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4 포수와 설매꾼
  • 02. 사냥꾼의 유형과 실제
  • 국가 소속 사냥꾼
  • 1. 매사냥꾼
  • 엽치군
심승구

엽치군은 응사계를 뒤이어 조선 후기 정조 때 매사냥을 위해 조직된 군사였다. 엽치군은 꿩을 사냥하는 군인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들을 ‘엽치원군(獵雉元軍)’ 또는 ‘엽군(獵軍)’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사냥꾼이라고 부르는 말은 본래 엽군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매를 이용한 꿩사냥에는 일공(日供)과 월공(月供)이 있었다. 일공은 주로 국왕과 왕실의 수라상을 위해 주원과 사옹원에 산 꿩으로 제공되었고, 월공은 각종 국가제사의 제수를 위해서 제공되었다. 하지만 꿩을 항시 조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를들면 여름철 초목이 무성한 5월에는 꿩사냥이 어려웠다. 그러자 정조 때에는 주원(廚院), 사옹원에서 일공(日供)하는 산 꿩을 다른 것으로 대신하여 바치게 하였다.478) 『정조실록』 권9, 정조 4년 5월 무술. 당시 왕실의 수라상을 위해 제공하는 일공은 주원, 사옹원, 경기 감영에 바치도록 하였다.

경기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아뢰기를, …… 주원(廚院) 및 신의 영(營)에서 바치는 산 꿩은 일공(日供)과 관계되는데, 공인(貢人)이 매년 겨울 말 봄 초에 본영으로부터 물침 공문(勿侵公文)을 받아가지고 사냥을 잘하는 자를 모집해서 여러 도로 두루 보내는데 사냥의 지속(遲速)이 원래 기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또 부득이 처자(妻子)를 거느리고서 길을 집으로 삼아 도처에서 밥을 구해 먹는 즈음에 민간에서 소란을 피우게 되는 것은 본디 필연의 형세이지만 근래보다 더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479) 『정조실록』 권23, 정조 11년 3월 병자.

위 기록에서와 같이, 생치는 사옹원과 경기 감영에 날마다 바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를 위해 공인은 매년 겨울 말과 봄 초에 공문을 받아 꿩사냥을 잘 하는 엽치군을 모집해서 여러 도로 보내 파견하였다. 그러나 꿩사냥의 기한이 없자 사냥꾼들은 으례 처자를 거느리고서 돌아다는 바람에 민간에 소란을 자주 피웠다.

엽치군 일행 가운데는 사냥꾼 이외에 허다한 부량배들과 함께 사냥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민가를 소란하게 할 뿐 아니라 살인사건까지 벌어지는 등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더구나 사냥꾼이 관가의 공문을 가지고 민간을 공갈 협박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진영에 호소하여 장교를 보내면 오히려 총칼을 들이대며 관청에 대항하는 등 폐단이 매우 심각하였다. 이에 정조 11년(1787)부터는 사냥첩문은 매년 몇 패, 몇 명인지를 분명히 정하고 군인의 명단을 써 넣어 아무나 포함되지 않게 하며 매년 말 첩문을 거두었다가 초봄에 다시 새것으로 교체하여 발급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정조 12년(1788)부터는 날마다 바치는 생치를 꿩이 떨 어져 없을 때에는 산 닭을 대신 바치는 정식으로 삼았다. 또한, 그 해 5월에는 강원도 강릉의 엽치군을 폐지하였다. 원래 강릉에서는 매년 12월 임금의 수라상, 즉 어공(御供)에 올릴 납치(臘雉)를 위해 포군 수 십명을 정하여 궁납(宮納) 납육(臘肉)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산육(山肉)을 구하기 어렵게 되자, 포군 1명당 꿩 10마리씩을 대납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 비용이 군포 2필을 바치는 양역보다 심하였다. 그러한 사실은 다음 기록에서 잘 확인된다.

강릉(江陵)에 있는 엽치군을 없앴다. 구례(舊例)에 해부(該府)가 포군(砲軍) 수 십명을 정하여, 궁납(宮納)하는 납육(臘肉)을 담당하도록 하였는데, 중간에 산육을 구하기 어렵다 하여 포군 1명당 꿩 10마리씩을 대납(代納)하게 하였다. 근년에 와서 포군에 궐액(闕額)이 많으므로 호조가 해도에 신칙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상이 이를 듣고 전교하기를, “첨정(簽丁)은 바로 백성들이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군수(軍需)에 충당하기 위해 군포(軍布)를 걷는 것도 오히려 가여운데, 하물며 궁납하는 납치(臘雉)이겠는가. 또 더구나 포졸 1명이 10마리의 꿩을 바치는 것은 그 비용이 2필을 바치는 양역(良役)보다 심한 것이겠는가. 조금이라도 백성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어공에 구애될 것이 무엇이 있는가. 혁파하도록 하라.”하였다.480) 『정조실록』 권25, 정조 12년 6월 경자.

이처럼 궁납하는 납치가 양역보다 더 큰 고역이었다. 그러자 포군이 갈수록 줄어들었고 민폐는 더욱 커져갔다. 이에 정조는 강릉 엽치군을 아예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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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정조는 종래 응사계였던 것을 장용영을 설치하면서 엽치군으로 대체하였다. 하지만 엽치군에 따른 폐단이 커지자 이를 폐지하고 엽치군에 의한 꿩사냥 대신 값으로 바치도록 하였다. 아울러 멧돼지나 노루사냥도 꿩사냥과 다를 바 없다 하여 그것 역시 공물로 환산하였다. 이후에는 각도에 명하여 납육(臘肉)을 호서(湖西)의 예대로 경청(京廳)이 공물로 환산해서 바치도록 하였다.481) 『정조실록』 정조대왕행장, 천릉지문. 이는 다시 응사계가 부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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