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Ⅱ. 한민족의 기원
  • 2. 민족학적으로 본 문화계통
  • 1) 한민족·한국문화 기원론의 흐름
  • (2) 퉁구스족과 예·맥·한족의 관계

(2) 퉁구스족과 예·맥·한족의 관계

 최근 한국과 일본 양국의 인류유전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한민족과 일본민족이 북방 몽골 계통에 속하며, 그 기원은 어쩌면 시베리아의 바이칼호 부근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고고학 및 민족학 연구자들은 이를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하고 있다. 즉 제4기 洪積世(일명 更新世)의 빙하기에 아시아대륙에 출현한 古몽골인종은 이리저리 대륙을 떠돌다가 바이칼호 근처에 갇혀있던 중 그 일부가 약 2만년 전 제4 빙하기의 혹한 때 한랭한 기후에 적응하면서 新몽골인종이 되었으며, 이들은 약 1만년 전 홍적세가 끝나고 沖積世(일명 完新世)의 초기인 後氷期가 시작되면서 기후가 따뜻해지자 남쪽으로 이동을 개시하여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 정착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들이 바로 한민족의 직계조상으로 간주되는 신석기시대 주민인 셈이다. 다만 앞에서 보았듯이 김원룡은 한반도에 살던 구석기인들이 후빙기의 도래와 함께 원주지를 떠나 북쪽의 한랭한 지역으로 이동해 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 같은 견해나 혹은 반대로 한민족이 구석기시대 말에 바이칼호에서 이동해 왔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 타당성을 의심하는 반론도 만만찮은 실정이다.128)李鮮馥, 위의 글, 18∼19쪽. 이선복은 이 같은 견해를 ‘한반도 주민 代替說’이라고 命名하고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김정배는 한국 신석기문화를 담당한 주인공을 고아시아족이라고 주장했고, 김원룡은 이에 동의를 표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종족은 일찍이 시베리아로 진출한 古백색인종과 황색인종과의 혼혈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하며, 현재 동부 시베리아 북쪽 끝으로부터 남쪽으로 사할린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츅치·캄차달(현재의 호칭은 이테르만)·코리야크·유카기르·길리야크(현재의 호칭은 니브흐)의 제족과 예니세이강 중상류에 사는 케트족이 이에 속한다.129)M. G. Levin, Ethnic Origins of the peoples of Northeastern Asia(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63), p. 27. 金元龍의 앞의 책(24쪽)에서 재인용. 이들 중 유카기르족은 현재는 인구수나 주거지가 급속히 축소된 채 잔존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 언어 분포로 미루어 볼 때 시베리아의 광범한 지역을 점유했던 가장 오랜 원주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130)三上次男·神田信夫 공편,≪東北アジアの民族と歷史≫(‘民族の世界史’ 제3권, 山川出版社, 1989) 제1부 제2장,<民族と文化の系譜>(荻原眞子 집필, 71쪽) 및 제2부 제3장<ロシア人の進出とシベリア原住民>(加藤九祚 집필, 452쪽).

 한편 언어학자들은 고아시아족 계통의 언어가 알타이 諸語와 전혀 친근관계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한국어가 퉁구스 제어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을 개연성이 가장 높다고 보는 어떤 언어학자는 한국어에 어떤 基層 언어가 있었을 것으로 상정하고 이를 이른바 ‘原始한반도어’로 명명, 어쩌면 이것은 길리야크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고아시아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 논자는≪三國志≫魏書 東夷傳에 보이는 읍루(挹婁)족이 그 위치로 미루어 길리야크족(아무르강 하구와 사할린 일부 지역에 거주)의 선조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131)金芳漢,≪韓國語의 系統≫(民音社, 1983), 제3장. 이 같은 想定의 배경에는 신석기시대 한반도의 주인공이 고아시아족에 속한다는 일부 고고학 연구자의 견해가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날 일본인 학자들이나 손진태는 한민족을 흔히 퉁구스족에 ‘속한다’거나 혹은 그와 ‘가까운’ 족속이라고 정의했으나 김정학이 이를 따르는 대신 알타이족(알타이어족의 의미)의 한 독립된 민족단위(ethnic unit)로 설정할 것을 제안한 이래 김정배가 이를 취한 바 있다. 실은 인류학자 중에서도 퉁구스족설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이 없지 않은 듯하다. 요컨대 퉁구스족이 동북아시아의 대표적인 족속이고 한민족이 마치 그 別種인 것처럼 논하는 것은 퉁구스족이 수행한 역사상의 활동이라든지 혹은 현재의 인구수에 비추어 볼 때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132)李光奎의 대담 발언(千寬宇 편,≪韓國上古史의 爭點≫, 一潮閣, 1975, 129쪽). 하지만 김원룡을 비롯하여 국외의 대다수 연구자들은 변함없이 퉁구스족 개념의 유효성을 인정하고 있다. 가령 만주족의 예를 들어보면 현재 그들은 중국 전체를 통틀어 약 430만 명(1982년)에 지나지 않으나, 그들의 역사적 활동을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실은 만주족 자체가 남방 퉁구스 諸語를 사용하는 종족들을 근간으로 하여 형성된 하나의 특유한 민족적 복합으로 간주되고 있다.133)金元龍은 “이 무렵(청동기시대)의 요령 지방 주민은 만주족이 주간이 되고 거기에 몽고족, 漢族의 피가 섞인 퉁구스족이었다. 문헌에 나타나는 고구려족의 前身으로서의 예맥족은 이 요령 지방의 특히 요동 以東 지역의 主人이었으며…”(≪韓國考古學槪說≫제3판, 一志社, 1986, 70쪽)라고 했으나, 당시는 ‘만주족’이란 개념이 생기기 훨씬 이전이었다. 주지하듯이 ‘만주’라는 명칭 자체가 만주족 최초의 지배자인 누루하치시대(16세기 말∼17세기 초)에 형성되기 시작했고, 만주족 그 자체는 퉁구스족, 고아시아족, 漢族 등이 복합되어 하나의 새로운 민족(ethnos)으로 형성된 매우 드문 事例에 속한다.

 현재 퉁구스·만주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민족(이른바 퉁구스족)은 동시베리아의 아무르강(黑龍江)을 경계로 그 북쪽에 에벤키족이 예니세이강과 오호츠크海 사이에, 그밖에 동부시베리아의 넓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르강 남쪽의 연해주 일대에는 나나이족(지난날의 호칭은 골디족)·오로치족·우리치족·우데헤족·네기달족·오록코족(현재의 호칭은 윌타족) 등이 살고 있다. 현재 야쿠트 자치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 야쿠트족은 바이칼호 연안지방에서 북쪽의 레나강 중류지역으로 이주했는데, 그 원주민의 언어는 퉁구스 계통의 그것이다. 이처럼 퉁구스족은 고아시아족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동시베리아 일대에서 거주지역이 크게 축소된 채 소수의 인구밖에는 남아 있지 않으나, 고대에는 만주지방을 대표하는 족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퉁구스족의 발상지에 대해서는 만주설·알타이 남부설·華中說 등이 있고 또한 시베리아 동부지역으로 이동해 간 시기에 대해서도 B. C. 2000년대로부터 A. D. 10세기경까지로 보는 등 여러 가지로 엇갈린 설이 있다.134)M. G. Levin, ibid., pp. 162∼164. 金元龍의 앞의 책(24쪽)에서 재인용. 현재로서는 바이칼호 부근에서 발생했다는 러시아 학자들의 견해가 가장 유력한 실정이다. 즉 아끌라드니꼬프(A. P. Okladnikov)는 바이칼호 서쪽설을, 레빈(M. G. Levin)은 그 동쪽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주의를 요하는 것은 퉁구스족 화중 기원설이 일찍이 중국학자들에 의해서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을 띠고 주장된 학설이라는 점이다. 즉 1931년 9월 일본 군부에 의해서 이른바 만주사변이 돌발하고, 그 이듬해 괴뢰국가 ‘만주국’이 성립되는 등 바야흐로 일본의 만주침략이 고조되었을 때 중국의 역사학자, 고고학자들은 만주지방이 역사의 여명기로부터 영토상 중국의 완전한 일부라는 취지에서 많은 논문과 저서를 발표,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획책하는 일본의 만주침략을 역사적, 이론적 측면에서 비판했다. 傅斯年은 중국 고전에 나타나는 東夷族이 산동반도와 그 남쪽의 淮水유역에 분포된 것으로 보던 종전의 견해를 만주로까지 확대 해석한≪東北史綱≫(제1권 ‘古代之東北’)을 발표했으며(1932), 고고학자 李濟는 대략 같은 주장을 피력한≪역사상의 만주≫(Manchuria in History, 1932)를 준비하여 만주사변의 발발 현장에 출장 나온 국제연맹 조사단에 제출한 바 있다. 그밖에 역사학자 馮家昇은 1935∼1936년 역사잡지≪禹貢≫에 원시시대로부터 周·秦시대에 걸친 기간의 만주의 사정, 중국의 만주 ‘경영’에 대한 일련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이 동이족을 퉁구스족, 중국 고전에 보이는 예맥족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음은 물론이다. 동이족 곧 예맥족이 산동·요동·한반도에 걸쳐 분포했다는 이 같은 견해는 그로부터 훨씬 뒤까지 芮逸夫·文崇一 등 중국(대만) 민족학자들에 의해서 변함없이 계승되고 있을 뿐 아니라 동이족의 이동설 내지 이른바 ‘동이문화권’을 신봉하는 한국인 연구자들 가운데서도 이 설을 따르고 있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135)金哲埈은 金庠基의 동이족 이동설을 긍정하여 “동이의 先住地가 산동반도지역이나 淮河유역인 중국 동해안 일대이었음이 확실한 것으로 보아, 殷이 망할 때에 그 인근 동이지역에 殷人의 大移住가 있었을 것”(<三國時代의 禮俗과 儒敎思想>,≪大東文化硏究≫6·7 합집, 1971:≪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1975, 184쪽)이며, “동이족 문화권에 있어서는 신석기시대 말기에는 肅愼族이 領導權을 쥐었다고 추측되며 그 뒤 예맥족이 영도권을 쥐었을 때에는 그 산하에 韓族이나 기타 북방으로부터 이동해 온 제부족들이 있었을 것”(같은 책, 189쪽)이라고도 언급한 바 있다. 한편 그는 같은 시기인 1971년 월간잡지≪新東亞≫의 ‘討論·韓國史의 爭點’에서 箕子설화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고구려인은 貊인데, 맥은 처음부터 압록강 근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산동반도 일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殷이 망했을 때 은의 遺民이 맥에 포함되었을 수 있어요”(千寬宇 편,≪韓國上古史의 爭點≫, 一潮閣, 1975, 72쪽)라든가, “저의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肅愼族, 이것도 처음에는 華北지역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이것이 만주·한반도 지역에서 가장 優勢했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고, 그 뒤에 청동기문화를 가진 동이족이 화북지방으로부터 遼寧지방을 거쳐 大同江유역까지 진출한 것이 속칭 箕子조선이고 … (中略)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기자나 그 후손이 우선 山東방면의 동이에게로 망명해 왔고, 그 뒤에 동이 특히 예맥의 이동에 따라 箕子神에 대한 신앙이 한반도에까지 들어온 것으로 봅니다”(앞의 책, 193쪽)라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신석기문화로부터 청동기문화로의 轉化를 갖고 그 문화 담당자가 바뀐 것으로 생각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즉 김원룡은 이를 고아시아족으로부터 퉁구스족으로, 김정배는 고아시아족으로부터 알타이족으로 문화의 담당 종족이 교체한 것으로 보았다. 사실 인류학자 크뢰버(Alfred L. Kroeber)의 고전적 견해처럼 문화변동의 요인으로는 발명·전파·移住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견해에도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시대의 문화를 올바르게 포착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의 구성요소를, ① 그 이전 시대로부터의 전통적 요소, ② 새로이 전래한 외래적 요소, ③ 새로이 육성된 그 문화 특유의 고유한 요소로 구분해 보는 것이 방법상 옳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136)佐原 眞,≪日本人の誕生≫(‘大系·日本の歷史’ 제1권, 小學館 Library版, 1992), 407∼410·426∼429쪽. 주민교체설은 청동기문화의 여러 양상을 오로지 새로이 전래한 외래적 요소만에 의한 것으로 간주한 위에 더욱이 이를 주민 교체에 따른 현상으로 파악한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그렇게 단정할 만한 근거가 매우 박약한 실정이다.137)하긴 앞에서 보았듯이 金元龍은 빗살무늬토기와 민패토기(無文토기)의 문화상 교체에 대해 그 문화 담당자가 고아시아족으로부터 퉁구스족으로 바뀌었다고는 해도 퉁구스족 그 자체가 신석기시대를 통해 고아시아족의 일부가 地域化된 민족일 것으로 추정했으므로, 주민 교체의 실제적인 의미를 크게 부여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런 까닭으로 그는 두 민족의 對面을 “문화적, 인종적 공통 分母에서 비교적 능률적, 평화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고 했다. 나아가 그 근거로 “그것은 빗살무늬토기와 민패토기가 서로 별개의 토기양식이면서 완전 격리가 아니라 빗살무늬토기의 민패토기式 胎土 채택, 팽이토기(서북한의 민패토기)의 아가리에 빗살무늬式 斜線무늬의 施文 등, 또 楊州郡의 水石里 집자리 유적에서의 빗살무늬문화 전통의 냇돌을 이용한 석기들의 존재 등 서로 문화요소의 교류가 있는 점으로 충분히 추측되는 것이다”(≪韓國考古學槪說≫제3판, 一志社, 1986, 58∼59쪽)라고 하여 청동기문화에 전통적 요소, 外來的 요소, 고유의 요소가 混在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요컨대 신석기시대의 유문토기로부터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에로의 변화는 이를 담당한 종족의 교체에 의한 결과라기보다는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어 온 유문토기문화 자체의 발전의 성과가 외부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새로이 生成된 때문인 것으로 생각해 볼 수가 있다.138)田村晃一,<朝鮮半島とその歷史的展開 1. 先史時代と古朝鮮>(三上次男·神田信夫 공편,≪東北アジアの民族と歷史≫, 山川出版社, 1989), 303쪽. 그는 한국의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가 시베리아 토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보고 있다(같은 책, 302쪽). 사실 러시아의 고고학자들도 양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유적을 둘러 본 메드베제프(German Medbedeb)는 “한반도 출토 초기 신석기시대 토기들은 시베리아 토기들과 별로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고 했고(≪東亞日報≫, 1991년 3월 20일字), 한편 바이칼지방의 각종 유적을 답사한 李鮮馥도 “바이칼호 연안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각종 유물과 유구는 우리 나라 선사시대 것들과 큰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東亞日報≫, 1990년 8월 24일).

 그것은 어쨌든 현재 다수의 연구자들이 청동기시대 遼河 동쪽, 松花江 이남의 남만주 일대로부터 한반도 중부 이북지역에 걸쳐 거주했던 한국사의 주인공을 중국의 역사서에 보이는 예맥족으로 간주하고 또한 남한 지역의 韓族 역시 다만 지역차를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의 예맥과 같은 계통의 종족으로 보고 있는 점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이 예맥족과 한족이 고조선을 비롯하여 부여, 辰國 등 많은 국가를 건설하고 뒤에 삼국의 건국세력으로 자연스레 연결되면서 한민족 형성의 직접적 계기가 마련된 것은 다시 말할 나위도 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 예맥·한족에 알타이족과 퉁구스족 가운데 과연 어떤 종족명을 부여할 것인가 하는 점인데, 이는 현재 어떤 단안을 내리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이를테면 한민족의 기원문제에 큰 암시를 줄 수 있는 한국어의 계통론만해도 어떤 연구자는 한국어가 알타이 제어와 친족관계에 있을 개연성이 크며 그 중 특히 퉁구스어와 가까운 면이 있는가 하면 몽골어와도 가까운 면이 있다고 보는가 하면, 다른 연구자는 퉁구스 제어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을 수 있는 개연성이 가장 높다고 보는 등 미묘한 입장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한민족의 계통 문제는 앞으로 더욱 精緻한 연구가 요망되는 과제라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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