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경(六經)의 글은 모두 요(堯)⋅순(舜) 이하 여러 성인의 말을 기록한 것으로, 그 이치가 정밀하고 그 뜻이 자세하며, 그 생각은 깊고 취지는 심원(深遠)하다. 대개 그 정밀한 것을 논한다면 털끝만큼도 어지럽힐 수 없으며, 그 자세한 것을 논한다면 조그마한 것도 빠뜨린 것이 없다. 그 깊이를 재어 보려고 해도 그 밑바닥을 찾을 수 없으며, 그 깊고 원대한 것을 궁구하려고 해도 그 끝나는 곳을 볼 수 없으니, 이는 진실로 세상의 하찮은 선비라든가 변통 없는 유자(儒者)의 얕은 도량이나 고루한 식견으로서는 밝혀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위로 진(秦)⋅한(漢) 시대부터 아래로 수(隋)⋅당(唐)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호(門戶)를 나누어 쪼개고 사지(四肢)를 잘라 내고 폭을 찢어 내다가, 결국 그 대체(大體)를 파괴하고 만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 이단(異端)1)
에 빠진 자는 비슷한 것을 빌려다가 간사하고 기만하는 말을 꾸며 내기도 하고, 그 전대(前代)의 전적(典籍)만을 굳게 지키는 자는 고착되어 막히고 오활(迂闊)하고 편벽하여 전혀 평탄한 길에 어둡다. 아아, 이것이 어찌 성현들이 부지런하고 간절하게 이 책을 만들고 이 말씀을 기록함으로써, 이 법을 밝혀 천하 후세에 기대한 뜻이겠는가.
1)
이단(異端) : 유교(儒敎)에 배반되는 것, 곧 노(老)⋅불(佛)⋅양(楊)⋅묵(墨) 등을 가리킨다.
전(傳)에, “먼 곳을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야 한다”2)
라고 했으니, 이것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어둡고 가려진 사람을 일깨워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2)
전(傳) : 성경현전(聖經賢傳), 즉 성인(聖人)이 지은 글은 경(經)이라 하고, 현인(賢人)이 지은 글은 전(傳)이라 한다. 여기서의 전은 고서(古書)를 말하며,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는 『중용(中庸)』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진실로 세상의 배우는 자들이 이곳에서 얻는 것이 있다면, 앞에서 말한 먼 곳은 곧 가까운 곳으로부터 시작해서 도달하게 됨을 알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깊다는 것 역시 얕은 곳에서부터 들어가고, 이른바 자세하다는 것 역시 간략한 곳에서부터 미루어 가고, 이른바 정밀하다는 것 역시 거친 것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니, 세상에는 진실로 거친 것도 능하지 못하면서 그 정밀한 것을 먼저 한다거나, 간략한 것도 능하지 못하면서 그 자세한 것을 일삼거나, 얕은 것도 능하지 못하면서 그 깊은 것을 앞당겨 한다거나, 가까운 것도 능하지 못하면서 그 먼 것을 찾아 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지금 육경에서 구하는 것이 대부분 그 얕고 가까운 것을 뛰어넘어서 깊고 먼 곳으로만 달려가며, 그 거칠고 간략한 것은 소홀히 하고서 정밀하고 자세한 것만을 엿보고 있으니, 그 어둡거나 어지럽고, 빠지거나 넘어져서 아무런 소득도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저들은 다만 그 깊고 멀고 정밀하고 자세한 것만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얕고 가까우며 간략한 것마저 모두 잃게 될 것이니, 아, 슬프도다. 그 또한 매우 미혹한 것이다.
무릇 가까운 것은 미치기가 쉽고, 얕은 것은 헤아리기 쉬우며, 간략한 것은 얻기 쉽고, 거친 것은 알기가 쉬운 것이다. 그 도달한 것에 따라서 차츰 멀리 가고 또 멀리 간다면 그 먼 곳까지 다 갈 수 있을 것이며, 그 헤아린 것에 따라서 차츰 깊게 들어가고 또 깊게 들어간다면 그 깊은 데를 다 들어갈 수 있을 것이며, 그 얻은 것에 따라서 점점 자세히 하고 그 아는 것에 따라서 점점 정밀히 하고, 정밀한 것을 더욱 정밀하게 하고, 자세한 것을 더욱 자세하게 한다면, 그 자세한 것을 끝까지 할 수 있고, 그 정밀한 것을 끝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어찌 어둡고 어지러우며 빠지고 넘어지는 근심이 있겠는가.
대개 귀머거리는 우레와 벼락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소경은 해와 달의 빛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저 귀머거리와 소경의 병일 뿐, 우레와 벼락, 해와 달은 본래 그대로인 것이다. 우레와 벼락은 천지 사이에서 소리가 진동하고, 해와 달은 고금에 비추어 빛이 환하니, 한 번이라도 귀머거리가 듣지 못하고 소경이 보지 못했다 하여 소리나 빛이 혹시라도 작아지거나 흐려진 적은 없다.
그러므로 송(宋)나라 때에 와서 정자(程子), 주자(朱子) 두 선생이 나와서 마침내 해와 달 같은 거울을 닦아 내고 우레와 벼락같은 북을 두드리니, 소리는 멀리 미치고, 빛은 넓게 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육경의 뜻이 이에 다시 세상에 환하게 밝혀졌으니, 지난날의 오활하고 편벽한 것이 이미 사람의 생각과 뜻을 고착시키고 막을 수 없으며, 그 비슷한 것이 또한 명칭을 빌릴 수 없게 되어, 간사하고 기만된 선동과 유혹이 마침내 끊어지고 평탄한 표준이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를 따져 보면 또한 끝을 잡아 근본을 헤아리고 물줄기를 따라 근원을 거슬러 감으로써 얻은 것이었으니, 이는 자사(子思)가 말한 지침(指針)에 참으로 깊이 합하고 묘하게 맞은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 실린 말은 그 근본은 비록 하나이나 그 실마리는 천 갈래 만 갈래이다. 이것이 이른바 “한 가지 이치인데도 백가지 생각이 나오고 귀결은 같으면서도 길은 다르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독특한 지식과 깊은 조예(造詣)로서도 오히려 그 뜻을 전부 알아서 세밀한 것까지 틀리지 않기는 불가능하므로 반드시 여러 사람의 장점을 널리 모으고 조그마한 선(善)도 버리지 않은 다음에야 거칠고 간략한 것이 유실되지 않고, 얕고 가까운 것이 누락되지 아니하여, 깊고 멀며 정밀하고 자세한 체제가 비로소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나는 문득 참람한 짓임을 잊고 좁은 소견으로 터득한 것을 대강 기록한 다음 이것을 모아 책을 만들고 『사변록(思辨錄)』이라 명명하였는데, 이는 선유(先儒)들이 세상을 깨우치고 백성을 도와준 본의에 티끌만 한 도움이 없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이론(異論) 하기를 좋아하여 하나의 학설을 만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나의 이 경솔하고 망녕되어 소략하고 모자람을 헤아리지 못한 죄로 말하면 회피할 수 없지만, 뒷날에 이 책을 보는 이들이 혹시 딴 뜻이 없음을 생각하여 특별히 용서해 준다면 이 또한 다행이겠다.
『사변록』,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