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역사과학의 모든 영역에는 혼돈과 청산의 두 가지 경향이 보이고 있다. 이것은 당연히 현실 사회의 역사적 발전에 관한 방법론의 대립적인 교류 관계에 기초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세계사의 동향이 앞으로는 동양에서 결정되려고 하는 기운을 배양하고 있는 오늘날, 동양 사학의 역사적 임무는 매우 중요하고 클 것이다.
우리 조선이 과거에 동양 문화권의 일대 영역이었다고 한다면, 오늘의 조선은 어쨌든 세계사적 규모에서 자본주의의 일환을 형성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며, 그 모두가 역사적으로 규정된 것이다. 이 계기적 변동 법칙을 파악하려는 경우, 과거 몇 천 년 동안의 자기 사적(史蹟)을 성찰하는 것도 당연히 우리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이에 조선사 연구는 분명 비판적 청산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자칫 혼돈의 재생산을 기도하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어떠한 역할을 연출하는가를 여기서 언명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혼돈 속에서 엄정한 역사의 궤도를 찾아내는 것은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본래 나는 학문이 얕고 재주가 보잘것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 혼돈화된 조선 사학계에 몸을 바친다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며 주제넘은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별문제로 하고, 나는 조선에서 태어났다. 이 하나만이 그 모험과 주제넘은 짓을 감행하는 선험적 자격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말을 적는 것이 형식적으로는 다소 부조리한 부분이 있기는 해도, 조선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외관적인 대저작보다 오히려 체험적인 것이며 더욱 진실한 외침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선을 인식하는 데 먼저 자기비판을 높이고 싶다. 그 비판의 대상은 마치 동물의 뼈대와 같이 사회의 인위적⋅역사적인 뼈대를 이루는 경제적인 구성이라야 한다. 즉 나의 조선관은 그 사회경제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본질적으로 분석⋅비판⋅총관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돌이켜 보면 조선의 학문 발전사는 대개 삼국 시대(고구려⋅백제⋅신라) 이후의 한문학⋅불교학⋅노장학⋅유학 등을 포함한 방대한 부문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모두 사회경제의 역사적 발전과 내면적 관련을 맺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 가운데 근세 조선사에서 유형원
⋅이익⋅이수광
⋅정약용
⋅서유구
⋅박지원
등 이른바 ‘현실학파(現實學派)
’라고 불러야할 우수한 학자가 배출되어, 우리의 경제학적 영역에 대한 선물로 남겨준 업적이 결코 적지 않다. 더구나 근래에 조선 경제사의 영역에 실마리를 잡은 최초의 학자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선사(先師)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일 것이다. 하지만 후쿠다 박사는 조선에서 봉건제도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다는 점에서 그에 승복할 수 없는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 선배 이타니 젠이치[猪谷善一]가 『조선경제사』란 것을 공적으로 발행했다. 그 내용은 제쳐 두고 책 이름에서는 이것이 조선 경제사의 효시일 것이다. 만약 이를 엄격하게 말한다면, 이 책은 ‘계(契)’라는 특수 문제에 관한 귀중한 문헌이지만 전면적인 경제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내게는 책 이름이나 내용보다 서문의 한 구절이 가장 귀중하고 시사적이다. 즉 “조선 자신의 연구는 조선어를 이해하는 조선인 여러분이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에 유학 온 학생 여러분이 머지않아 모국의 경제사적 연구를 크게 이루어, 나의 보잘것없는 연구가 무용지물이 되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유형원' 관련자료
'이수광' 관련자료
'정약용' 관련자료
'서유구' 관련자료
'박지원' 관련자료
'현실학파(現實學派)' 관련자료
이에 나의 조선 경제사의 계획은 사회의 경제적 구성을 중심으로 하여 대략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취급하고 있다.
제1, 원시 씨족 공산체의 상태.
제2, 삼국 정립 시대에서의 노예경제.
제3, 삼국 시대 말기부터 최근세에 이르기까지의 아시아적 봉건사회의 특질.
제4, 아시아적 봉건국가의 붕괴 과정과 자본주의의 맹아 형태.
제5, 외래 자본주의 발전의 일정과 국제적 관계.
제6, 이데올로기 발전의 총 과정.
이상과 같은 계획을 현상이 유지되는 한 차근차근 수행해 나갈 작정인데, 이번에는 우선 제1, 제2의 문제를 다루어 보았다. 되돌아보면 자료 취급 방법의 미숙, 이론 전개의 불충분 등 필자 자신에게도 불만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 특히 사관(史觀)으로서 방법론상의 오류를 범하지 않았나 매우 염려된다. 최근 최대의 위인 레닌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라 했는데, 내가 만약 오류를 범했다면 그것은 조금이나마 조선을 연구하기 위한 순수한 마음의 발로에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머지않아 이 분야의 동호인들과 선배들의 엄정한 과학적 비판에 의해 청산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략)……
1933년 8월 8일 동틀 무렵 백남운
「서문」, 백남운, 『조선사회경제사』, 개조사, 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