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3 권력과 사냥
  • 04. 제사와 사냥
심승구

원래 천신은 『예기』에 나오는 용어로 계절의 제사에 그때 나온 새로운 맛(新味)을 올리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맛은, 곧 계절에 따라 새로 나온 곡식·과일·채소·물고기·날짐승·들짐승 등을 말한다. 그리하여 계절마다 올리는 천신을 월령천신(月令薦新)이라고 한다. 다만, 천신이 사냥과 관련된 까닭은 날짐승과 들짐승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유교이념의 비중에 따라 국가 사전(祀典)을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정비하였다. 그 가운데 천신(薦新)은 대사(大祀)에 해당하는 사전에 올랐다. 즉, 조선에서는 종묘, 원묘(原廟, 문효전), 별묘 등의 제향에 올리는 것을 천신이라고 하였다.

천신은 고려 때부터 이미 시행해 온 제사의식이었으나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조선의 실정에 맞는 천신의가 새로이 마련되었다. 즉, 태종 2년(1402)에는 국가의 사냥법인 전수의주(田狩儀註)로 만들되, 사냥을 통해 종묘에 곧바로 천신한다는 원칙을 세웠다.348) 『태종실록』 권3, 태종 2년 6월 계해. 이는 곧 강무의식의 본격적인 출발을 의미한다. 다만, 천신의주까지는 마련치 못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태종 3년(1403)에는 『문헌통고』에 의거하여 제왕이 사냥하고 종묘에 천신하는 의식을 마련하였다.349) 하지만 月令圖에 따라 10월에 禽獸를 잡아 천신하게 하되, 의궤에 따르도록 하였다(『태종실록』 권6, 태종 3년 10월 1일 을사).

태종 9년(1409)에는 임금이 문소전에 나아가 납향제(臘享祭)를 행하고, 사냥한 새[禽]를 종묘에 올리는 것을 법으로 삼았다.350) 『태종실록』 권18, 태종 9년 12월 정미. 이어서 태종 11년(1411)에는 종묘에 천신하는 의주를 마련하였다. 이 의주에 따르면 모든 신물(新物)을 초하루와 보름 제사를 기다려 겸하여 천신하게 하였다.351) 『태종실록』 권21, 태종 11년 5월 신미. 그런데 천신에 사용되는 제수는 날짐승과 들짐승보다는 곡식·과일·채소·물고기 등의 비중이 컸다. 그 결과 천신의식에서 사냥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더구나 천신의는 주로 가을이나 겨울의 월령도에 의거하여 사냥으로 잡은 짐승을 종묘에 천신하였다.

그런데 천신의와 달리 강무 때에 잡은 날짐승과 들짐승을 곧바로 종묘에 바치는 의식이 필요하였다. 강무는 군사의 검열과 함께 잡은 짐승을 종묘에 올리는 천금을 위한 행사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다음의 기록에서 잘 확인된다.

강무는 열병뿐만 아니라 천금(薦禽)하는 것이 중한데, 만약 짐승이 없는 곳에 타위하여 첫날에 잡지 못하고 이튿날에도 잡지 못하여 잡은 뒤에 올리는 데 이르면, 아마도 사체에 어그러짐이 있을 것이다.352) 『성종실록』 권218, 성종 19년 7월 을유.

강무는 군사들에게 몰이사냥인 타위를 통하여 짐승을 잡아 천금하는 것이 또하나의 중요한 기능이었다. 하지만 당시 천신의는 있었지만 천금의는 마련되지 않았다. 그러자 태종 12년에는 예조에서 강무 때 잡은 짐승을 종묘에 올리는 천금 의주를 아래와 같이 제정하였다.

예조에서 천금의(薦禽儀)를 올리었다. 계문은 이러하였다. “건문(建文) 4년(태종 2)에 봉교(奉敎)하여 전수의주(田狩儀註)를 상정(詳定)하였는데, ‘잡은 짐승을 종묘에 급히 천신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강무를 당하여 그 천금(薦 禽)하는 예를 영락 9년(태종 11)에 봉고한 천신 의주에 의하되 만일 삭망일(朔望日)을 만나면 겸하여 천신하고, 만일 만나지 않으면 날을 가리지 말고 즉시 천신하여, 일작(一爵)의 예를 행하면 거의 정례(情禮)에 합할까 합니다.”그대로 따랐다.353) 『태종실록』 권23, 태종 12년 2월 신사.

천신 의주에는 사냥에서 잡은 짐승을 종묘에 올리되 초하루나 그믐날을 만나면 겸하여 천신하고, 만일 만나지 않으면 날을 가리지 말고 즉시 천신하여 일작의 예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태종은 경기도 여주에서 사냥해 잡은 꿩을 종묘에 천신(薦新)하고, 명하여 10월 초하루 제사에 겸하여 천신하였다.354) 『태종실록』 권24, 태종 12년 9월 경술. 이에 임금이 대부곶이[大釜串]에 잡은 노루[獐] 한 마리를 종묘에 천신하였다. 그런데 ‘12월 이후의 장록(獐鹿)은 맛이 없다.’는 옛 말에 근거하여 춘수(春蒐)에 잡은 것은 종묘에 천신하지 말도록 하였다.355) 『태종실록』 권25, 태종 13년 2월 신유.

태종 13년(1413)에는 종묘의 천신에 신주(新酒)를 새로 쓰라고 명하였다. 이어 태종 14년(1414)에는 다시 예조의 건의로 사냥해서 잡은 짐승을 즉시 종묘에 천신하되, 초하루와 그믐날을 만나면 겸하여 천신하였다.356) 『태종실록』 권28, 태종 14년 윤9월 계묘. 그러다가 그해 11월에는 종묘에 천신하는 물건은 모름지기 그 달의 절기에 미쳐서 바치도록 하였다. 태종 15년(1415)에는 천신의를 올렸다.357) 『태종실록』 권29, 태종 15년 3월 신축.

세종 9년(1427)에는 10월 월령에 의거하여 사냥한 날짐승을 종묘에 천신하였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사냥은 국가의 큰 행사입니다. 옛적에 사냥에서 짐승을 잡으면 이를 세 가지 등급으로 나누어서, 제일 좋은 것은 종묘에 제사를 받들고, 다음의 것은 손님의 연회에 사용하고, 그 다음의 것은 나라의 주방에 쓰고, 그 나머지는 사대부에게 주어 택궁(澤宮) 가운데에서 활 쏘 는 연습에 쓰게 하였으니, 사냥에서 잡은 짐승을 사용하는 법이 상세하고 구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봄·가을로 강무(講武)에서 잡은 짐승을 먼저 종묘에 천신하고, 다음에 나이가 늙은 대신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이것은 옛적부터 써 오던 좋은 법이며 좋은 취지입니다. 그런데 군사들이 포획한 짐승 중에서 활로 쏘아 잡은 것은 3분의 1을 주고, 개가 잡은 것은 절반을 주고 있사오니, 포획물을 나누어 주는 제도로서는 참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대소 군사들이 도로 받는 것만을 다행으로 생각하여 몰이 안[驅內]에 들어온 짐승이면 사람과 말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다투어 서로 활을 쏘아대며, 개를 내좇아서 달리며 쏘기에만 힘써서 있는 대로 모조리 잡아 버리어 많을 적에는 수 십마리에 달하게 됩니다. 나라에 바치는 것은 1∼2마리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개인의 소유가 되어 버리오니, 이것은 사냥하는 예법에 어긋날 뿐 아니라 임금을 높이는 도리에도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도로 받는 법이 그러한 폐단을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시위 군사가 포획한 짐승은 일단 모두 진무소에 들여놓고, 진무소에서 이름 밑에다 각기 포획한 수량을 적어서 보고하게 하며, 국가에서 사용하거나 하사하는 이외에 감히 개인적으로 가져가는 자에 대하여는 본조에서 찰방과 함께 규찰(糾察)하여, 2품 이상의 관리는 나라에 보고하여 과죄(科罪)하고, 3품 이하는 직접 처단하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358) 『세종실록』 권50, 태종 12년 10월 무진.

세종 17년(1435) 주서(注書) 민원(閔瑗)을 보내어 종묘에 날짐승을 천신하였다. 『세종실록』 오례에 따르면, 제사 가운데 날을 가리지 않는 것은 종묘에 천신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2월에는 얼음, 3월에 고사리[蕨], 4월에 송어(松魚), 5월에 보리·밀·앵도·죽순·오이·살구, 6월에 가지[茄子]·동아[冬瓜]·능금[林檎], 7월에 기장·피·조, 8월에 벼·연어(年魚)·밤, 9월에는 기러기·대추·배, 10월에는 감·귤·감자(柑子), 11월에는 천아(天鵝), 12월에는 물고기·토끼다.

특히, 종묘에 사냥한 짐승을 올리는 것은 봄사냥과 겨울사냥에 잡은 사슴·노루·꿩 등을 사자를 보내어 빨리 가서 올리는 것이 원칙이었다.359) 『세종실록』 권133, 오례, 길례 서례, 시일. 결국 조선왕조가 사냥을 통해 잡은 짐승을 종묘에 제사지내는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때에 따라 신물을 종묘에 올리는 종묘 천신의와 강무로 잡은 짐승을 즉시 종묘에 올리는 천금의가 그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왕조는 천신 종묘의(薦新宗廟儀)와 수수천금도(蒐狩薦禽圖)를 만들었다.

『세종실록』 오례에 나타난 천신 종묘의는 다음과 같다.

천신 종묘의(薦新宗廟儀)【사냥[蒐狩]한 짐승을 올리는 의식을 붙임】

◎ 진설(陳設): 1일 전에 전사시(典祀寺)에서 신물(新物)을 재소(齋所) 주방(廚房)에 진설하고, 판전사(判典祀)가【유고(有故)시 판관(判官) 이상으로 한다】종묘령(宗廟令)과 더불어 주방에 나아가서 같이 잔다.

그날이 되면 변(籩)·두(豆)를 매 실(室)의 지게문 밖[戶外]에 설치하고 신물(新物)을 담는다.

매 실마다 2월(仲春)에는 얼음을 드리는데 두(豆)에다 담고, 3월(季春)에는 고사리[蕨]인데 두(豆)에다 담는다.

4월(孟夏)에는 송어(松魚)인데 두에다 담고, 5월(仲夏)에는 대맥·소맥·죽순·오이인데, 각기 두에다 담고, 앵도·살구는 변(籩)에다 담는다. 6월(季夏)에는 가지[茄子]·동과(冬瓜)는 각기 두에다 담고, 능금은 변에다 담는다.

7월(孟秋)에는 기장[黍]·피[稷]·조[粟]인데 각기 두에다 담고, 8월(仲秋)에는 벼[稻]·연어(年魚)는 각기 두에다 담고, 밤[栗]은 변에다 담는다. 9월(季秋)에는 기러기[雁]는 두에다 담고, 대추·배는 각기 변에다 담는다.

10월(孟冬)에는 감·귤·밀감은 각기 변에다 담고, 11월(仲冬)에는 천아(天鵝)를 두에 담고, 12월(季冬)에는 생선·토끼인데 각기 두에다 담는다.

날을 가려서 드리는 것이 아니고, 삭망전(朔望奠) 때를 만나면 함께 올린다. 혹시 올려야할 신물(新物)이 이르거나 늦으면, 성숙한 대로 올리고, 월령 (月令)에 구애하지 아니한다.

수수(蒐狩)에 사슴·노루·꿩을 올리는 데는 각기 두에다 담는다. 그 찬(饌)으로 해야 할 것은 종묘령이 부엌에 나아가서 가마[鑊]를 살펴보고, 그 소속을 거느리고 임시하여 짓는다

판전사(判典祀)의 자리를 조계(阼階)의 동남쪽에서 서향하여 설치하고, 또 관세위(盥洗位)를 조계의 동남쪽에서 북향하여 설치한다. 뇌(罍)는 세(洗)의 동쪽에 있게 하되 작(勺)을 얹어놓고, 비(篚)는 세의 서남쪽에 펼쳐 있게 하되 수건[巾]을 담아 놓는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세종실록』 오례에는 천신 종묘의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역시 종묘에 사냥한 짐승을 올리는 수수천금 의식을 덧붙이고 있다. 이때 천신 종묘의는 4계절에 따라 새로 생산되거나 성숙한 산물들을 종묘에 올리는 것이고, 수수 천금은 강무처럼 사냥을 통해 얻은 짐승을 종묘에 올리는 제사의식이다. 그런데 천신에 올려지는 짐승은 가을에 기러기, 겨울에 천둥오리와 토끼인데 반해 사냥을 통해 올려지는 사슴·노루·꿩을 올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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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근, 『조선풍속도』 토끼
김준근, 『조선풍속도』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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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세종실록』 오례에는 춘하추동 사계절에 천신할 때에 모두 27가지의 산물을 종묘에 올렸다. 주로 어류·새·짐승·곡류·과일·채소와 얼음이 확인된다. 천신이 주로 여름과 가을의 산물로 많이 올려졌음을 말해 준다. 그 가운데 사냥을 통해 잡은 날짐승은 기러기·천아(고니) 2가지이고, 들짐승으로 토끼 1가지로 확인된다. 따라서 월령에 의한 천신에서 사냥에 의한 천신은 3가지에 불과하였다. 반면에 강무와 같은 사냥을 통해서는 사슴·노루·꿩 3가지 종류가 말린 두(豆) 그릇에 담겨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성종 5년(1474)에는 『세종실록』 오례를 수정·보완하여 『국조오례의』가 편찬된다. 다만, 『세종실록』 오례와 달리 종묘 천신 의에는 천금의에 대한 내용이 별도로 기록되어 있지 않는다.

<표> 『세종실록』오례의 천신의(薦新儀)와 천금의(薦禽儀)의 제물360) 『세종실록』 권152, 오례, 천신종묘의 수수천금부.

  천신의 천금의
여름 가을 겨울  
첫달
(孟月)
변(籩)       감·귤·밀감 사슴·노루·꿩
두(豆) 송어 기장·피·조      
중간달
(仲月)
변(籩) 얼음 앵도·살구    
두(豆) 대맥·소맥·죽순·오이 벼·연어 천아(天鵝)·과어(瓜魚)    
끝달
(季月)
변(籩)   능금 대추·배    
두(豆) 고사리 가지·동과 기러기 토끼  
7 10 6 4 3

<표> 『국조오례의』길례 중 종묘천신의361) 『국조오례의』 권1, 길례, 종묘천신의.

  천신의
여름 가을 겨울
첫달     귤·밀감
청어 죽순 연어
중간달   앵두·살구 감·대추·밤  
빙송어 대맥·소맥·오이 벼·연어 천아·과어
  작(爵)     신주(神酒)  
끝달   능금    
고사리 벼·기장·피·조·가지·동과 기러기 물고기·토끼
3 13 9 7

『국조오례의』에는 천신의 종류가 모두 32가지로 확인된다. 따라서 『세종실록』 오례보다는 천신의 종류가 5가지 늘어났다. 또한, 사냥에 의해 올려지는 짐승의 경우 10월에 새가 추가되었는데, 아마도 꿩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국조오례의』에는 종묘에 천금하는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천신조의 주에 ‘맹동의 천금은 각각 두에 채운다.’라 하였고, 작은 주에 ‘사냥에서 잡은 금수’라고 하였다.362) 『선조실록』 권167, 선조 36년 10월 신묘.

성종대 강무 후에도 천금은 계속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성종 6년(1475)에 광주에서 타위하여 범 1마리, 노루·사슴·여러 짐승 등 44마리를 잡았는데, 예조 좌랑을 보내 종묘에 천금하게 하였다.363) 『성종실록』 권59, 성종 6년 9월 계유. 이때 천금은 사냥에서 잡은 짐승을 각각 한 마리씩 바치는 것이 원칙이었다.364) 『선조실록』 권167, 선조 36년 10월 신묘.

성종 19년(1488)에는 강무는 열병뿐 아니라 천금하는 것이 중요한데 황해도에 악질이 생겨 강무할 장소를 강원도로 정하였다.365) 『성종실록』 권218, 성종 19년 7월 을유. 또한, 이듬해에는 금화 현산에 이르러 삼신산과 고송산에서 몰이하여 타위하고 종묘에 천금하였다.366) 『성종실록』 권233, 성종 20년 10월 경인. 아울러 성종 23년에는 임금이 천점에서 사냥하는 것을 보고, 주서를 보내 종묘에 천금하였다.367) 『성종실록』 권270, 성종 23년 10월 경술.

16세기에 들어와 천재 또는 흉년이 들어 강무나 타위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연산군에 이어 종종도 타위하고 종묘에 천금하였다. 중종대에는 경기의 군사로 열병하고 천점(泉岾)·아차산·가현(柯峴) 등지에서 타위하여 종묘에 천금하였다. 당시 아차산에서 잡은 동물들은 새, 노루 8마리, 여우 1마리, 토끼 20여 마리, 꿩 30여 마리 등이었다. 한편, 중중대부터는 강무를 대신하여 새로이 동교에서 거행하는 답렵(踏獵)이 자주 시행되었다. 강무가 외방의 군사를 동원하여 사냥을 겸한 군사 훈련이라면 답렵은 경중의 군사만으로 간략히 시행하는 사냥을 겸한 군사 훈련이었다. 중종 29년(1534)에는 가현에서 타위하여 노루 한 마리를 잡기도 하였다.

한편, 강무나 타위 때에 천금할 짐승은 귀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만일 ‘할이(割耳)’이라 하여 짐승의 귀를 벨 경우에 천금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368) 『중종실록』 권78, 중종 29년 10월 계묘. 또한, 천금이 소중한 뜻이 있었던 만큼 아예 답렵을 타위라고 고쳤다. 천금은 으레 타위나 강무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국왕이 친행할 경우 민간에 대한 피해가 따랐기 때문에 자주하기는 못하였다. 그러자 맹수가 들끓어 백성과 곡식에 피 해를 입히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중종 34년(1539)에는 장수에게 당번 군사만을 이끌고 나가 전렵하고 천금하게 하였다.369) 『중종실록』 권92, 중종 34년 10월 계유. 이후 천금은 국왕의 친림 아래 이루어진 강무나 타위가 아닌 장수의 전렵에 의한 방식으로 전환하였다.370) 『중종실록』 권94, 중종 35년 10월 을해.

명종 즉위 이래 한동안 강무나 타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종묘에 천금하는 일조차 중단되었다. 그 결과 사나운 짐승이 자주 횡행하여 민생에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러자 명종 10년(1555)에 장수를 명하여 타위하였다.371) 『명종실록』 권19, 명종 10년 9월 병진. 그 후 타위에 친행을 하려했으나 천재지변을 이유로 결국 시행하지 못하고 말았다. 선조 19년(1586)에는 천금하기 위해 타위하되, 천점과 주압산에서 이틀에 걸쳐 하였다.372) 『선조실록』 권20, 선조 19년 10월 계해. 당시 흉년이 들자 천금은 거의 중단되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는 종묘의 천신과 천금을 회복하였다.373) 『선조실록』 권43, 선조 26년 10월 무술. 이어서 선조 36년(1603)에는 병사들의 타위를 겸한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상벌을 시행하였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예전에는 춘수(春蒐)·하묘(夏苗)·추선(秋獮)·동수(冬狩)를 다 농한기에 하여 무사(武事)를 강습하였고, 또 천금하는 예절에 있어 군졸을 교련하였는데, 바로 앉고 일어나고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익히기 위한 것이다. 낙엽이 진 뒤에 도제조 이하와 병조가 다 같이 도감과 여러 무사를 모두 거느리고 근교의 어느 곳에서 타위하여 한편으로는 무공을 익히고 한편으로는 무위(武威)를 빛냈다. 몰이를 끝낸 뒤에는 각초(各哨)의 장졸(將卒)이 잘하고 잘못한 것을 살펴서 상벌을 시행할 것을 의논하여 하라고 병조와 훈련도감에 말하라.”374) 『선조실록』 권43, 선조 36년 9월 계유.

7년 전란이 끝난 후 종래에 사냥을 통한 무사의 강습과 천금을 거론하는 자리에서 타위를 통한 군사 훈련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타위를 통한 군사 훈련은 실전훈련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자 이 같은 논의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결국 17세기 이후 사실상 강무를 통해 종묘 천금제도는 폐지되었고 그 대신 공납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한편, 천신은 시대가 지날수록 그 종류가 늘어났다. 정조 20년(1796)에 종묘령 이전수가 쓴 『매사문(每事問)』에는 월령이 국초의 것에 더하여 72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사냥에 의한 천신이 늘어나지는 않았다. 천신을 위한 사냥감은 기러기·꿩·천둥오리·토끼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러한 관행은 조선 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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