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4 포수와 설매꾼
  • 01. 사낭꾼의 명칭과 추이
심승구

흔히 오늘날 ‘사냥꾼’하면 ‘포수’를 떠올린다. 하지만, 포수는 임진왜란 중 조총이 등장하면서 생겨난 군인의 칭호다. 원래 포수가 등장하기 전에 사냥꾼은 엽인(獵人), 엽자(獵者), 엽군(獵軍), 엽도(獵徒), 전렵인(田獵人), 전렵자(畋獵者), 수인(獸人), 망패(網牌), 치토자(雉兎者), 응패(鷹牌), 응사(鷹師), 응인(鷹人), 행렵군인(行獵軍人), 엽치지군(獵雉之軍), 엽치군(獵雉軍), 해척(海尺), 격수(擊獸), 산척(山尺), 우인(虞人)썰매꾼[雪馬軍] 등 다양하게 불렀다. 여기에 구렵군(驅獵軍), 엽저구군(獵猪驅軍) 등의 몰이꾼도 넓은 의미에서 사냥꾼에 포함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물품을 충당하기 위해 관청에 소속되거나 공물을 담당하는 사냥꾼과 함께 다양한 민간 사냥꾼들이 존재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일반적으로 사냥꾼을 부르던 칭호가 엽인·엽자·엽군 등이었다. 이들 사냥꾼은 민간에서 사사로이 동물을 잡을 때에는 ‘사렵인(私獵人)’, ‘사렵자(私獵者)’ 등으로 불렸지만 국가의 관청에 소속되거나 군역을 담당할 경우에는 보통 ‘엽군’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사냥꾼은 사냥하는 도구나 수단, 그리고 방법에 따라 달리 불렸다. 예를 들면 매나 개로 사냥할 경우는 응인(鷹人) 그물로 사냥 할 경우에는 망패(網牌), 썰매를 타고 사냥할 경우에는 썰매꾼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임진왜란 이전에는 포수를 제외하고 다양한 사냥꾼의 명칭이 존재하였다.

그러다가 16세기말 임진왜란으로 일본군을 무찌르기 위해 시급히 조총을 도입하면서, 이를 다루는 포수(砲手)가 등장하였다. 흔히 ‘총병(銃兵)’이라고 불린 포수는 활을 다루는 사수(射手), 창검을 다루는 살수(殺手)와 함께 삼수병(三手兵)의 하나였다. 총포에 따른 포수의 등장은 종래의 창이나 활보다 위험성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적중률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이제 사냥 기술은 창이나 활에서 점차 총포 위주로 변화되어 나갔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총포의 출현과 함께 포수가 등장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사냥사의 큰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조총이 등장하였다고 해서 곧바로 창이나 활에 의한 사냥술이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갈수록 총포에 의한 사냥방식이 비중이 커졌지만, 그 나머지 사냥술이나 방법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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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총포가 확산되고 포수가 늘어나면서 포수 가운데는 군인으로서의 포수 이외에 민간 포수인 사냥꾼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전자를 관포수(官砲手)라고 하고 후자를 사포수(私砲手)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점차 포수는 군사로서의 포수와 사냥꾼으로서의 사포수로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관포수와 사포수가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었다. 군인으로 복무할 때는 관포수이지만 개별적으로 사냥할 때는 사포수였기 때문이다. 총포를 위주로 한 사냥꾼이 갈수록 비중이 커져갔지만, 그 밖에 다양한 사냥술에 의한 사냥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포수가 출현한 이후에도 종래 사냥꾼의 여러 칭호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군인으로서는 사라지고 사냥꾼으로서의 직업 포수만 남게 되었다. 그 결과 사냥꾼하면 직업 포수 를 뜻하는 말로 굳어져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결국 사냥[獵]하는 군인[軍]을 뜻하는 ‘사냥군’이 ‘사냥꾼’으로 변화된 것이다. 다만, 근대 이전의 사냥꾼은 국가나 관청에 소속된 사냥꾼과 민간 사냥꾼으로 구분된다. 여기서는 근대 이전의 사냥꾼에 한정하여 언급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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