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3 권력과 사냥
  • 05. 호환(虎患)과 사냥
  • 착호 방법과 포상
  • 1. 착호의 사냥법
심승구

호랑이를 잡는 방법은 화살과 창·함정·우리·그물·노도(弩刀)·쇠뇌 등이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총이 추가되어 호랑이 사냥의 대표적인 사냥법이 되어 갔다.

우선 화살과 창은 고대로부터 호랑이를 잡던 방법으로 총포가 출현하기 전까지 대표적인 호랑이 사냥방법이었다. 다만, 호랑이는 한발의 화살이나 창 한 번의 찌르기로 잡기 어려웠다. 최소한 3발 이상의 화살이나 3번 이상의 창을 찔러야 잡을 수 있었다. 화살과 창으로 호랑이를 잡을 때, 화살 3발까지 창 3번 찌른 사람에게 상을 준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첫 번째 쏘아 맞춘 자를 선중전자(先中箭者), 두 번째 맞춘 자를 차중자(次中者), 세 번째 맞춘 자를 우차중자(又次中者)라고 하였다. 창 또한 마찬가지로 첫 번째 찌른 자를 선창자(先槍者), 이어 차중자(次中者), 우차중자(又次中者)라고 하였다.

호랑이를 잡을 때 어떤 화살을 쏘았는지는 기록상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다. 다만, 고구려 수렵도에 의하면 ‘명적(鳴鏑)’이라고 불리는 화살이 호랑이나 사슴 사냥에 사용되고 있는 점이 확인된다. 명적은 ‘명전(鳴箭)’으로, 일명 ‘우는 살’이라고 하였다. 옛날 전쟁을 시작할 때에는 먼저 우는 살을 쏘았으므로 이를 ‘효시(嚆矢)’ 또는 ‘향전(響箭)’ 이라고 불렀다. 효시는 그 뜻이 바뀌어 오늘날 사물의 시초라는 뜻으로 쓰인다. 효시는 화살촉에 호루라기와 같이 소리나는 깍 지를 달아 날면서 우는 소리를 냈는데, 효시의 촉은 뾰족한 것이 아니라 양쪽으로 갈라져 한번 맞으면 화살이 빠지지 않도록 만든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 태조 이성계의 경우가 사냥할 때, ‘대초명적(大哨鳴鏑)’이라고 불리는 큰 명적을 썼다. 대초명적은 싸리나무로써 살대를 만들고, 학(鶴)의 깃으로써 깃을 달아서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다. 순록의 뿔로써 호루라기[哨]를 만들어, 크기가 배[梨]만 하였다. 살촉은 무겁고 살대는 길어서 보통의 화살과 같지 않았으며, 활의 힘도 또한 보통 것보다 배나 세었다. 고려말 이성계는 노루를 대초명적 화살 한 개에 죽였는데, 잇달아 7차례나 한 발에 쏘아 죽였다고 한다.410) 『태조실록』 권1, 총서. 고구려 이래에 조선시대까지 대초명적이 사냥에 이용되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더욱이 표범이 화살 한 발에 죽었다는 사실은 대초명적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호랑이 사냥에도 대초명적이 사용되었음을 가능성이 크다.

확대보기
사냥도구인 창
사냥도구인 창
팝업창 닫기

그러나 호랑이 사냥에서는 화살보다도 창이 더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화살이 쓰이게 된 까닭은 호랑이가 워낙 사나운 짐승이므로 멀리서 호랑이를 쏘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호랑이 사냥은 화살보다 창이 더 많이 쓰였던 것 같다. 그 같은 사실은 고려 말 공민왕이 그렸다는 천산대렵도를 비롯하여 그 후로 그려진 호렵도(胡獵圖)에는 활보다 오히려 창으로 호랑이를 사냥하는 모습이 많은 사실에서 뒷받침된다. 회화자료에 따르면, 호랑이 사냥은 외발창이, 이지창, 삼지창 등이 사용된 것으로 확인된다. 창은 멀리서 던지거나 가까이 찔러서 호랑이를 잡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물론 말을 타고 창사냥을 하기도 하였다. 창사냥은 직접 맹수와 대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이 따랐기 때문에 반드시 산신령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여겨 산신에게 제 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었다.

확대보기
천산대렵도
천산대렵도
팝업창 닫기

한편, 창사냥은 산간지방에서 겨울에 썰매를 타고도 이루어졌다. 눈 덮인 높은 산 위에서 썰매를 타고 내려오면서 창으로 호랑이를 찔러 잡는 방식인데, 호랑이는 눈 위에서 빠르게 움직임을 할 수 없는 점을 이용한 사냥이다. 이들 사냥꾼을 썰매꾼이라고 하였다.

둘째, 호랑이 사냥에는 함기(檻機)가 사용되었는데, 일명 ‘함뢰(檻牢)’라고도 하였다. 함기는 호랑이나 표범 등의 짐승을 덮어 잡는 나무 우리를 뜻한다.411) 『경국대전주해』 권4, 병전, 함기. 호랑이가 잡히면 벼락처럼 내려 앉는다 해서 일명 ‘벼락틀’이라고 하였다.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통나무를 뗏목처럼 엮어놓거나 두터운 덮개를 만든다. 덮개는 비스듬히 세워 활대로 버텨 놓는다. 함기는 호랑이가 잘 다니는 길목에서 설치하되, 우리 안에 개를 매어 둔다. 호랑이가 개를 잡아 먹기 위해 우리 안에 들어오면 함기가 닺혀 도망가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벼락틀은 조선시대에 크게 성행하였던 방식으로 근래까지 남아 있었다.

확대보기
벼락틀
벼락틀
팝업창 닫기

함기는 호랑이나 표범을 생포하거나 가죽을 얻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더구나 호환의 확산을 위해 조선 정부는 화살과 창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함기를 설치해 적극적으로 호랑이를 잡았다. 여기에 함기를 설치한 또 다른 이유는 호랑이 사냥을 위해 대규모로 동원되는 군사활동에 따른 민폐와 관련이 있었다. 중앙에서 착호갑사가 한꺼번에 해당 지역에 파견되면 여러 가지 민폐를 끼쳤다. 반면 함기를 쓰는 방법은 민간의 폐단을 줄이는데 어 느 정도 효과적이었다. 함기는 관에서 설치한 공함기(公檻機)와 민가에서 설치한 사함기(私檻機)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함기는 사냥에 따른 인원 동원의 부담, 위험과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었다. 조선정부는 공함기로 잡은 호랑이를 화살·창으로 잡은 호랑이와 동일한 비중으로 포상하였을 정도로 공함기 설치를 권장하였다. 함기는 화살·창과 함께 가장 성행하였던 사냥법이었다.

확대보기
울주 반구대 암각화 내 호랑이가 우리 안에 갇힌 모습
울주 반구대 암각화 내 호랑이가 우리 안에 갇힌 모습
팝업창 닫기

셋째, 함정을 파서 호랑이를 잡는 방법이다. 함정은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창 5∼6개를 세워 꽂고 그 위에 삼대를 깔고 흙을 덜어 빠지면 잡는 방법이다. 구덩이에 창을 꽂았다고 해서 일명 정창(阱槍)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함정을 파 놓아 짐승을 잡는 방식은 원시시대 때부터 사용되던 방식이다. 비스듬한 비탈길에 구멍을 파서 잡는데 그 안에 창이나 나무를 꽃아 두었다. 호랑이 사냥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호랑이가 잘 지나다니는 길목에 함정을 파 놓아 잡았다. 민간에서 주로 사용한 함정은 호환을 막기 위함도 있지만,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을 얻기 위해서였다.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은 매우 희귀하여 비싼 가격으로 팔렸기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표범 가죽이 호랑이 가죽보다도 더 비싼 가격에 팔렸다는 사실이다. 호랑이 가죽 털이 뻣뻣한 데에 비해 표범의 가죽 색깔과 털이 부드러웠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실재로 당시 중국에서 조선의 최고 보물을 첫째 해동청, 둘째 표피라고 할 정도로 표피는 최고의 진헌품이었다. 표피는 일본에서도 요청하는 대표적인 물품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자 각도의 주군에서 수납하여 명나라에 진헌하는 표피를 수납할 때 조그만 구멍만 뚫렸더라도 받지 않았다. 진헌용 표피는 가죽과 함께 발톱이 갖춰져 있어야 하였다.

당시 가죽이 손상되지 않은 표피의 가격은 무명 40필에 이를 뿐 아니라 시장에서 찾아 봐도 쉽게 구하기 어려웠다.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을 상하지 않고 잡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에 세종 때부터는 구멍이 뚫린 것과 상관없이 몸체가 크고 털의 색깔이 선명한 것은 받아들이고,412) 『세종실록』 권1, 세종 즉위년 10월 무술. 각도 감사에게 민간에서 공물로 받는 값 대신 각 고을에서 함정으로 잡은 것만 상납하도록 하였다.413) 『세종실록』 권19, 세종 5년 3월 갑신. 하지만 표피나 호피는 쇠뇌로 잡은 것도 허락하였다.

이처럼 함정은 민간에서 공물로 진상하기 위하여 전국 각 지역마다 거의 설치되었다. 이를 위해 각 지방에는 별도로 함정만을 관리 감독하는 함정 도감고(都監考)와 소감고(小監考)가 설치되었다. 함정으로 잡은 호피와 표피가 공물로 계속 바쳐진 까닭에 호랑이 사냥으로서 함정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아울러 다산 정약용도 함정을 파서 민폐를 없앨 것을 강조하였다.

넷째, 그물을 사용하여 호랑이를 잡는 방법이다. 그물의 크기와 코의 너비는 잡는 짐승에 따라 달랐다. 그물에는 잡는 대상에 따라 호랑이그물, 노루그물, 여우그물, 매그물 등 다양하였다. 그 가운데 호랑이를 잡는 그물을 ‘호망(虎網)’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아예 그물로 짐승을 잡는 별도의 부대인 망패(網牌)가 사복시 내에 있었다.

호망은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그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호망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그물을 만든 만큼 크기가 매우 크고 무거웠다. 따라서 호망을 이동하려면 반드시 말을 이용해야 하였다. 군사들이 호랑이 사냥할 때 쓰는 호망을 일정한 장소에 쳐 놓고 몰이사냥을 하는 형태였다. 몰이꾼을 좌우로 나눠 사냥개와 함께 징과 꽹과리 등을 치며 호랑이를 몰아 놓고 말을 달려 활로 쏘아 잡는 방식이었다. 이와 달리 피나무 껍질이나 삼끈으로 뜬 긴 자루 꼴의 호망을 만들어 동굴 앞에 그물을 쳐 놓고 잡기도 하였다. 그런데 호망은 실제로 호랑이를 잡기 위한 목적보다는 호환 방지용으로 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왕이 능침을 참배할 때 주위에 호망을 쳐 놓기도 하고 산간 마을에서 호랑이가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호망을 쳐 놓기도 하였다.

다섯째, 노도(弩刀)를 이용한 사냥법이다. 노도는 반달처럼 생겨 안팎에 칼날이 있는 덫의 일종이다. 마치 칼을 노처럼 쏜다고 해서 ‘노도’라고 하였는데, 이를 민간에서는 ‘선우’라고 부른다. 원래 날을 뜻하는 ‘손’ 또는 ‘손애’에서 비롯된 말로 추정된다. 날로 후려친다는 뜻으로 ‘후래채손’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노도는 짐승이 다니는 길가에 박은 두 개의 말뚝 사이에 탄력이 강한 나무를 끼워서 강제로 휘고 그 끝에 끝이 꼬부라진 칼을 잡아맨 사냥도구이다. 지나가던 짐승이 건너 쪽 말뚝에 연결된 끈을 건드리면 걸림대가 벗겨지면서 나무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힘에 따라 칼이 몸을 찌른다. 날이 하나인 것을 외선우, 두 개인 것을 쌍선우라고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호랑이를 잡는 방법으로 가장 좋은 것은 노도를 쓰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좋은 방법은 함뢰(檻牢)를 쓰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정창(阱槍)이다. 그리고 화포를 쓰는 것은 최하의 방법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포수가 호랑이 사냥을 하는 데에는 적게는 몇 십 명에서 많으면 1백 명이나 떼를 지어 마을을 횡행하는데, 그들이 술과 밥을 토색질하여 생기는 피해가 주민들에게는 오히려 호랑이나 늑대로 인해 생기는 피해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수령은 이런 행패를 결단코 막아야 하며, 마을마다 노도를 설치하도록 명을 내려 대여섯 마리씩 잡아 죽인다면 호랑이 떼가 멀리 달아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확대보기
조총
조총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화승총
화승총
팝업창 닫기

여섯째, 총으로 잡는 방법이다. 임진왜란 이후 호랑이 사냥은 주로 조총으로 하였다. 이는 종래 활이나 창으로 잡는 사냥술에서 큰 변화였다. 총이 등장한 이후에도 활이나 창으로 하는 호랑이 사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조총의 등장은 호환을 제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조총의 기술은 사냥을 하기에 가장 제격이므로 사람을 죽이는 변고가 일어날까 더욱 우려됩니다.”라는 지적에서 알 수 있다.414) 『정조실록』 권29, 정조 14년 2월 정묘. 조총은 사냥, 특히 호랑이 피해를 제거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다만, 당시 조총은 화승총으로 명중률도 낮고 치명상도 입히기 어려워 가까운 거리에서 쏘아야 하였다. 또한, 한방을 쏘고 나면 총구에 화약을 다시 넣고 다진 후에 탄알 두세 발을 넣고 화승에 불을 붙여 방아쇠를 당겨야 했으므로 총을 쏘는데 시간이 걸렸다.

확대보기
쇠뇌의 구조
쇠뇌의 구조
팝업창 닫기

이 밖에 쇠뇌도 호랑이 사냥을 위한 중요한 방법이었다. 중종 때 창평인 노적(老積)은 범 발자국을 추적해 쇠뇌를 쏘아 잡는 것으로 유명하였는데, 단천 갑사 최종(崔宗), 정병 김달(金達) 등은 3인 1조가 되어 호랑이를 발견하면 즉시 달려들어 찔렀다.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관마(官馬)를 불러와 호랑이를 잡게 하였다. 국왕은 이들을 포상함은 물론 그들의 범 잡는 기술을 해당 도의 감사에게 지시하여 백성들에게 전습하게 할 정도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