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4 포수와 설매꾼
  • 02. 사냥꾼의 유형과 실제
  • 민간 사냥꾼
  • 1. 산척·산행포수
심승구

민간 사냥꾼 가운데는 ‘산척(山尺)’이 있었다. ‘산쟁이’라고도 하는 산척은 산골에서 사냥이나 약초를 캐는 일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501) 『선조실록』 권72, 선조 29년 2월 무술, “且有山洞之民 射獵爲生(名爲山尺)者 其數甚多.” 산척은 전국에 분포되어 있었지만 평안도와 함경도, 그리고 강원도 산골짜기에 특히 많았다.502) 『선조실록』 권31, 선조 25년 10월 을사. 산척의 수가 얼마인 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평안도 강계지역의 경우 산척 수가 수백 명을 밑돌지 않았다고 한다.503) 『선조실록』 권35, 선조 26년 2월 갑오. 산척의 사냥 활동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지역의 짐승을 토산물로 받치는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은 민간 사냥꾼인 산척을 새롭게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산척은 주위 산세와 지형을 잘 알 뿐만 아니라 말 달리고 활을 잘 쏘았다.504) 『선조실록』 권35, 선조 26년 2월 임진. 이는 전쟁에서 적을 막는데 요긴한 장점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왕조는 우선 강원도 방비를 위해 산골의 백성 가운데 사냥을 생업으로 삼은 산척을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산척들은 국가가 급히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평소 국가의 관심 밖에 있는 그들은 전쟁 참여에 적극적일 이유가 없었다. 또한, 수령들이 산척을 사사로이 비호하여 동원하길 꺼린 점도 그들이 전쟁에 참여하기 어려운 배경이 되었다. 계속되는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산척들은 응하거나 따르려 하지 않았다.505) 『선조실록』 권31, 선조 25년 10월 을사.

비변사가 아뢰기를 …… “또 산골 백성 중에 사냥으로 생업을 삼는 자가[산척(山尺)이라 부른다] 몹시 많습니다. 만약 곳에 따라 이들을 취합한 후 그들의 요역(徭役)을 견감하고 은혜로 어루만지며 예리한 궁시(弓矢)를 주어 적이 내침할 때 미리 매복시켜 대비하게 하면 아마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타 군사의 훈련과 양식의 저축 등 모든 일은 중대히 조치할 문제라 일찍이 조정의 분부가 있었으니, 감사가 심력을 다해 시행함에 있을 뿐입니다. 이 뜻으로 말하여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상이 따랐다.506) 『선조실록』 권72, 선조 29년 2월 무술.

위의 기록처럼 조선왕조는 전국에서 산척을 불러 모아 요역을 견감하여 무기를 지급하고 훈련과 양식을 지급하는 등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였다. 산세를 잘 아는 이들을 복병으로 삼아 왜적을 방비하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곳곳에 매복한 산척들은 왜군을 격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507) 『선조실록』 권29, 선조 25년 8월 갑오. 이에 산척들에게 궁시는 물론이고 화약이나 총포를 훈련시켰다.508) 『선조실록』 권48, 선조 27년 2월 무진. 그러자 산악 지형을 잘 아는 산척들은 산골짜기에서 복병으로서 한 사람이 열 사람을 대적할 정도가 되었다.509) 『선조실록』 권83, 선조 29년 12월 경오.

그 결과 군공을 세운 산척들은 신분이 상승되었다. 원래 산척은 재인·백정·장인과 함께 천인으로 분류되던 터였다. 그런데 전쟁으로 공을 세우거나 적을 베어오면 과거에 합격시키는 참급과를 통해 고위 관직에 오른 경우가 많이 생겨난 것이다.510) 『선조실록』 권51, 선조 27년 5월 을유 ; 심승구, 「임진왜란 중 무과의 실태와 기능」, 『조선시대사학보』 창간호, 1996. 예를 들면 거창에서는 수백 명의 산척들이 의병장 김면이 이끄는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511) 『선조실록』 권83, 선조 29년 8월 경오 ; 최효식, 『임진왜란기 영남 의병연구』, 국학자료원, 2003. p.164. 하지만 산척 가운데 일부는 전쟁을 틈타 민간을 돌아다니며 토적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512) 『선조실록』 권56, 선조 27년 10월 계축.

임진왜란 중 강원도 산척의 활약은 전란이 끝난 뒤에도 국가 방어를 위해 주목되었다. 그리하여 산척 가운데 재주있는 자를 미리 뽑아 장래의 용도에 대비하게 하였다.513) 『선조실록』 권190, 선조 38년 8월 병오 ;『광해군일기』 권144, 광해군 11년 9월 무술. 임진왜란 중 총포술을 익힌 산척이 많아지자 그들을 군사조직에 적극적으로 포함시키려는 의도가 깔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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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포수의 모습
20세기 포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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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때 영장절목(營將節目)에는 산포수·산척·재인·일본 포로에서 돌아온 자로 포술과 검술에 능한 자와 함께 속오군과는 별도의 부대를 만들었다.514) 『인조실록』 권16, 인조 5년 4월 병진. 또한,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산척포수를 모집해 중앙군영인 어영청에 소속시켰다.

어영청(御營廳): 인조 갑자년(1624) 초에 설치하였고, 연평부원군 이귀가 어영사(御營使)가 되어 서울 안에 포술(砲術)을 업으로 삼는 자 수백 명을 소집해서 교습하였다. 어가가 공산(公山)으로 피난하였을 때 다시 산군(山郡)의 산척 중에 포술에 정예한 자를 모집하였는데, 대읍은 7명, 중읍은 4명, 소읍은 2명씩 해서 합해 6백여 인이 되었다. 환도한 뒤에는 다시 총융사(摠戎使)에 배속시켜 서너 해 단속하여 이루어 놓은 효과가 있었다. 완풍군 이서를 제조로 능천군 구인후를 대장으로 삼아 통솔하여 가르치게 하였다.515) 『현종개수실록』 권10, 현종 4년 11월 무인.

어영청은 원래 서울에서 포술을 업으로 하는 자 수백 명을 소집해서 교습해 만든 부대였다. 그런데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갔을 때 주변 지역의 산척 중 포술에 정예한 자를 대읍 7명, 중읍 4명, 소읍 2명씩 합해 6백 명을 모아 어영군에 편입시킴으로써 그 규모가 늘어났다. 그 후 효종 때 어영군을 확대하는 자리에 적지 않은 수가 산척이나 세급을 체납한 포민(逋民)으로 채워졌다.516) 『효종실록』 권8, 효종 3년 6월 기사.

특히, 총포술을 익히기 시작한 산척은 호란을 거치면서 급속히 포술에 뛰어난 존재로 인식되었다. 평상시 총포로 사냥에 종사하였던 산척들은 17세기 중엽부터는 아예 ‘산행포수’ 또는 ‘산척포수(山尺砲手)’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조영국이 말하기를, “각 고을의 속오군(束伍軍)이 전혀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급할 때 믿을 만한 것으로 산행포수만한 것이 없습니다. 비록 병자년(1636)의 일로 말하더라도 유임(柳琳)의 금화(金化) 싸움은 오로지 청주의 3백 명 산행포수의 힘을 입은 것이니, 이로써도 그들이 정병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도를 통틀어 계산하면 그 숫자 또한 적지 않으니, 사정청(査正廳)의 성책(成冊) 가운데에서 여러 고을의 산척을 한결같이 모두 기록해 역을 침해하지 말게 해 단속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하였다.517) 『영조실록』 권61, 영조 21년 4월 정미.

평소 총포로 사냥에 종사하였던 산척들은 당시 각 고을의 속오군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함에 따라 ‘급할 때 믿을 만한 것은 산행포수만한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실제로 산행포수로 불린 산척들은 이미 정병(精兵)으로 1636년 병자호란 때 금화전투에서 승리의 견인차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가 부각되면서 본래의 역 이외에 각종 잡역에 시달리게 되자 산척은 아예 잡역을 피하기 위해 각 지방 영장의 군뢰수에 소속되기도 하였다.518) 『국역비변사등록』 효종 8년 5월 19일. 이처럼 산척의 역할이 커지자 군역을 회피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에 대한 변통책이 논의되었다.519) 『비변사등록』 영조 21년 5월 30일. 그러자 영조 때 양역변통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각 고을의 산척을 한결같이 기록해 잡역을 부과하지 말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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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근, 『조선풍속도』 포수행렵
김준근, 『조선풍속도』 포수행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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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포수로 불리던 산척은 ‘일등정병(一等精兵)’으로 인식되어 호환(虎患)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착호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여러 도의 각 고을에서는 군병과 산척포수 중에서 영솔할 만한 무사를 가려 임명하여 대령시켰다가 각 마을에서 범의 종적을 찾아 고하면 그 시간 내에 즉시 출발시켜 잡도록 해야 한다. 또 먼저 포를 쏘아 잡은 사람의 성명을 즉시 본사에 보고하여 논상하도록 해야 한다. 무사와 군병들의 식량을 원회부(元會付)의 미곡으로 계산해서 감할 것이며, 화약과 탄환은 군기 회부(軍器會付) 중에서 계산해 감할 것.

위의 내용은 숙종 때에 마련된 호랑이를 잡는 절목 가운데 일부이다. 각도의 군병과 산척포수 가운데 영솔할 무사를 뽑아 호랑이를 잡도록 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산척을 ‘산척포수’라고 부르는 내용이다. 이제 각 지역에 분포된 산척은 단순한 사냥꾼이 아니라 총포술에 능한 지역 포수로서 인정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이들은 능숙한 총포술로 조선 후기 호랑이를 잡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산척 포수 가운데는 강계 포수(江界砲手)가 제일 유명하였다. 예로부터 포수 중에서도 호랑이를 잡는 포수를 가장 포수다운 포수로 여겼다. 특히, 평안북도 강계지방에 사는 포수들은 호랑이 사냥에 익숙하기 때문에 다른 지방의 포수들에 비해 특히 용맹성과 실력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힘이 세거나 동작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게 날랜 사람을 가리켜 ‘강계포수 같은 사람’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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