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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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Ⅲ. 귀족의 탄생과 왕권의 강화

Ⅲ. 귀족의 탄생과 왕권의 강화

 여러 가지 불편은 있었으나 오랜 동안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던 신석기시대의 사회는 靑銅器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대체로 B. C. 10세기 경에 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청동기시대에 특히 주목되는 것은 무기인 청동검과 청동화살촉, 권위의 상징이나 종교적 의기로 사용되었을 多鈕細文鏡·청동방울·防牌形儀器 등의 유물이다. 그리고 무덤으로 사용된 고인돌이 또한 주목된다. 이러한 유물·유적들은 이미 권력의 소유자가 탄생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부족장의 후예로 생각되는 이들 권력자는 나지막한 구릉 위에 土城이나 木柵을 쌓고 살면서 스스로를 방어하고, 바깥 평야에서 농경에 종사하는 농민들을 지배해 나가게 되었다. 아직도 공동체적인 전통을 유지해 나갔을 농민은 씨족장의 후예들에 의해서 통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일반 농민과는 다른 신분을 가진 귀족이 탄생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소박하나마 일정한 정치조직이 이루어졌다. 종래 이것을 部族國家, 혹은 邑落國家·部落國家·都市國家·小國 등으로 불러 왔으나, 여기서는 城邑國家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 성읍국가는 한국 최초의 국가형태이며, 전국에 많은 성읍국가가 존재해 있었으나, 그 중에서 가장 일찍 탄생한 것이 古朝鮮이었다.

 그런데 이들 성읍국가는 군사적으로 강대한 성읍국가를 중심으로 해서 연맹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연맹체를 보통 部族聯盟國家라고 불러 왔으나, 여기서는 聯盟王國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 단계가 되면 고조선은 大同江 유역에서 遼河 유역에 걸치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松花江 유역의 夫餘나 漢江 이남의 辰國, 혹은 三韓도 그러한 연맹왕국들이었다. 연맹왕국에서는 맹주격인 성읍국가의 지배자가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였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성읍국가의 지배자들이 누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연맹왕국시대를 거쳐 고구려·백제·신라가 정립하는 삼국시대가 되면,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 일어난 중요한 변화는,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국왕은 한 가문에서 세습적으로 독점하게 되었는데, 고구려의 高氏, 백제의 扶餘氏, 신라의 金氏가 그러하다. 그것도 처음에는 형제상속에 의해서 왕위가 계승되었으나, 뒤에는 부자상속의 원칙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이렇게 되면 왕권은 더욱 강화되게 되었다.

 둘째로는 王京에 거주하는 중앙귀족이 탄생한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消奴部·絶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의 5부가 중심적인 귀족층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왕족인 계루부 즉 高氏와 王妃族인 絶奴族 즉 椽那部 明臨氏, 그리고 전왕족인 소노부 등이 특히 유력한 귀족 가문이어서 古雛加라는 존칭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백제에서는 沙·燕·劦·解·眞·國·木·苩 등 八姓大族이 있어서 이들이 중앙귀족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제에서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왕족인 扶餘氏와 王妃族인 眞氏나 解氏가 上佐平 같은 수상직을 독차지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신라에서는 王京人을 중심으로 짜여진 骨品制 하에서 眞骨이 정치나 군사의 요직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또 和白會議의 구성원으로서 국가의 중대사를 처리하였다. 그리고 진골의 핵심은 왕족인 金氏와 왕비족인 朴氏였다. 이같이 하여 사회를 움직여 나가는 세력은 중앙의 소수 귀족에 국한되게 되었다.

 그러다가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왕권은 專制化하여 권력이 국왕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화백회의는 여전히 있었으나 그 존재 의의는 약화되고, 대신에 王命을 받아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執事部가 권력의 핵심적 존재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집사부의 장관인 中侍에는 국왕의 가까운 왕족이 주로 임명되었고, 결혼도 金氏 일족 안에서 행해지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 이제 사회를 움직여 나가는 권력은 그 범위가 최대한으로 좁아진 셈이다.

 渤海에 대해서는 그 사회구성이나 정치적 운영의 실제를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政令을 집행하는 政堂省이, 발해의 핵심 정치기구인 3省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대체로 신라와 마찬가지로 국왕의 專制的인 권력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 있지 않았나 한다.

 이 같이 살펴보면, 성읍국가의 형성 이래 연맹왕국을 거쳐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로 발전하면서 국가의 규모는 점점 커져갔지만, 그 사회의 정치·경제·문화를 움직여간 주도적 세력은 오히려 반대로 좁혀져 가는 현상을 나타냈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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