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년(1593, 선조
26) 10월, 거가(車駕)
냄새가 지독하고 더러워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서로 먹어서, 죽은 사람이 있으면 삽시간에 가르고 베어 피와 살덩어리가 낭자하였다.
'선조' 관련자료
임금의 행차할 때 타는 수레
가 환도하니 불타다 남은 너저분한 것들이 성안에 가득하고, 거기에다가 전염병과 기근으로 죽은 자들이 서로 길에 겹쳐 있으며, 동대문 밖에 쌓인 시체는 성의 높이와 가지런하니, 1)
1)
어떤 책에는, 평안도에 사는 중 몇몇이 스스로 모여 도성 아래를 청소하며 죽은 시체를 성 밖에 끌어 내어 동대문 밖 오간(五間) 수구에 버렸는데, 쌓인 시체가 성의 높이와 같은 것이 여러 곳이었다고 되어 있다.
임금이 용산창(龍山倉)에 거둥하시어 창고의 곡식을 내어 방민(坊民)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곡식은 적고 백성은 많으므로 겨우 되나 홉 곡식을 얻을 수 있었다. 또 어공미(御供米)를 삭감하여 구휼하기 위해 동⋅서에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했으나 겨우 만분의 일도 구제하지 못하였다. 지방은 더욱 심해서 곳곳에서 도적들이 일어났다. 양주(楊州)에는 강대한 도적 이능수(李能水)가 있었고, 이천(利川)에는 현몽(玄夢)이 있었으며, 충청도에는 역적의 난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이때에 훈련도감
을 설치하여 군사를 훈련시키라 명하시고, 나를 도제조로 삼았다. 나는 청하여, “당속미(唐粟米) 1000석을 꺼내어 양식으로 하되 하루에 한 사람에게 두 되씩 준다 하여 군인을 모집하면 응모하는 자가 사방에서 모여들 것입니다” 하니, 당상
조경(趙儆)이 곡식이 적어 능히 지급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한정하려 하여 법칙을 세웠다. 큰 돌 하나를 놓아 두고, 응모자들로 하여금 먼저 들게 하여 힘을 시험해 보고, 또 한 길 남짓한 흙 담장을 뛰어넘게 하여 능히 해 내는 자는 들어오기를 허락해 주고 못하는 자는 거절하였다. 사람들이 다 굶주리고 피곤해서 기운이 없으므로 합격하는 자는 열 가운데 한둘이었다. 어떤 사람은 도감문 밖에 있다가 시험 보기를 요구했으나 얻지 못하고 쓰러져서 굶어 죽은 자도 있었다. 얼마 안 되어 수천 명을 얻어 조총 쏘는 법과 창⋅칼 쓰는 기술을 가르쳐서 초관(哨官)과 파총(把摠)을 세워서 그들을 거느리고 번을 나누어 궁중에서 보초를 서게 하고, 무릇 행차의 거둥이 있을 때는 이들로써 호위하니 민심이 차츰 믿게 되었다.
'훈련도감' 관련자료
'당상' 관련자료
또한 강이 얼기 때문에 양주⋅이천 두 곳의 도적들 형세가 장차 합세할까 걱정이 더욱 컸는데, 때마침 황해도 승군 100여 명이 도감에 이르러 연습을 하겠다고 하였다.
주상에게 아뢰어 변응성(邊應星)으로 경기 방어사를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용진으로 나아가 주둔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동쪽의 길이 처음으로 통했고, 도적들도 차츰 사라져 갔다. 얼마 있다가 비변사
에서 공고하기를, “도적 중 누구를 막론하고 서로 잡아 고하는 자에게는 죄를 면해 주고 공을 의논하여 상을 내리겠다” 하자, 양주 도적 떼가 그 소문을 듣고 이능수의 목을 베어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현몽은 무서워서 도망하였다. 또 경기 감사
유근(柳根)을 시켜서 백성을 모아 진지를 짓고 목책을 만들어서 도적을 방비하게 하고, 또한 나그네들로 하여금 머물러 자고 갈 수 있게 하였다.
'비변사' 관련자료
'경기 감사' 관련자료
그 해 봄, 강원도와 호남⋅호서 지방의 곡식 종자를 옮기고, 황해⋅평안의 소를 모집하여 나누어 주게 하였는데, 유근이 지성으로 백성들을 위로하여 오게 하였다. 갑오년 가을은 풍년이 들었으므로 굶어 죽는 자가 차츰 드물게 되었다. 을미년(1595, 선조
28)에 풍년이 들었다. 떠도는 백성들이 태반은 고향에 돌아와 모여 살게 되었다. 그전에 내가 차자(箚子)
을 설치하여 영(營)마다 2000명씩을 소속시켜, 해마다 반은 성안에 머물러 연습하게 하고 반은 성 밖에 나아가 비어 있는 넓고 비옥한 땅을 가려 둔전을 만들고 돌아가면서 교대하면, 수년 뒤에는 군사와 군량의 근원이 더욱 두터워지고 나라의 근본이 견고해질 것입니다”. 임금이 그 의논을 병조에 내렸으나, 바로 거행되지 않아 마침내 효력을 보지 못하였다. 아는 자들은 그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선조' 관련자료
국왕에게 올리는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
를 올려 청하였다. “군량을 조치하고 군사를 더 모집하여 1만 명을 채우고, 경성에는 오영(五營)
'오영(五營)' 관련자료
『서애선생문집』권16, 잡저, 훈련도감
'훈련도감'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