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4 포수와 설매꾼
  • 02. 사냥꾼의 유형과 실제
  • 국가 소속 사냥꾼
  • 2. 망패
심승구

망패(網牌)는 그물, 즉 ‘망자(網子)’ 또는 ‘망고(網罟)’를 이용해 짐승을 잡는 사냥꾼이다. 그물을 써서 짐승을 잡는 것을 ‘낭고(郎罟)’라고도 한다. 창이나 활을 사용할 경우 같은 도구를 이용해 짐승을 잡을 때,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물을 사용한 것이다. 망패는 주로 그물 망을 둘러 쳐 꿩, 노루, 사슴 등의 새나 짐승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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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풍칠월도」 중 사냥하는 모습
「빈풍칠월도」 중 사냥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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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는 제사에 쓸 제수용품을 마련하기 위해 국가의 역을 담당하는 사냥꾼으로 세종 때부터 망패를 설치하였다.

의정부에서 계하기를, “지금 제사에 쓸 제수(祭需)는 철원과 평강의 사냥꾼으로 하여금 ‘망패’라 칭하여 사냥해서 바치게 한다. 오로지 내선(內膳)만을 일정하게 맡은 사람이 없으므로 혹시 절핍(絶乏)할 때가 있어 신하가 임금을 받드는 뜻에 어긋납니다. 더군다나 두 지역에서 사냥하는 사람은 많게는 백여 명이나 되면서도 매달 문소·광효 두 전(殿)의 삭망(朔望)에 쓸 제수만 공급하고 있으니, 이름만 사냥하는 사람이지 실상은 한역(閑役)에 불과합니다. 원컨대 주나라 제도의 수인(獸人)의 직책에 의거하여 내선까지 겸하여 공급하게 하고, 그 사냥하는 사람들을 세 번으로 나누어 관청에서 그물 만드는 비용을 주어 윤번으로 10일 마다 한 번씩 사냥하여 바치게 하소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482) 『세종실록』 권32, 세종 8년 6월 병자.

위의 기록처럼, 조선왕조에서는 국초부터 국가 제사의 제수 마련을 위해 경기도 철원과 강원도 평강의 사냥꾼을 망패라 칭하고, 사냥해 바치게 하였다. 이들은 원래 철원과 평강의 민간 사냥꾼이었으나, 별도로 망패로 불리면서 국가의 역을 맡은 존재로서 많게는 1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확인된다.

망패가 제수를 바친 것은 종묘가 아닌 원묘(原廟)의 제사를 위해서였다. 원묘는 선왕과 왕비의 신위를 종묘에 부묘(祔廟)한 것 외에 별도로 세운 사당이다. 세종대의 원묘는 문소전(태조와 비 신의왕후 사당), 광효전(태종의 사당) 등이 있었다. 망패는 매달 문소전과 광효전의 매달 초하루와 그믐 제사에 사용할 제수를 공급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런데 임금의 수라상을 위한 내선(內膳)을 맡은 사람이 없어 혹 고기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할 우려가 있었다. 이에 주나라의 수인제도에 의거하여 망패에게 임금의 수라상에 올릴 내선까지 겸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망패는 이처럼 조선왕조가 제수 마련을 위해 그물을 이용한 몰이사냥꾼이었던 셈이다. 그물 사냥을 할때 사냥꾼들은 ‘망고’라는 노래를 불렀다.

산에는 짐승이 있고 / 山有獸兮

물에는 고기가 있어 / 水有魚

그물을 치니 / 網罟設兮

백성의 해가 없어졌네 / 民害除

산에는 짐승이 있고 / 山有獸兮

물에는 고기가 있어 / 水有魚

그물을 치니 / 網罟設兮

백성이 비로소 편안해졌네 / 民始舒.483) 『상촌선생집』 권4, 악부체, 망고.

위의 노랫말은 복희씨의 악가로 뜻은 대체로 복희씨가 사람들이 금수(禽獸)를 쉽게 잡을 수 있도록 인도해 준 노고를 칭송한 것이라고 한다. 일종의 사냥을 위한 노동요였던 셈이다.

원래 조선왕조는 강무를 통해 새와 짐승을 잡아 제수를 마련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러나 먼 곳까지 나가서 하는 국왕의 강무가 사실상 어렵게 되자, 별도로 망패를 강무장에 보내 제수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경기도 철원도부에 망패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확인된다.

강무장(講武場)이 부 북쪽에 있다(땅이 넓고 사람이 드물어서, 새와 짐승이 함께 있으므로, 강무(講武)하는 곳으로 삼고, 지키는 사람[守者]과 망패(網牌) 90명을 두었다).

위의 기록에서 망패가 강무장이 설치된 경기도 철원도호부의 거주민에 한정해서 90명을 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세종초 처음 망패를 조직될 때만 해도 경기도 철원과 강원도 평강 두 지역의 사냥꾼으로 이루어졌던 것과 달리 세종대 말에는 경기도 철원지역에 한정해서 망패가 구성된 것을 말해 준다. 철원은 땅이 넓고 사람이 드물어 새와 짐승이 많았기 때문에 강무장이 되었다. 이러한 강무장에 망패를 두어 제수를 공급하였던 것이다.

망패는 국가의 명을 받아 제수용품을 진상하였다. 그만큼 망패에게는 사냥과 관련해서 일종의 특권이 주어졌다. 그 결과 해마다 새와 짐승을 잡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폐단이 발생하였다.

유학(幼學) 최진현(崔進賢)이 상서하기를 “강릉부(江陵府) 진부현(珍富縣)을 강무장(講武場)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그 폐해 받음을 신이 갖추어 아뢰옵니다. 예전 우리 태종께서 이곳에 거둥하신 것은 놀고 사냥하는 곳으로 만들고 자 함이 아니온데, 뒤에 드디어 강무하는 곳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태종의 본의가 아니옵니다. 근래에 길이 험하고 멀어 만승(萬乘)으로 가서 순행할 땅이 아니므로, 강무하는 곳을 고쳐서 망패(網牌)를 설치하는 장소로 삼아 새와 짐승의 해를 없애고 건두(乾豆)의 자료를 준비하게 하여 공사(公私)가 편리하게 하려고 하였사오나, 해마다 망패가 내려가면 여염(閭閻)을 침해하여 개와 닭이 편히 쉬지 못하여 소란스러운 폐단이 대가(大駕)를 공돈(供頓)하는 비용보다 심하옵니다.484) 『세종실록』 권123, 세종 31년 2월 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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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장 내에서 사냥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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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처럼 망패가 그물 사냥을 위해 민간의 개나 닭을 잡아가 여염집의 피해가 커지자 오히려 국왕의 강무 때보다도 폐단이 더 심하였다. 그러나 제수를 마련하기 위한 망패의 존재는 쉽게 폐지할 수 없었다. 오히려 시대가 지날수록 천신(薦新)을 위한 제수가 늘어남에 따라 망패의 역할은 더 늘어났다. 그런 사실은 좌우패로 구성된 망패 이외에 별도로 겸관(兼官)이 연산군대에 등장한 점에서 알 수 있다.485) 『연산군일기』 권36, 연산군 6년 2월 정유. 겸관은 말을 이용해 사냥하는 것으로 미루어 겸사복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 겸사복이 망패와 함께 그물 사냥에 나섰던 것이다.

겸사복이 주관하는 망패 사냥은 타는 말과 그물을 실은 말들의 먹이를 민간에서 구하는 등 폐해가 자주 발생하였다. 그러자 새끼노루와 사슴을 천신하거나 진상하는 것을 제외하고 망패사냥을 폐지하고 제수가 나는 고을에서 바치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486) 『연산군일기』 권36, 연산군 6년 2월 정유. 하지만 망패사냥을 폐지하면 그 폐해가 다시 백성들의 부담으로 돌아가게 됨에 따라 실현되지 않았다.

처음에 사복시의 망패 사냥은 물건을 생생하게 진상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15세기에는 서울의 동교 및 경기 근방에서 잡기 때문에 그 물건들도 신선하고 폐단도 없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서는 가까운 지방에 새·짐승이 없고 강무장에서는 모두 사냥을 금하기 때문에 부득이 강원·황해도 등지로 깊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망패사냥을 위해 겸사복이 인원 30여 명과 말 30여 필을 데리고 다녔다. 또한, 그들은 해당 지역의 군사를 동원하여 여러 날을 쫓아다니며 사냥하는 과정에서 일체의 마초와 양곡을 모두 백성들에게서 징발하는 폐단을 일으켰다. 더욱이 한 달에 걸쳐 잡은 것이 5∼6마리에 지나지 못하는데, 머나먼 길에서 실어오면 벌써 맛이 변해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연산군 6년(1500)에는 사복시의 망패사냥을 폐지하였다.487) 『연산군일기』 권37, 연산군 6년 3월 을묘. 또한, 제육(祭肉)으로 쓸 노루·사슴 잡는 사람을 근무 일수를 계산하던 것을 잡은 수에 따라 급요로 계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망패사냥에서 매번 상·대호군이 녹을 받고 여러 날 머물기는 하나, 잡는 것은 얼마 안 되고 녹만 많이 받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실제로 천신을 위한 망패사냥을 폐지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제육으로 쓰는 노루나 사슴 같은 것은 천신을 위해 망패사냥을 그대로 하되, 그 나머지 진상용은 경기·강원·황해 등의 여러 도에 나누어 배정하도록 하였다.488) 『연산군일기』 권37, 연산군 6년 3월 병진. 한편, 망패는 제수를 위한 사냥뿐 아니라 강무장 내에서 일어나는 짐승의 농작물 피해를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예컨대 문종 때에는 강무장 내에 멧돼지가 번식하여 곡식을 손상하자 중앙에서 파견된 사복시의 관원과 함께 멧돼지 사냥을 한 것이다.

성종 23년(1492)에 편찬된 『대전속록』에는 망패군의 존재가 확인된다. 즉, 철원부 41인과 평강현 24인을 망패군으로 삼되 각각 2정의 보인을 지급하여 국가 제수를 위한 사냥을 담당하게 하였다.489) 『대전속록』 병전, 잡류. 이와 함께 조선왕조는 짐승들의 서식을 돕기 위해 사냥처에는 나무를 심기도 하였다. 즉, 각처의 강무, 사장, 주필처에는 소재지 관청으로 하여금 잡목을 심도록 하는 한편, 화전을 하거나 벌목하는 일을 금지하였다.490) 『대전속록』 공전, 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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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록도(群鹿圖) 16세기
군록도(群鹿圖) 16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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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패사냥은 중종대에 들어와 폐지되었으나 그 대신 겸사복이 사나운 짐승을 잡는 일은 계속되었다. 다만, 종래 좌우망패를 이끌고 사냥하던 겸사복 망패가 폐지되자 대신 군사들을 이끌고 사냥하였다. 하지만 군졸들을 이끌고 사나운 짐승을 제거하기 위해 장소도 없이 기한도 없는 사냥 활동은 반정에 의해 집권한 중종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중종 31년(1536)에는 겸사복에세 미리 군사를 내주지 말고 사전에 사나운 짐승이 있는 곳을 알고 난 뒤에 군사를 보내 쫓아내도록 하였다.491) 『중종실록』 권31, 중종 31년 4월 임진. 그후 국가에 소속된 망패사냥은 사라졌고 제향을 위한 진상은 민간 사냥꾼의 공납에 의해 맡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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