년 8월 11일 신미. 정동은 성종의 도움으로 병이 나은 것을 보답하는 의미로 명나라 황제에게는 호랑이는 사람을 상해하는 동물로 많은 사람과 말[馬]을 동원시켜도 그것을 사로잡기가 어려워 호랑이 이빨을 얻는 것은 매우 힘이 든다는 사실, 표범은 포획하기는 쉽지만 본토의 소산이 아니기 때문에 구하기 어려움을 전하였다.

성종 때는 관찰사와 절도사들에게 함정에서 잡은 호랑이와 표범 가죽 등을 모두 진상하게 하였다.253) 『성종실록』 권104, 성종 10년 5월 5일 경신. 그런데 그들은 함정에서 잡은 호랑이의 가죽을 따로 선물로 써버리고, 정작 봉진(封進)할 때가 되면 수령으로 하여금 민간에서 필요한 돈을 거두어 호피를 구입하도록 하였다. 당시 표피는 면포(綿布) 30여 필, 호피는 20여 필이 든다. 결국 절도사는 호랑이와 표범 가죽의 진상을 수령들에게 전가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수령들은 백성들을 거느리고 먼 곳에 사냥을 나가 열흘이나 달포나 경과해서 돌아오기도 하였다.254) 『연산군일기』 권45, 연산군 8년 8월 13일 임자. 한편, 호피는 조선시대 신부 가마 위에 얹혀 신부를 보호하는 민속학적 기능도 하였다.

호랑이 사냥은 매우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국가로부터 진급과 포상이 이루어졌다. 조선의 왕들은 범 수렵 도중 자신의 목숨을 구한 자들에게 벼슬이라든지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었다. 태종은 한산 서쪽에서 수렵 도중 성난 표범을 만나 생명이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거신(居信)을 좌명(佐命) 공신으로 삼았다.255) 『태종실록』 권1, 태종 1년 1월 15일 을해. 세조도 표범 수렵 구경을 하다가 죽음에서 생명을 구해 준 낭장가로(浪將家老)의 아버지에게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치료해 주고 어주를 같이 마셨다. 범을 잡은 자에게 벼슬을 내리자 이미 다른 사람이 부상을 입힌 호랑이를 마치 자기가 잡은 것처럼 하여 겸사복이라는 벼슬을 제수받기도 하였다.256) 『성종실록』 권232, 성종 20년 9월 19일 갑술.

세조는 범과 표범을 몰아내는 자에게도 상을 주기도 하였다. 세조는 홍복산(弘福山)에서 범을 몰아 낸 좌상대장(左廂大將) 이극배(李克培)에게 상을 내렸고,257) 『성종실록』 권196, 성종 17년 10월 26일 정유. 고종은 호환 피해가 심할 때 표범 1마리를 잡은 군인에게 상을 주었다.258) 『고종실록』 권16, 고종 16년 9월 2일 임신.

『경국대전』에는 호랑이 수렵에 대한 승급과 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적고 있다.259) 『경국대전』 軍士給仕 別仕 狩獵 捕虎.

○ 고을 원이 1년 동안에 10마리 이상 잡으면 품계를 올려준다.

○ 5마리를 잡았을 경우에 모두 맨 선참으로 활이나 창으로 명중시킨 사람은 두 등급을 뛰어넘어 품계를 올려준다. 시골아전·역참아전·천인인 경우에는 무명 60필을 주며, 그 이하에 대해서는 매 등급마다 각각 20필씩 줄인다.

○ 3마리를 맨 먼저 명중시키고 2마리를 두 번째로 명중시킨 사람에 대해서는 한 등급을 뛰어넘어 품계를 올려준다.

○ 한 마리나 2마리를 맨 먼저 명중시키고, 3마리나 4마리를 두 번째로 명중시킨 사람에 대해서는 품계를 올려주되, 당하 3품에서 더 올라갈 품계가 없는 사람은 당하 3품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벼슬을 준다.

○ 큰 범을 활이나 창으로 맨 먼저 명중시킨 사람은 특별 출근일수 50을 계산해 주고, 시골아전·역참아전·천인이면 무명 6필을 주며 그 이하에 대해서는 매 등급마다 각각 반 필씩 줄인다. 두 번째로 명중시킨 사람은 45일을 계산해 주며, 세 번째로 명중시킨 사람은 40일을 계산해 준다.

○ 보통 범을 활이나 창으로 맨 먼저 명중시킨 사람은 40일, 두 번째로 명중시킨 사람은 35일, 세 번째로 명중시킨 사람은 30일을 계산해 준다.

○ 작은 범을 활이나 창으로 맨 먼저 명중시킨 사람은 30일, 두 번째로 명중시킨 사람은 25일, 세 번째로 명중시킨 사람은 20일을 계산해 준다.

○ 표범을 활이나 창으로 맨 먼저 명중시킨 사람은 20일, 두 번째로 명중시킨 사람은 15일, 세 번째로 명중시킨 사람은 10일을 계산해 준다.

○ 덫이나 혹은 활, 창으로 자진하여 잡은 사람에 대해서는 각각 활이나 창으로 두 번째로 명중시킨 사람의 규례에 의하여 본인의 소원을 따라 출근일수를 계산해 주거나 무명을 주는 동시에 잡은 범과 표범도 함께 준다. 시골아전이 자진하여 1년에 5마리를 잡은 경우에는 신역을 면제해 준다.

위의 내용을 통해 한 고을에서 10마리 이상의 호랑이를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선창을 한 사냥꾼을 중시하여 선창한 호랑이의 수에 따라 품계를 올려주었다. 호랑이의 크기를 대·중·소 등 3등급으로 나누고, 해당 동물을 선창·중창·세창을 한 군인들에게 각각 다른 특별 출근일수를 계산해 주었다. 표범의 경우는 호랑이보다 낮은 특별 출근일수를 계산해 주었다. 덫·활·창 등을 이용해 스스로 범이나 표범을 잡은 경우에도 출근일수를 계산해 주고 무명을 선물로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냥물도 주었다.

한편, 한반도에서 표범은 1960년대까지 포획될 정도로 그 수가 많았으며,260) 이종범, 『자연과 사냥』, 2003년 화보.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인과 러시아인들이 표범 사냥을 통해 가죽을 얻어갔다. 가령 1917년 야마모토 타다자부로(山本唯三朗)는 함경도 영흥, 전남 화순에서 표범 사냥을 하였고, 러시아인 야코프스키는 표범 2마리를 잡고 기념으로 사진촬영을 하기도 하였다.261) 이순우, 「누가 조선호랑이의 씨를 말렸나?」, 오마이뉴스 2003년 5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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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잡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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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사살된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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