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3 권력과 사냥
  • 03. 군사(軍事)와 사냥
  • 16세기 이후 강무제의 추이
심승구

조선 전기 군사체제는 5위와 진관체제에 입각한 국방체제를 갖추었다. 이러한 군사체제는 강무제·대열(大閱)·습진(習陣)·습사(習射) 등의 중외 군사 훈련 체제를 통해서 뒷받침되었다. 특히, 평상시 국가의 군사 행정에 관한 군정권(軍政權)과 군사 명령에 관한 군령권(軍令權)을 점검하던 강무제는 15세기말부터 국가체제가 정비되고 군사체제가 안정되면서 간소화되기 시작하였다. 세조대 이후 5위제와 진관체제가 확립되고 보법(保法)이 갖추어지고 평화가 지속되면서 점차 그 시행이 줄어 들었다. 더욱이 전국에서 올라오는 번상병을 동원하여 장기간 지방을 순회하는 강무제는 각종 민폐가 뒤따랐고, 사냥이 곧 ‘유희(遊戲)’라고 인식하는 사림세력들의 반대로 인해 정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6세기 이후 강무제의 변화가 뒤따랐다. 강무제가 군사 훈련보다는 타위(打圍), 즉 사냥 위주의 강무로 변하였다. 타위란 사냥할 때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산과 들을 에워싸고 몰이사냥을 하는 사냥형태 또는 사냥법을 말한다. 원래 강무는 타위를 겸한 군사 훈련이었다. 그로 인하여 ‘타위는 곧 강무지사(講武之事)’라는 표현처럼 군사 훈련인 강무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점을 이용하여 연산군은 강무를 핑계로 타위를 통한 사냥 활동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전군(全軍)을 동원한 강무가 군사 훈련보다는 몰이사냥에 집중되었을 뿐 아니라 악공(樂工)·여악(女樂)을 비롯한 연회(宴會)가 곁들여졌다. 이러한 사실은 연산군대에 이르러 강무가 군사들의 훈련보다는 왕의 사적인 유희로 전락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자 아예 군사들은 물론 조정의 신하들까지 대동하고 종합적인 야외 군사 훈련을 감행하던 강무는 점차 소수 군사들만을 동원하여 사냥을 하는 타위로 바꾸었다. 다시 말하면 강무제가 수천에서 수만 명을 동원하여 이루어진 국가적인 단위의 사냥 활동이었다면, 타위는 그보다 휠씬 적은 군사, 통상 입직 군사들을 동원하여 수행하는 방식이었다. 15세기의 강무제가 큰 규모의 국가사냥의 행사였다면 16세기 이후 타위는 유희적 성격을 띤 소규모의 강무였다.

강무는 중종 이후에는 한 차례도 시행되지 않았고 그 대신 도성 부근에서 행하는 ‘답렵(踏獵)’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강무제도가 생겨났다. 답렵이란 국왕이 대열 또는 습진한 후에 호위 장수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행하는 사냥이었다.344) 『중종실록』 권13, 중종 6년 4월 병술, “上親閱于箭郊 仍行踏獵 只以扈衛將士 打圍獲禽 謂之踏獵.” 답렵은 번상병을 동원하여 시행하는 종합적인 군사 훈련인 강무나 타위에 비해 가장 간략한 형태의 사냥이다.

답렵은 도성 부근에서 사냥한다는 점이 특징으로 주로 살곶이(오 늘날 행당동 살곶이 다리 부근)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명종 대부터는 타위가 이루어졌으나 국왕이 친림한 형태가 아닌 장수들이 주관하는 형태였다. 16세기 이후 계속되는 평화시기와 함께 군사체제의 해이는 군사 훈련의 소홀을 가져왔고, 국가 주도의 사냥은 점점 줄어들었다. 부국강병을 추구하였던 15세기에 비해 국가운영 원리가 이제 민생안정으로 변화함에 따라 군사 훈련을 겸한 사냥 활동이 제한되었다. 그러자 강무장 내에서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 등 강무제의 시행에 따른 민폐가 크게 줄어들었다. 강무로 인한 민생의 폐단으로 오랫동안 지방을 돌며 행하던 군사 훈련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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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곶이 다리
살곶이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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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16세기말 주자성리학이 정착되고 사림정치가 본격화되면서 강무는 물론이고 답렵과 타위마저도 거의 사라졌다. 국왕이 친림하는 국가적인 사냥을 유희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였을 뿐 아니라 전국의 군사를 동원해 강무하는 시기가 농사 시기를 놓칠 우려와 함께 민간의 폐해가 커짐에 따라 강무제가 중단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강무제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거의 사라져 갔다. 이에 따라 전국의 군사를 동원하여 시행하는 대규모 군사 훈련은 사냥을 통한 간접적인 방식이 아닌 보다 실질적인 군사 훈련인 관무재 (觀武才)와 대열(大閱)의 형태만이 남았다. 17세기 이후에는 사냥을 겸한 대규모 군사 훈련인 강무제는 모두 폐지되었다.345) 『효종실록』 권10, 효종 4년 2월 계묘. 결국 사냥을 겸한 군사 훈련인 강무제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사실상 모두 폐지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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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조점(濟州措點). 제주 목사가 군사 훈련과 제반 사항을 점검하는 모습
제주조점(濟州措點). 제주 목사가 군사 훈련과 제반 사항을 점검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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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조선 후기에도 『국조오례의』에 입각하여 강무제의 시행을 논의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346) 『효종실록』 권20, 효종 9년 6월 계유. 하지만 강무제는 이후 한 차례도 시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 결과 조선 후기의 강무는 사냥을 겸한 군사 훈련이 아니라 순수한 군사 훈련만을 뜻하였다. 실제로 조선 후기의 강무는 대열 또는 관무재와 같이 국왕의 친림 아래 이루어진 무예훈련만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의 강무는 사냥을 겸한 방식이 아닌 주로 능행(陵幸)을 참배할 때 호종군사들을 대상으로 열무하는 방식이 큰 특징이었다.347) 『현종실록』 권9, 현종 5년 9월 임인.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는 사냥을 겸하던 강무제가 완전히 사라지고 대열과 관무재와 같이 순수한 군사 훈련만 남았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실전용 군사 훈련이 절실한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임진왜란 중 조총이 도입되자 집단훈련인 진법이 개인의 기예보다 앞서는 선진후기(先陣後技)라는 전술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진법과 같은 집단 전술보다 오히려 개인의 기예가 중시되는 선기후진(先技後陣)라는 전술로 변화된 것이다.

창·검·방패 등과 같이 개인의 단병 무예를 익히는 실전에 대비한 군사 훈련이 중시되면서 사냥을 겸한 집단적인 강무제의 비중이 크게 약화되었다. 총포의 발달과 함께 개인의 실용적인 무예가 중시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사냥을 통한 군사 훈련이 별다른 의미를 갖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 동안 국가 권력 내지 체제 유지에 기여한 국왕 친림의 강무제는 양난을 계기로 그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당초 사냥 의례를 통해 국왕의 유희를 방지하고 군사 훈련을 도모하려는 조선왕조의 의도가 두 차례 전란을 경험하면서 크게 달라진 것이다. 그것은 유교이념에 충실한 사냥 의례가 아니라 실전을 대비한 군사 훈련으로의 대전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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