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Ⅱ. 한민족의 기원
  • 2. 민족학적으로 본 문화계통
  • 1) 한민족·한국문화 기원론의 흐름
  • (1) 한민족 형성과정에 대한 세 개의 입장 -혼혈론·주민 교체설·단혈성론-

(1) 한민족 형성과정에 대한 세 개의 입장 -혼혈론·주민 교체설·단혈성론-

 주지하듯이 孫晉泰는 해방공간에서 신민족주의 역사관을 제창한 지도적인 역사학자였다. 한편 그는 오늘날 역사민속학 혹은 민족문화학의 선구자로도 간주되고 있다. 그가 1930년대 한국민속학의 정립기에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데는 이의가 없는 듯하다. 그는 본격적인 현지조사를 통해 온돌·민가·혼인습속·놀이·고인돌(돌멘) 등 다양한 민속과 口碑 전승을 수집, 비교 검토했을 뿐 아니라 문헌 분석을 통해 蘇塗 등 고대 민속의례의 역사적 연구에 착수했다. 이처럼 그는 민중의 생활문화사를 재구성한다는 19세기 이래의 민속학의 과제에 충실하게 대처했다.

 한국문화의 기초 구성을 밝혀보려는 손진태의 민속 및 구비전승에 대한 연구는 해방 직후≪朝鮮民族說話의 硏究≫(1947)와≪朝鮮民族文化의 硏究≫(1948)로 정리되었다. 그는 그 과정에서 특히 소도와 온돌, 고인돌을 다룬 기왕의 논문에 다소간의 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그가 1930년대 이들 민속을 한반도 북부와 남부로 대별하여 지역적 유형에 따라 파악한다거나 나아가 이를 소위 북방계 혹은 남방계 종족의 차이에 말미암은 것으로 결부시켜 해석한 일본인 연구자들의 영향을 가능한 한 청산, 불식하려 한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민속과 구비전승의 연구에서 외래문화와의 접촉을 중시한 이른바 전파론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외래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이를 한국의 것으로 만든 기반이 다름 아닌 문화전통이었음을 강조했는데, 이는 특별히 주목되는 점이다. 어쨌든 시대적 제약 속에서도 역사과학으로서의 민속학을 확립하려 한 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해야만 할 것으로 생각된다. 실로 이 같은 의미에서의 그의 선구자적 면모는 매우 확연하다.114)현재 손진태의 업적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민속학계 내부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민속학을 역사과학으로 규정, 기능주의적 입장에서의 여러 연구성과를 역사학적 시각에서 재평가하면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특히 비교방법에 의해 민족학적 역사재구성의 방향을 제시한 그의 업적은 1930년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라고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손진태가 최초 관심을 기울인 부문은 민속이 아니라 한민족의 형성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27년에<조선 민족의 구성과 그 문화>를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한반도 각지에는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었으며 장기간의 혼혈과정을 거친 끝에 한민족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경상도에는 新시베리아족, 충청·전라도에는 舊시베리아족이 대부분이었으며, 함경·평안·황해도에는 퉁구스족이 대거 주거했고, 남해안에는 소수의 인도차이나족과 倭族이 섞여 있었다고 한다. 뒤에 衛滿이 평양으로 이주하고 다시 그의 후손이 漢武帝에 의해 정복되면서 漢人들이 많이 평안도·황해도지방으로 이주한 결과 원주민인 퉁구스족과 漢族 사이에 혼혈이 성행했다고 한다.115)孫晉泰,≪韓國民俗·文化散考≫(≪孫晉泰全集≫제6권, 太學社, 1981), 36∼38쪽. 그리고 그 뒤 역사적 변천을 겪은 결과 비록 지역에 따라 우수 종족의 혈액상의 차이는 있었을지라도 전민족의 피는 완전히 한국적인 피로 화했으며, 삼국시대에는 이미 고구려·백제·신라가 각기 독자적인 민족의식을 갖고 투쟁하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가 다시 한반도를 통일하면서 민족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논했다.116)孫晉泰, 위의 책, 44∼45쪽.

 이 같은 그의 견해는 그로부터 20여 년 뒤에 나온 한국사 개설서인≪朝鮮民族史槪論(상권)≫(1948)에 거의 그대로 견지되어 있다. 그는 한민족이 몽골인종 중에서도 만주·시베리아종족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며, 특히 퉁구스족과 ‘가까운’ 관계라고 했다.117)孫晉泰,≪朝鮮民族史槪論(상권)≫(乙酉文化社, 1948), 17쪽. 그는 같은 책(18쪽 및 36∼37쪽)에서 한민족이 퉁구스족에 ‘속하는 자’라고도 표현한 바 있다. 그는 ‘부족국가’ 시대에 한민족의 영역 내에 대체로 山川을 경계로 하여 부여족·예맥족·숙신(읍루)족·조선족·옥저족·예족·삼한족·고구려족 등 9개의 족속이 있었는데,118)孫晉泰, 위의 책, 46쪽. 이 때를 민족 형성의 ‘시초기’로 규정할 수 있으며, 삼국시대를 민족통일 추진기, 삼국통일에 따라 한민족이 일단 결정된 것으로 보았다.119)孫晉泰, 위의 책, 39∼40·176·180쪽. 다만 그는 통일기 신라인의 민족의식은 주로 귀족층·지식층·도시 시민층 사이에서만 성장한 것으로 보았다.120)孫晉泰, 위의 책, 213쪽. 또한 그는 한민족의 완성은 현재의 국경이 확정된 조선왕조 世宗代 특히 1434년으로 볼 수 있다고 했으며,121)孫晉泰, 위의 책, 40·180쪽. 현재의 한국인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단일 血族이 아니라 4, 5종족의 혼혈로 된 복합민족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122)孫晉泰, 위의 책, 18쪽.

 한민족의 기원 내지 형성과정에 대한 논의는 그 뒤 1960년대에 들어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 先鞭을 잡은 金廷鶴은 1964년에 발표된 장편논문에서 언어·체질·신화·민속·원시문화 등 여러 가지 요소를 다각도로 광범위하게 고찰하면서 한민족의 계통을 논했다. 그가 이와 동시에 한국과 인접한 여러 민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였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그는 고대 한국문화에는 북방적인 요소가 압도적이며, 한민족은 종래 일본인 연구자들이나 손진태가 주장해 온 퉁구스족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양 민족은 오랫동안 독립된 생활을 하여 왔으므로 알타이족 내에서 퉁구스족 등과 병행하여 하나의 민족단위를 형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한편 그는 한민족의 구성에는 알타이족이 남쪽 또는 북쪽으로 이동 확산하기 전에 북방 아시아에 先住하고 있던 고아시아족(palaeo-Asiatics) 또는 고시베리아족(palaeo-Siberians)이나 이른바 남방민족의 요소도 섞여 있을 개연성이 크다고 시사했다.123)金廷鶴,<韓國民族形成史>(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韓國文化史大系≫제1권, ‘民族·國家史’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출판부, 1964), 315∼452쪽. 주지하듯이 1920, 1930년대에 만주족과 퉁구스족의 사회조직에 대한 연구서를 발표한 시로꼬고로프(S. M. Shirokogoroff)는 한 민족이 고아시아족에 속한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이 같은 김정학의 견해에 주로 고고학적 자료를 토대로 하여 논의를 크게 확대시킨 것은 金貞培였다고 할 수가 있다. 그에 의하면 한국 신석기문화의 주류를 이루는 有文토기(빗살무늬토기)는 시베리아와 연결되는 바, 이를 담당한 주인공은 고아시아족이며, 단군신화는 바로 곰을 숭배한 고아시아족의 일파가 남긴 이야기라고 한다. 그런데, 신석기시대의 종말기에 고아시아족은 알타이어를 사용하던 알타이 諸語 계통의 족속에게 흡수 정복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無文토기를 만들어 쓴 주인공이며 역사서에 보이는 濊貊族으로, 이들의 출현에 의해서 비로소 한민족 형성의 기틀이 잡혔다고 한다. 한편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출토 유물이나 유적으로 볼 때 중국의 문화와는 별개의 소산으로 오히려 그 기본성격에 있어서 시베리아 청동기문화와 관련을 갖는 그 자체로 독자적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나아가 그는 한국의 청동기뿐 아니라 철기의 경우에도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고 역시 시베리아 연해주 방면의 철기와 연결될 수 있는 개연성이 크다고 한다.124)金貞培,≪韓國民族文化의 起源≫(고려대학교출판부, 1973), 참조.

 그 뒤 金元龍은 고고학의 입장에서 한민족의 기원문제와 관련하여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즉 그는 한국 구석기시대의 종말기로부터 신석기시대가 개막될 때까지 적어도 2000∼3000년간의 단절현상이 보여 연속적 파악이 불가능한 점, 또한 신석기시대의 주민은 김정배의 견해처럼 고아시아족의 일부가 남하한 것으로 보는 쪽이 합리적이지만, 다만 이들을 동북 시베리아 방면으로 밀어내면서 청동기시대의 주인공이 된 무문토기인은 다름 아닌 퉁구스족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고아시아족과 퉁구스족 사이에는 종족상 큰 차이가 없으며, 퉁구스족 자체가 고아시아족의 지역화된 한 地域種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는 이들 두 민족의 기원을 찾아 형질·언어·문화상의 사소한 차이점을 거론하는 것은 공연히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 전반적인 양상을 흐리게 할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25)金元龍,≪韓國考古學槪說≫(제3판, 一志社, 1986), 22·24∼25쪽 및 58쪽. 다만 김원룡은 같은 책에서 “고아시아족이 퉁구스족에 의해 동북시베리아로 밀려나게 되었다”(24쪽)고 기술하는가 하면 “두 민족의 혼합, 동화는 가까운 지역의 평화적 공존에서 雜居, 그리고 잡거에서 혼혈이라는 과정을 밟아 대체로 무난하게 이루어졌을 것”(59쪽)이라고 서로 모순되는 듯한 기술을 하고 있다. 사실 그는 일찍부터 무문토기인을 넓은 의미에서의 퉁구스족으로 보았다. 그런데 그는 이들이 바로 예맥족이며, 그들이 남한지역에서 남쪽으로부터의 영향 아래 남방적 요소를 가미하면서 약간 지방화한 것이 역사서에 보이는 韓族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예맥과 한은 같은 종족으로, 다만 지역차가 생긴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126)金元龍의 대담 발언(千寬宇 편,≪韓國上古史의 爭點≫, 一潮閣, 1975, 108∼109·171쪽). 그것은 어쨌든 김원룡·김정배 양씨의 경우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로의 변화에 주민 교체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손진태의 견해를 혼혈론이라고 한다면, 이들의 견해는 편의상 주민 교체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학계의 한민족 형성과정론의 흐름은 대체로 이상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학계의 공식견해는 우리와는 자못 달라 민족 單血性論이라 부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는 북한에서 민족에 대한 개념의 변천에 대응하면서 1980년대에 들어와 정립되었다. 주지하듯이 북한에서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스탈린의 민족에 대한 정의를 교조적으로 추종했다. 스탈린이 1950년 6∼7월에≪프라우다≫지상에 발표한<언어학의 약간의 문제에 대하여>라는 논문에 의하면 ‘나찌야(natsia, 민족)’란 언어, 영토, 경제생활, 심리적 상태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오랜 역사를 거쳐서 형성된 사람들의 공고한 집단으로, 이는 근대 자본주의사회의 성립을 매개로 하여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는 나찌야가 성립되기 직전의 단계를 ‘나로드노스찌(narodnosti, 민족체)’라고 命名했는데, 북한에서는 이를 ‘準민족’으로 번역하여 한국사에 적용했다. 그리하여 1956년에 간행된≪조선통사≫에서는 고대 삼국이 각기 ‘준민족’을 형성했으며, 신라의 삼국통일로 말미암아 ‘조선 준민족’이 되었다고 기술한 바 있다.

 그러나 김일성의 이른바 주체사상이 체계화되는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스탈린의 민족에 대한 정의도 차츰 변질을 강요당하게 되고 끝내 폐기처분되기에 이른다. 즉 민족의 자주성이 강조되는 가운데 민족 구성요소로서 새로이 혈통이 추가되고 머지 않아 경제생활의 공통성이라는 개념은 삭제되고 만다. 그리하여 1977년에 간행된≪조선통사≫에서 민족 개념의 기준 지표로 ‘핏줄’과 언어를 강조하고, 이에 따라 민족형성의 시기를 삼국 이전으로 올려 잡은 것은 그간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당국이 새삼스레 ‘핏줄’을 들고 나오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부터 평양 일대의 동굴유적에서 구석기시대의 일련의 화석 인골자료를 확보한 데 연유한다. 즉 그들은 평남 덕천군 승리산에서 구석기시대 말기(약 1∼2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됨)의 인골을, 또한 평양시 승호구역 만달리에서 역시 같은 시기의 인골을 발견, 이를 각기 승리산인, 만달인이라 命名했다. 나아가 그들은 이 승리산인과 만달인이야말로 ‘조선 옛 類型사람’의 선조이며, 한편 현대의 한국인은 ‘조선 옛 유형사람’을 직접적 조상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승리산인·만달인은 한국인의 始原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한민족의 시원이 외지에서 이동해 온 족속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국 강토’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된 ‘조선 옛 유형사람’들의 핏줄을 고스란히 이어 받은 單血性 주민집단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한민족이 외부세계로부터 하등 수혈을 받지 않은 채 연면히 이어져 왔다는 단혈성론은 집단유전학의 상식으로 볼 때 그 이론적 기본 가정부터가 잘못된 것이고 더욱이 그들이 기본자료로 이용한 인골 화석문제에 있어서도 초보적인 자료 처리에 허점을 보이고 있어 거의 믿기 어렵다는 평가가 유력한 실정이다. 바꿔 말하면 이 이론은 인간의 등장과 진화에 대한 주체사상적 해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북한에서의 학문적 탐구가 주체사상의 통치이념에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 결코 학문적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주장이라고 한다.127)李鮮馥,<民族 單血性起源論의 檢討>(歷史學會 편,≪北韓의 古代史硏究≫, 一潮潮閣, 1991), 1∼24쪽 특히 12∼24쪽. 그런 만큼 이 이론에 대해서는 재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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