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3 권력과 사냥
  • 03. 군사(軍事)와 사냥
  • 조선 건국과 강무제의 확립
심승구

조선시대 사냥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강무제(講武制)의 시행이다. 사냥에는 국가가 주도하는 사냥과 개인이 행하는 사냥이 있다. 전자가 봉건권력이나 체제 유지를 위해 시행한 공적 성격을 띤 국가사냥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개인의 경제적인 삶과 관련된 사적인 사냥이었다. 사냥을 통해 무비(武備)를 닦는 강무제는 조선의 국가주도 사냥을 대표하는 제도이자 권력의 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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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최루백이 아비의 원수를 갚는 모습
고려시대 최루백이 아비의 원수를 갚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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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사냥정책은 고려시대 사냥의 모순과 폐단을 극복하는 가운데 출발하였다. 이미 고려 말 원나라 간섭 이후 매·따오기 등 각종 진상을 위한 사냥의 폐단이 증대하는가 하면, 놀이를 겸한 국왕의 잦은 사냥으로 인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279) 『高麗史』 권30, 世家30, 忠烈王 15년 10월 丁未 ; 『高麗史』 권135, 列傳48, 辛禑 9년 2월 기사.

그러자 조선왕조는 고례(古禮)에 입각하여 유교적 문치주의 실정에 맞게 국가 주도의 사냥제도로 재정비하는 한편, 고려시대의 사냥의 폐단을 크게 경계하였다. 그런 사실은 조선왕조가 『고려사절요』를 편찬할 때, 사냥과 잔치를 벌인 일은 비록 횟수가 잦아도 반드시 써서 뒷날을 경계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280) 그러한 사실은 조선왕조가 『高麗史節要』를 편찬할 때, ‘遊田宴樂 雖數必書 戒逸豫也’라 하여 사냥과 잔치를 벌인 일은 비록 횟수가 잦아도 반드시 썼으니 逸樂을 경계함이다.”라는 범례의 조항을 통해서도 확인된다(『高麗史節要』 卷首, 凡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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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수렵 무늬가 새겨진 청동거울
고려시대 수렵 무늬가 새겨진 청동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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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이념에 입각한 사냥에 대한 인식은 조선왕조가 사냥정책을 재정비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왕조는 건국하자마자 곧바로 전국에 파견하는 사신과 수령들에게 때 아닌 사냥을 전면 금지하는 한편,281) 『태조실록』 권2, 태조 1년 9월 임인.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의 제정을 통해 국가 사냥의 정례화를 꾀하였다.282)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8월 계사. 이어 태조 3년(1394)에는 『조선경국전』을 올리는 자리에서 전렵(畋獵)은 사람과 곡식을 해치는 짐승만을 잡아 제사지낸다는 대원칙을 세웠다.283)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5월 무진.

그러한 사실은 다음의 기록을 통해서도 잘 확인된다.

병(兵)이란 흉한 일이니 공연히 설치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또 성인(聖人)이 부득이 마련한 것이니 연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례(周禮)에서는 대사도(大司徒)가 춘수(春蒐), 하묘(夏苗), 추선(秋獮), 동수(冬狩)을 함으로써 무사(武事)를 연마하였다. 그러나 더러 농사를 방해하고 백성을 해치는 폐단이 있는 일인 까닭에 한가한 때에 강습하게 하였다. 또한, 전렵(畋獵)은 짐승을 쫓는 유희(遊戲)에 가깝고 자신을 봉양하기 위한다는 혐의를 받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성인은 이 점을 염려하여 수수지법(蒐狩之法)을 만들었으니 하나는 짐승 중에 백성과 곡식을 해치는 것만을 잡게 하는 것이고, 하나는 잡은 짐승을 바쳐서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이었다. 이것은 모두 종사(宗社) 와 생령(生靈)을 위한 계책이니, 그 뜻이 이렇듯 깊다. 주(周) 선왕(宣王)은 사냥을 인하여 병거(兵車)와 보졸(步卒)을 뽑아서 주나라의 중흥의 업을 이루었고 하(夏) 태종(太康)은 낙수(洛水) 주변에서 사냥하다가 친척들이 원망하고 백성들이 이반하여 끝내는 왕위를 잃게 되었다. 대개 사냥의 일은 한가지로되, 그들 마음에는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의 나뉨이 있어 치란(治亂)과 존망이 각각 그 마음가짐에 따라 나타났다. 이른바 터럭 끝만 한 차이가 천리(千里)의 어긋남을 가져온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후세 인주(人主)들은 어찌 취사하는 기틀을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284) 鄭道傳, 『朝鮮經國典』 下, 政典 畋獵.

조선왕조는 사냥이 농사를 방해하고 백성을 해치는 폐단을 경계하는 동시에 전렵, 즉 사냥으로 사람과 곡식을 해치는 짐승만을 잡아 제사지내는 원칙으로 세워나갔다. 이른바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는 ‘위민제해(爲民除害)’의 원칙이었다. 아울러 사냥으로 무사(武事)를 닦아 나라를 세운 이가 있는가 하면, 사냥으로 놀이에 빠져 나라를 잃은 옛 고사의 폐단을 예로 들어 위정자가 경계와 교훈을 삼도록 하였다. 사냥이야말로 국가를 운영하는데 위로는 종묘와 사직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살피는 계책이라고 인식한데 따른 것이다. 이처럼 조선왕조의 건국 주체세력은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무사를 평소에 갖추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사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285) 鄭道傳, 『朝鮮經國典』 下, 政典, “總序當平居無事之時 其講武事也 必因田獵.”

그리하여 태조 4년(1395)에는 국가사냥의 지침이 될 수 있는 수수도(蒐狩圖)와 진법훈련을 위한 진도(陣圖)를 간행토록 하였다.286) 『태조실록』 권7, 4년 4월 1일 갑자, “令三軍府刊行 蒐狩圖 陣圖.” 태조 5년(1396)에는 고제(古制)의 강무제를 참작하여 수수강무도(蒐狩講武圖)를 만들고, 이에 의거하여 서울에서는 4계절의 끝 달(3, 6, 9, 12월), 지방에서는 춘추의 끝 달(3, 9월)에 강무를 시행토록 하였다.287) 『태조실록』 권10, 태조 5년 11월 갑신.

이러한 제도적 정비는 조선왕조의 강무제가 병법에 기초한 진법과 무예 교습 위주의 순수 군사 훈련보다는 사냥을 통한 군사 훈련 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하지만, 건국 직후 사병(私兵)의 존재를 비롯해 조선왕조의 군권(軍權)이 아직 중앙으로 귀일(歸一)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체제정비와 함께 정국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국왕이 교외에 자주 나가 강무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 결과 건국 직후 강무제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288) 태조대와 정종대에 각각 1차례씩 시행되었다(『태조실록』 권12, 태조 6년 12월 계사 및 『정종실록』 권6, 정종 2년 10월 갑오).

사냥제도가 본격적으로 정비되고 시행된 것은 사병혁파와 함께 군사체계가 갖추어진 태종대에 들어와서이다. 태종 2년(1402)에는 어가가 거둥하여 사냥하는 수수법을 비로소 마련하였다.289) 『태종실록』 권3, 태종 2년 6월 계해. 이 규정은 종래 4차례의 사냥에서 춘·추·동 3차례로 줄여 사냥하여 종묘를 받들고 무사(武事)를 강구하되 병력을 동원한 짐승을 쫓는 단계와 절차, 쏘아 잡는 방법, 종묘의 천신(薦新) 및 군신회연(君臣會宴) 절차 등 태조 때에 미비된 수수의주(蒐狩儀註)를 보완한 것이다.

특히, 태종 12년(1412)에는 ‘사냥의 법은 제왕이 소중히 여기는 바’라 하며 고전을 참작하여 강무의(講武儀)를 마련케 하는 한편,290) 『태종실록』 권23, 태종 12년 2월 임술 사냥하여 종묘에 천신하는 ‘수수천묘지의(蒐狩薦廟之儀)’를 상정하게 하였다.291) 『태종실록』 권6, 태종 3년 10월 을사. 이어서 천신의주(薦新儀註)에 의거하여 강무 때 잡은 짐승을 제사에 올리는 ‘천금의(薦禽儀)’를 제정하였다.292) 『태종실록』 권23, 태종 12년 2월 신사. 태종 14년(1414)에는 강무할 때의 지켜야 할 금령(禁令)인 강무사의(講武事宜)를 갖추고,293) 『태종실록』 권27, 태종 14년 2월 기사. 사냥한 짐승으로 교외에 제사지내 사방의 신에게 보답하게 하였다.294) 『태종실록』 권28, 태종 14년 9월 임진. 다만, 이 내용은 후일 약간의 수정 보완을 거쳐 『세종실록』 오례 가운데 군례(軍禮)의식의 하나인 강무의로 명문화된다.295) 『세종실록』 권133, 세종 軍禮儀式 講武儀.

이로써 볼 때 조선에 들어와 정비된 사냥제는 태조대의 춘하추동 수수강무법에서 태종대에 춘·추·동의 수수법과 춘추 강무법을 거쳐 세종대에 이르러 ‘춘추 수수강무제’의 성격으로 굳어졌다. 그리하여 『세종실록』 오례 가운데 군례의 하나로 제도화되었고, 이를 토대로 성종대에 최종 완성된 『국조오례의』의 군례에는 춘추로 2차례 수수(蒐狩)와 강무가 결합한 강무의로 최종 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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