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Ⅱ. 한민족의 기원
  • 2. 민족학적으로 본 문화계통
  • 2) 고대 한민족의 문화적 여러 양상과 그 계통
  • (2) 생업기반과 사회조직

(2) 생업기반과 사회조직

 동이전에 보이는 예맥족과 한족의 생업은 그 지역적 특징에 따라 실로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松花江유역의 큰 평원을 무대로 한 부여나 동해안에 면한 비옥한 토지를 갖고 있던 동옥저는 기장·피·보리·콩·삼〔麻〕등 크게 보아 잡곡류인 五穀을 재배했고, 동옥저 남쪽의 해안 및 내륙 산간지대에 점점이 분포해 있던 동예는 오곡 중에서 삼배〔麻布〕재배와 누에치기에 능했다고 한다. 한편 부여는 곡물 재배 이외에도 돼지를 비롯한 목축이 매우 성했고, 동옥저는 魚鹽과 海中식물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압록강 이북의 산악지대를 무대로 하여 일찍부터 戰士국가로 성장해 온 고구려는 좋은 농토가 없어 농업생산력이 빈약했다. 고구려는 이를 수렵과 인접 사회 특히 동옥저로부터 공납을 받아 보충했다. 이 같은 예맥족 계통의 나라들에 비해 한족 계통인 삼한은 水稻 경작사회로 착실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마한에 5월의 豫祝祭와 10월의 수확제가 있었다거나 변진한이 오곡 외에 벼를 잘 재배했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니까 크게 보아 만주로부터 한반도 중부 이북지역에는 북방 계통의 목축민문화·잡곡재배민문화·수렵민문화·漁撈민문화가 혼재해 있었고, 한반도 남부지역은 압도적으로 수도 경작에 의존하는 사회가 성립되어 있었다. 남한지역이 수도 경작 중심의 사회로 발전하게 된 것은 벼가 본디 동남아시아에서 기원한 작물이고 또한 중국 江南지방(長江 이남)을 거쳐 한반도 중부 이남의 서해안지방으로 전파해 온 경로로 미루어 볼 때 자연스런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는 물론 종족이나 문화계통의 차원에서 논의할 대상은 아니다.

 당시 한민족은 오늘날의 자연취락에 상당하는 ‘邑落’을 단위로 한 공동체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그 구체적인 실태는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동예의 독특한 영역의식은 종족의 계통문제와 관련하여 비교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즉 동이전에 의하면 동예의 풍속은 山川을 중시했는데, 거기에는 각기 ‘부분’이 있어 다른 지역 사람들이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고, 만약 이를 어길 경우에는 生口나 소·말로써 배상케 하는 責禍라는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이 동예의 습속은 沙流 아이누족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이 족속 역시 하천유역을 中核으로 하는 영역의식이 있어 하천의 양쪽을 구획하는 산의 가장자리가 바로 영역과 생활의 場인 iwor의 경계가 되어 있으며, 이처럼 같은 유역의 거주민이 강한 同類의식으로 결합하여 하천의 이름을 갖고 자기의 호칭으로 삼고 있는 경우가 주변에 거주하는 퉁구스족에게서도 발견된다고 한다.139)泉 靖一,<沙流アイヌの地緣集團における IWOR>(≪民族學硏究≫16권 3·4호, 1952), 29∼45쪽. 蒲生正男·大林太良·村武精一 공편,≪文化人類學≫(角川書店, 1967, 368∼394쪽) 所收.

 동이전에는 거주하는 가옥에 대한 기술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겨우 마한사람들이 草屋土室에 거주하고 있다는 정도의 기술이 보일 뿐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경우 큰 창고는 없으나 집집마다 桴京이라는 이름의 조그만 창고를 갖고 있다는 기사가 주목된다. 이 부경으로 짐작되는 것이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보이고 있으며, 신라와 가야의 토제품에서도 역시 볼 수가 있다. 이것은 평면 방형의 高床式 창고에 해당되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그 유래를 둘러싸고 북방설과 남방설이 대립되어 있다. 일찍이 1930년대에 이나바(稻葉岩吉)는 북방설을 주장했지만, 그 뒤 김원룡은 이를 남방식으로 보았다.140)金元龍,<新羅家形土器考-古代 韓國에 있어서의 南方的 要素->(≪金載元博士華甲紀念論叢≫, 乙酉文化社, 1969:≪韓國美術史硏究≫, 一志社, 1987) 참조. 한편 民族誌 자료에 의거하여 중국 남방 및 中原系의 高床式창고가 稻作과 관련된 곡물창고인 데 비해 북방계는 근본적으로 도작과는 관련이 없는 창고로, 동북아시아·북아메리카의 수렵·채집민족으로부터 스위스·스웨덴 등 유럽 산간부까지 광범한 분포를 보인다는 점에 유의하여 고상식창고를 漢文化가 침투하기 이전부터 존재한 북방 土着의 문화요소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淺川滋男,<高倉の民族考古學>(直木孝次郞·小笠原好彦 공편,≪クラと古代王權≫, ミネルヴア書房, 1991) 참조. 본디 고상식 창고는 벼농사(稻作)와 관련된 곡물창고로서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 이래 덥고 습기가 많은 화남·長江유역에서 출현하여 각지로 전파되었다. 이에 비해 춥고 건조한 화북지방에서는 穴倉(일명 저장혈)을 사용했는데,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충남 부여군 초촌면 松菊里의 집자리유적에서 그 실례가 발견된 바 있다. 이 점을 근거로 하여 한국에 水田 도작이 전래되면서 화북계통의 저장법이 전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41)佐原 眞,≪日本人の誕生≫(‘大系·日本の歷史’ 제1권, 小學館 Library版, 1992), 288·313쪽.

 그런데 住居와 관련하여 동이전의 동옥저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즉 함흥평야를 중심으로 한 남옥저로부터 800여 리 북쪽에 위치한 북옥저(일명 置溝漊)의 사람들은 바로 인접한 읍루 사람들이 여름이면 배를 타고 쳐들어와서 노략질을 하므로 이를 두려워하여 매양 여름철이면 山巖의 깊은 굴 속에서 지내면서 수비태세를 취하다가 겨울에 얼음이 얼어 뱃길이 막히게 되면 산을 내려와 본래의 촌락에 거주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동이전에는 북옥저 사람들의 여름철 산속 동굴 주거를 읍루족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상 읍루족의 후예가 아닐라고 짐작되는 길리야크족 자체가 여름 주거와 겨울 주거를 달리했다는 민족학적인 조사 보고가 있다.

 즉 길리야크족은 여름과 겨울의 생활조건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장소가 있으면 그곳에 定住的인 집락을 만들어 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여름철 주거와 겨울철 주거가 별도의 장소에 마련된다고 한다. 이처럼 여름과 겨울에 따라 주거지를 달리하는 생활은 길리야크족 이외에도 우리치족·네기달족·오로치족·나나이족·사할린의 아이누 등 퉁구스계통의 족속들이나 일부 고아시아족에게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142)荻原眞子,<民族と文化の系譜>(三上次男·神田信夫 공편,≪東北アジアの民族と歷史≫, 山川出版社, 1989), 93∼96쪽.

 종래 민족학계에서는 남방계 제민족이 雙系的 내지 모계적 문화를 특징으로 하는 데 비해서 북방계 제민족은 현저히 부계적 혈연집단의 성격을 띠고 있고, 또한 동남아시아지역의 주민들이 보편적으로 씨족 外婚制를 결여하고 있는 데 반해서 북방계 제민족은 길리야크족을 제외한 일부 고아시아족을 논외로 한다면 대체로 씨족 외혼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사실 퉁구스 諸語 중 특히 몽골어에 부계 친족집단을 나타내는 ‘할라(hala, 哈拉)’가 사회의 족적 구성의 기본이 되어 있고, 씨족 외혼제는 퉁구스 제족에 있어서 가장 오랜 제도의 하나이다. 동이전에는 동예사회가 ‘동성불혼’이라고 했는데, 이는 바로 외혼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부여사회는 ‘兄死妻嫂’ 하여 흉노와 습속이 같다고 했는데, 사실 이 레비레이트(levirate)혼이야말로 북방계의 여러 민족 사이에 널리 행해진 습속이었다. 한편 고구려 조에는 壻屋制度가 기술되어 있는데, 이 같은 혼인습속은 이른바 ‘일시적 妻訪婚(temporay matrilocal marriage)’의 일종으로 볼 수 있으며, 반드시 모계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러한 혼인관습은 중국 남부의 ‘不落夫家婚’이라 불리는 것과 매우 비슷하여 남방적 문화에 유래하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143)江守五夫,<日本の家族慣習の一源流としての中國北方民族文化>(江守五夫·大林太良 등 공편,≪日本の家族と北方文化≫, 第一書房, 1993), 25쪽. 하지만 중국 正史 열전에는 烏桓·鮮卑·鐵勒 등 몽골종족 가운데 튀르크계로 분류되는 유목민사회에도 이 같은 혼인관습이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아울러 서옥 자체는 고아시아족에 속하는 동부 시베리아의 유카기르족에서도 찾아 볼 수 있고 또한 北海島 아이누족의 오래된 서사시를 보면 이 같은 습속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어 고구려의 혼인습속이 동북아시아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144)大林太良,≪邪馬臺國-入墨とポンチヨと卑彌呼-≫(中公新書, 1977), 133∼134쪽.

 동이전 마한 조에는 成年式에 따르는 일종의 시련 행사로 생각되는 기사가 보인다. 즉 나라에 어떤 행사가 있거나 관청에서 성곽을 축조할 때 용감하고 건강한 젊은이들이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노끈으로 꿰맨 다음 한 발쯤 되는 나무를 꼽고 온종일 흥얼거리며 힘을 쓰는데도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데, 사람들은 이 작업을 권하고 있으며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健兒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하긴 이 기사는 손진태·이병도 등의 견해처럼 지게를 지고 노동하는 모습을 중국인 견문자가 오해한 데서 생긴 것으로 볼 수도 있다.145)孫晉泰,≪韓國民俗·文化散考≫(≪孫晉泰先生全集≫제6권, 太學社, 1981), 335∼336쪽.
李丙燾,≪韓國史·古代篇≫(乙酉文化社, 1959), 311쪽.
林建相,≪조선의 부곡제에 관한 연구≫(평양 과학원출판사, 1963), 106쪽.
다만≪후한서≫동이전 韓 조에는 이 같은 노동 기사 앞에 소년이 ‘築室’을 갖고 있다고 했으며, 이로 미루어 볼 때 남자집회소 내지 청소년집회소의 존재는 충분히 상정할 수가 있다. 민족학자들은 未開社會 정치조직의 기구로 혈연관계와 지연관계 외에 협동체관계를 중시하고 있는데, 이 협동체는 대개 性과 연령에 기초한 연령단체인 경우가 많다. 일찍이 미시나(三品彰英)는≪삼국지≫와≪후한서≫의 이 기사를 갖고 신라 화랑집단의 원류로 포착한 바 있다. 나아가 그는 이 같은 한족의 남자집회조직은 문화 요소로 볼 때 만주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오히려 남방 해양의 여러 민족과 결부시킬 수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한족이 ‘남방문화권’에 속하는 것이 명료하다고 못박았다.146)三品彰英,≪新羅花郞の硏究≫(‘朝鮮古代硏究’ 제1부, 三省堂, 1943), 제1장 제2절 참조. 그러나 조금 후대에 속하는≪구당서≫및≪신당서≫동이전 高麗(고구려를 가리킴) 조에는 결혼하지 않은 민간의 자제들이 모여서 주야로 독서와 誦經, 활쏘기를 했다는 큰 집 扃堂의 존재에 대한 기술이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李基白의 견해처럼 이 경당은 화랑도와 마찬가지로 원시 미성년집회에 그 기원이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고구려에도 남자집회가 있었음이 거의 분명하다면 미성년집회소를 기준으로 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권을 남북으로 양분하는 견해는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다.147)李基白,<高句麗의 扃堂-韓國 古代國家에 있어서의 未成年集會의 一遺制->(≪歷史學報≫35·36 합집, 1967:≪韓國古代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96), 91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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