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3 권력과 사냥
  • 05. 호환(虎患)과 사냥
  • 호환과 반란
심승구

민간이 아닌 국가가 주도하는 사냥의 경우에는 늘 군사들을 동원하는 집단적인 몰이사냥이 특징이었다. 국가에서 군사들을 동원하여 사냥할 때에는 병조가 왕명을 받아서 공문서를 발송한 뒤에 군사를 징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사냥은 국가가 정한 때나 목적 이외에는 철저히 금지되었다. 각지의 수령이 군사나 백성들을 함부로 동원하여 사사로이 사냥을 할 가능성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혹 반란에 이용될 소지가 컸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방의 수령이 매년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습진(習陣) 때에는 발병부를 기다리지 않고 징병할 수 있었다. 『병정(兵政)』에 따르면, ‘매년 2월과 10월에 여러 도의 절도사가 도 내의 군사를 징발하여 10일치나 20일치의 양식을 싸가지고, 좌도·우도가 서로 바꾸어 습진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예종 즉위년(1468) 10월에는 전라절도사가 호랑이를 잡는다고 명하고 군사를 모아 순창과 광주에서 정례적으로 실시하던 습진 훈련을 역모로 오인하여 국문하기도 하였다.424) 『예종실록』 권2, 예종 즉위년 11월 갑신. 당시의 군사 훈련은 남이(南怡)의 옥사와 더불어 음모를 내통하고 군사를 규합한다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정기적인 습진 이외에 군사를 동원할 때에는 반드시 상부에 보고를 거친 후, 국왕의 재가가 이루어진 후에야 병력을 움직일 수 있도록 법제화하였다. 그러나 ‘호환’ 또는 ‘호재(虎災)’가 발생할 경우에는 예외로 인정하였다. 가축이나 사람이 피해를 입을 경우에 시급히 조치하지 않으면 피해가 커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지배층은 호환을 천재지변과 마찬가지로 군주의 공구수성(恐懼修省)을 요구하는 ‘여기(厲氣)’, ‘병상(兵象)’, ‘재변(災變)’ 등으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재변을 속히 제거하는 것이야 말로 군주의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하는 덕[好生之德]의 구현이라는 상징적 통치행위였다.

만일 호환이 발생하면, 해당 지역의 수령은 호랑이나 표범으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지역의 군사를 동원하여 호환을 제거하고 사후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물론 여러 읍에서는 항상 널리 함기(檻機), 함정(陷穽), 기계(機械)를 시설하여 사나운 맹수를 포획하였다. 그런데 만약 변란에 대처하거나 도적을 잡거나 또는 사나운 맹수가 사람과 가축에 해를 끼칠 때에는 군사를 동원할 때 허가증인 발병부(發兵符)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군사를 동원한 뒤에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호환은 혁명을 꾀하거나 반란을 모의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호환을 제거하기 위한 사냥은 늘 반란군 동원에 중심이 되었다. 호환의 경우는 악수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지역의 수령이 먼저 군사를 동원하여 호환을 제거하고 사후에 보고하는 군사동원의 제도적인 약점을 이용하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인조반정은 바로 호랑이 사냥을 명분으로 군사를 모아 정 변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즉, 광해군 14년(1622)에 이귀가 평산부사로 부임할 때, 왕이 황해도 평산과 송경(松京) 간에 호환이 심하여 파발길이 끊어질 지경이므로 호랑이를 잡을 것을 명하였다. 이미 다른 마음을 품고 있던 이귀(李貴)는 이를 기회로 정변을 일으키고자 엽호(獵虎)에 동원되는 군사를 경기도와 황해도 경계에 한정하지 않을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군사를 동원할 때 관할구역을 벗어날 수 있는 허락을 받은 셈이었다. 그리하여 그 해 12월 범을 잡는다고 군사를 풀어 흥의동(興義洞)에 모아 장단방어사 이서(李曙)와 함께 정변을 일으키고 도성의 창의문까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들어올 수 있었다. 이처럼 사냥은 국가 변란을 꾀하거나 반란의 혐의가 드러나 죄인을 처벌할 때 등장하는 사건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사냥의 본래 목적이 생산 활동이나 경제 행위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바로 이러한 사냥의 일반적인 인식을 역이용하여 정적을 공격하거나 또는 반란을 도모할 때 주로 사용되던 전략이 바로 호환이었던 것이다. 또한, 북방의 국경선 근처에서 이루어진 사냥은 피아를 막론하고 상대를 살피거나 기습 공격을 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 이러한 방법은 간혹 적을 속여 목적을 달성하는 명분없는 행위라고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사냥을 속임수로 사용하는 일은 비일비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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