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Ⅱ. 한민족의 기원
  • 2. 민족학적으로 본 문화계통
  • 3) 맺는말

3) 맺는말

 종래 한국사학계에서 민족의 계통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은 것은 오랜 세월 單一 민족국가를 영위해 온 데 말미암은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韓國史를 통해서 보면 소수민족집단과의 공존이라는 미묘한 정치적·사회적 문제와 씨름해 본 적이 없다. 그리하여 외교관 출신의 어떤 미국인 저술가는 한국이 소수 민족을 거느려 본 역사적 경험이 全無했던 까닭으로 해서 결국 정치적 문제 해결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고까지 지적한 바 있다(Gregory Henderson, Korea:The Politics of the Vortex, Harvard University Press, 1968). 이 같은 관점에서의 논의가 과연 옳은 것인지 어떤지는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단일민족국가라는 일종의 자부심이 역사 연구자들로 하여금 한민족의 형성과정 내지 계통에 대해 거의 무관심에 가까울 만큼 방치해 온 요인이 된 것만은 사실이 아닐까 하고 생각된다.

 지난날 한민족 형성과정에 대한 논의에서는 남북한 사이에 큰 차이를 보였다. 즉 한국학계에서는 혼혈론 이외에도 주민교체설이 유력하게 대두한 반면,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 온 북한학계는 한민족 單血性論을 제기하여 이미 공식견해로 정착된 바 있다. 하지만 한민족이 선사시대 이래 외부세계로부터 전혀 수혈을 받지 않은 채 현재까지 連綿히 이어져 왔다는 이 단혈성론은 집단유전학의 상식으로 비춰볼 때 납득이 되지 않는 명백히 잘못된 견해이다. 한편 구석기시대로부터 신석기시대로 다시 청동기시대로 轉化할 때마다 한국사의 주인공이 바뀐 것으로 생각하는 주민교체설에도 약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는 문화양상의 변화를 갖고 곧바로 종족의 교체에 의한 것인 양 보는 데서 나온 것이지만, 그러나 새로운 문화란 대개 장기간에 걸쳐 발전해 온 사회 내부의 자체 문화가 외부세계로부터 충격 내지 영향을 받아 발생하는 것이다. 다만 전면적인 주민 교체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매 역사적 전환기에 새로운 주민의 流入이 있었을 개연성은 매우 크다. 결국 한민족 형성과정을 파악함에 있어서는 비록 소박한 관점이기는 하지만 혼혈론 쪽이 옳다고 생각된다.

 한민족 형성의 진정한 출발점은 국가 성립기인 청동기시대로 볼 수 있다. 중국의 역사서에 보이는 濊貊族과 韓族이 바로 이 시대의 주인공이다. 이들 종족은 고조선을 비롯하여 부여·진국 등 국가를 건설했으며 뒤에 삼국의 건국세력으로 거의 고스란히 연결되었다. 삼국 항쟁기에 고구려·백제·신라가 각기 독자적인 민족의식을 갖고 투쟁했다는 손진태의 주장은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 이윽고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합됨으로써 한민족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보는 것이 우리 학계의 지배적인 통설이다. 이 예맥족과 한족은 민족학계에서 말하는 퉁구스족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긴 퉁구스족 대신에 알타이족을 거론하는 연구자도 있으나, 세계학계의 일반적인 관행으로는 ‘퉁구스’가 종족명으로 보다 널리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예맥족과 한족의 문화계통을 파악하는 것은 바로 한민족의 계통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기준이 된다. 이 같은 목적에서 대체로 서기 1∼3세기 경 예맥족과 한족의 민족지로서의 가치가 높은≪三國志≫魏書 東夷傳의 민속 관련 기사를 검토해 보았다. 즉 이를 생업기반과 사회조직, 농경의례와 일반적인 사회습속 그리고 신앙과 종교의 몇 가지 측면에서 그 특징을 摘出해 본 결과 압도적으로 동북아시아대륙의 북방계통 문화와 연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긴 일찍부터 水稻作 농경문화가 정착한 남한지역에 있어서는 동남아시아 혹은 남태평양지역의 이른바 남방계통의 문화요소가 일부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는 결코 문화발전의 단계적 차이나 혹은 종족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는 볼 수 없고 어디까지나 지역적인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李基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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