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3 권력과 사냥
  • 05. 호환(虎患)과 사냥
  • 호랑이 사냥부대의 창설
  • 3. 착호군의 창설
심승구

호환은 서울이 아닌 전국의 변방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연 호랑이 사냥부대가 지방에도 조직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해안가 주·군에는 국마(國馬)를 기르는 목장에 맹수가 돌입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하지만 해당 지역의 수령이 정해진 대응지침에 구애되어 상부의 결재를 받아 군사를 동원하므로 때를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은 목장에 호랑이가 나타나 고을 수령이 결재를 받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려 제거하자, 해당 감사가 죄를 물어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태종 17년(1417)에는 연변 주군의 변고에 따라 군사를 동원하는 방법을 새로이 정하였다.

지금부터 만일 변경에서 도적을 막거나 목장에서 호랑이를 잡는 위급한 일이 있으면, 소재지의 관사(官司)가 곧 군사를 조발하여 헤아려 대응하고 본도 감사에게 급히 보고한다. 사유를 갖추어 병조에 이문(移文)하면, 병조에서 사실을 조사하여 계달하는 것으로써 항식(恒式)을 삼으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404) 『태종실록』 권34, 태종 17년 12월 을유.

정부는 호환이 발생하면 그 고을 수령이 먼저 군사를 동원해 호랑이 사냥을 하고, 사후에 감사에게 급히 보고하게 하였다. 곧이어 감사가 병조에게 사실을 알리면, 병조가 사실을 조사한 후에 국왕에게 보고하는 절차를 만들었다. 국왕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보고체계를 만든 까닭은 지역에서 군사를 동원하는 일이 늘 반란에 이용되는 것을 극히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 앞에 호환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먼저 호환을 제거하고 나중에 보고하는 체계로 전 환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후 호환이 발생하면 인근 지역의 수령들이 지방군을 동원해 호랑이 사냥을 하였다. 예컨대 세종 16년(1434) 12월 전라도 백야곶 목장에 호랑이와 표범이 출몰하자 순천부사, 조양진 첨절제사, 각 포의 만호에게 군인을 거느리고 잡았다. 그 중에서 먼저 창질을 하거나 먼저 쏘아 잡은 자에게 잡은 수를 계산하여 벼슬을 주었다.405) 『세종실록』 권6, 세종 16년 12월 을축.

이와 같이 호랑이 사냥에 동원된 군사를 ‘착호군’이라고 불렀다. 다만, 착호군이 언제부터 출발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착호군의 기록이 처음 나타난 것은 세조 14년(1468)이다. 즉, 첨지중추부사 오자경이 군관 10인과 착호군 2백인을 데리고 호랑이 사냥에 앞서 왕에게 인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확인된다.406) 『세조실록』 권45, 세조 14년 2월 무자. 다만, 그 전에도 형조판서를 대장으로 삼아 겸사복과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호랑이를 잡았다. 이점으로 미루어 착호군은 호랑이를 잡기 위한 임시 조직으로 보인다.

각 도의 절도사가 군사 및 향리·역리·공천·사천 중에서 자원을 받아 착호군을 뽑았다는 사실은 그 같은 추정을 뒷받침해 준다. 다만, 착호군의 정원은 주와 부에 50명, 군에 30명, 현에 20명으로 삼았다. 전국의 군현 300여 개를 기준해서 계산하면 전국에 수천에서 수만 명의 착호군이 되는 셈이다. 만일 자원자가 없을 경우에는 여력(膂力)이 있고 장용한 사람을 택하여 정하였다. 이들은 범이 출현하면 수령이 징집하는 예비부대였다.407) 『성종실록』 권16, 성종 3년 3월 병진. 착호군에는 호랑이 사냥을 위한 몰이꾼도 있었는데, 몰이꾼에는 지방의 선군(船軍)도 포함되었다.

조선 후기에서 착호군은 지역마다 차이가 났다. 삼남 지방의 착호군은 영장 내지 토포사(討捕使)의 통솔을 받은 반면에 서북지방의 경우에는 순안사에 소속되었다. 특히, 숙종 6년(1680)에는 순안사의 군영에 소속된 착호군이 1년에 바치는 세가 1필뿐으로 다른 잡역 이 없자 날로 그 숫자가 증가하였다.408) 『숙종실록』 권10, 숙종 6년 12월 병신. 이처럼 조선 후기에 착호군이 늘어나는 배경 가운데 하나는 바로 신역이 가벼운 점도 작용하였던 것 같다. 각 지방의 착호군의 규모는 다음의 기록에서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평안도) 감영에 옛날에 착호군 5천명이 있었는데, 숙종 병자년(숙종 22, 1696)에 오부(五部)를 증설하고 이름을 ‘별무군(別武軍)’으로 바꾸었으며 또 ‘장십부(壯十部)’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군(元軍)을 합하면 1만1천명이나 되니, 이 군대는 본 감영의 군제 중 가장 큰 것으로 원래 정원을 준해서 충당하지 않을 수 없다.409) 『순조실록』 권17, 순조 14년 2월 무오.

위 기록에 따르면 조선 후기 지방의 착호군이 각 도의 감영에 소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숫자가 평안도의 경우에 5천명에 이른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다가 숙종 때 다시 5부를 증설하여 1만 1천명이나 되었는데, 이는 평양 감영에 소속된 부대 가운데 가장 큰 부대였다. 여기서 착호군을 ‘별무군(別武軍)’ 또는 ‘장십부(壯十部)’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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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착호군의 경우 순안사(巡按使)의 군영에 소속되어 착호 활동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별도의 잡역이 없이 1년에 1필만을 내면 되었기 때문에 평안도 병영에 소속된 군사는 줄어드는 대신, 순안사의 소속 군사는 날로 늘어났다. 더구나 범을 잡은 중 공사천에게 천역을 면제하고, 군사는 신역을 면제한다고 하자 공사천과 군사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숙종 8년(1682)에는 포상규정을 바꾸어 면천, 면역 조치 대신에 상포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호군관의 존재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착호군의 규모와 조직은 그후에도 계속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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