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Ⅱ. 한민족의 기원
  • 3. 문헌에 보이는 한민족문화의 원류
  • 2) 태양신앙·새 토템과 난생설화

2) 태양신앙·새 토템과 난생설화

 고구려의 시조 朱蒙의 설화는≪삼국사기≫·≪삼국유사≫·광개토왕릉비·≪魏書≫고구려전에 전하는데,≪삼국유사≫와≪삼국사기≫에 전하는 주몽설화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곰 토템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설화의 핵심은 주몽의 어머니 하백의 딸이 천제의 자 해모수와 사통하였으나 그 결과 주몽이 출생한 것이 아니라 ① 햇빛을 쪼인 결과 임신한 후 ② 알을 낳았으며, ③ 거리와 임야에 버려졌으나 禽獸의 보호로 무사하였고, 결국 다시 가져오니 그 알에서 주몽이 나왔는데, ④ 그는 특히 활을 잘 쏘았다는 부분이다. 주몽은 곧 ‘善射’를 의미한다고 한다.≪삼국지≫위서 동이전 夫餘條 末尾에 裴松之注가 인용한≪魏略≫의 藁離國王 侍婢에 의한 부여왕 東明의 출산설화, 後漢 王充의≪論衡≫吉驗篇에 소개된 槖離國王 侍婢에 의한 부여왕 동명의 출산 설화도 기본적으로 이 요소를 구비하고 있어 이 난생설화는 본래 부여의 시조 설화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주몽설화가 굳이 첫머리에 부여왕 金蛙의 설화를(부여왕 해부루가 鯤淵의 大石 아래에서 발견한 금색 蛙形의 아이)168)이것은 일종의 水中 탄생 설화인데, 수중에서 낳았다는 淵蓋蘇文의 泉氏(淵氏) 설화와 함께 고구려와 부여에 수중 탄생 시조설화를 가진 부족의 존재를 시사한다. 명기한 것은 부여의 시조설화를 고구려 시조설화로 가져왔기 때문인 것 같다.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이었다면 이 차용은 오히려 당연한 권리였겠지만, 고구려 남자를 수탉으로 불렀다던가 고구려인이 冠飾으로 두 개의 鳥羽를 꽂았다는 것은(≪舊唐書≫고구려전) 고구려인에게 새토템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었음을 잘 말해 준다.≪魏略≫과≪論衡≫이 東明의 어머니를 藁離國王의(≪論衡≫의 ‘槖離’,≪後漢書≫夫餘傳의 ‘索離’는 모두 ‘藁離’의 오기일 것이다. 藁離는 곧 고구려일 것) 侍婢라고 한 것은 이 설화가 고구려의 시조설화가 된 이후의 혼동으로 해석된다. 어쨌든 주몽설화는 곰 토템이 후면으로 물러나면서 태양신앙이 강조된 것이다. 주몽을 동명으로 표기한 것도 이미 이 점을 강조한 것이지만,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牟頭婁墓誌가 주몽을 ‘河伯之孫 日月之子’라 하고, 7세기 초에 편찬된≪隋書≫고구려전이 주몽을 “河伯之外孫 日之子”로 표현한 것은 바로 이 변화를 정확히 반영한 것이었다.169)주몽이 ‘日月之子’란 주장은 결국 하백의 딸이 月神이었다는 것인데, 水神과 月神은 흔히 호환되기 때문에 이 전환은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이 전환으로써 주몽이 완전한 天帝의 아들이란 주장의(광개토왕릉비) 근거가 확보되었지만, 한편 하백의 딸과 熊女의 연결이 단절됨으로써 곰 토템의 전통은 사실상 포기된 셈이다. 그렇다면 태양의 아들이 왜 卵生하였는가. 난생은 곧 새 토테미즘을 의미하지 않는가. 또 그가 善射하였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단순히 영웅적 군왕의 자질에 걸맞는 무예로서 강조되었던 것인가.

 주몽의 난생설화, 그 어머니가 玄鳥의 알을 삼키고 契을 낳았다는 殷의 시조 설화(≪사기≫殷本紀), 역시 길쌈을 하다 떨어진 현조의 알을 삼키고 大業을 낳았다는 秦의 시조 설화(≪사기≫秦本紀), 춘추시대 淮水·泗水 유역에서 큰 세력을 떨쳤다는 群舒의 君王 徐偃王도 한 여인이 난 알에서 깨어났다는 난생설화는(≪博物志≫異聞) 모두 동북아시아 새 토템의 산물로 이해되어 왔으며,170)徐偃王의 경우 새의 역할이 직접 언급되지 않았으며, 버려진 알을 獨孤母에게 물어다 준 개도 실제 黃龍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의 역할은 茂陵蠻의 시조 神犬 槃瓠를 상기시키는데, 槃瓠는 瓠에서 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이 설화는 瓠生說話와 卵生說話가 결합하면서 瓠는 卵에게, 새는 개에게 각각 양보하였지만, 다시 개 이름을 鵠蒼으로 하여 알과 새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난생설화의 구색을 맞춘 것으로 해석된다. 아울러 鵠이 과녁의 의미도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 弓射 역시 이 설화의 일부였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중국의 동북에서 동남 해안에 걸쳐 분포하였다는 鳥夷가 바로 이 새 토템 집단의 실체라는 주장도 유행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집단 전체의 문화적 또는 민족적 동일성 내지는 친연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특히 주몽설화와 서언왕설화의 근사성을 근거로 회수 유역의 서융과 예맥이 같은 뿌리였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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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고고학의 성과는 신석기시대 이래 중국 동북에서 동남 연안에 광범위하게 존재한 새 토테미즘을 추측할 수 있는 자료를 다수 제공하고 있다. 특히 홍산문화에서는 鳥形 옥기가 다수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그 陶器紋의 가장 커다란 특징인 M字紋 또는 ‘之’字紋은 바로 막 알에서 깨어난 玄鳥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 때문에 殷文化와 홍산문화의 연속성을 강조하거나, 나아가 은문화의 북방(요하유역) 기원설을 다시 제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 견해를 따른다면 주몽의 난생설화는 鳥夷 문화 특히 은문화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燕과 玄鳥의 관계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전국시대 청동기 명문에서도 燕은 ‘匽’으로 표기되지만, 은주 청동기 명문중 제비의 모습이 약여한 圖像符號는(<그림 6>) 흔히 ‘燕’자의 초형으로 석독되고 있다. 그러나 殷과 秦의 시조설화는 현조의 알을 삼키고 그대로 인간을 낳았다는 점에서 알을 낳는 난생설화와는 유형이 다르며, 햇빛과 弓·善射의 요소도 보이지 않는다171)仲春之月 玄鳥가 도래한 날 거행하는 祈子儀式 高禖는 殷의 玄鳥說話를 儀禮化한 것이 분명한데, 여기서 천자가 최근 관계한 후궁에게 弓韣을 차게 하고 弓矢를 수여하는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조 설화에도 궁시의 요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것은 ‘善射’의 의미보다는 성행위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이에 비해 徐偃王의 설화는 여인이 알을 낳은 유형이며, 周의 시조 后稷 설화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버려졌다 회수되는’ 과정도 있지만172)주몽과 서언왕이 알로 태어났을 때, 버려지고 회수되는 과정은 姜原이 들에서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임신하여 周의 시조 后稷을 낳은 후, 후직이 버려지고 다시 회수되는 과정과 거의 동일하다. 물론 아직까지 후직을 卵生으로 보는 사람은 없으며,≪史記≫周本紀는 그가 버려진 이유를 단지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전한다. 그러나 후직의 탄생 전후를 노래한≪詩經≫大雅 生民篇의 그가 낳았을 때의 모습을 “不坼不副(터지지도 않고 쪼개지도 않았다)”로 표현하였고, 그가 첫 울음소리를 내기 직전의 사정을 “차가운 어름덩이 위에 놓으니 새들이 날개를 덮어주었다. 새들이 떠나니 후직이 비로소 울음소리를 내었다(誕置之寒氷 鳥覆翼之 鳥乃去矣 后稷呱矣)”고 노래하였다. 이것을 난생설화로 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같다. 그러므로 필자는 후직 역시 난생설화의 주인공이며, 서언왕과 주몽이 각각 알로 태어나 버려졌다 회수되는 과정은 바로 후직 난생 설화와 관련된 것으로 주장한다. 역시 햇빛의 요소는 없으며 瓠生說話의 흔적도 남아있다. 또 버려진 알을 물어온 개의 이름 鵠蒼이 弓射를 암시하기도 하고(주 3 참조) 徐偃王이 朱弓矢를 얻은 후 이름을 弓으로 고치고 서언왕을 자칭하였다는 대목은 있지만, 여기서 弓矢의 의미는 天瑞로 강조되었을 뿐 서언왕의 善射를 직접 시사하는 구절은 없다.

 한편≪說文解字≫는 ‘夷’를 “東方之人也 仆大仆弓”으로 註解한 것은 물론 望文生意에 불과하다. 그러나 선사로 유명한 東夷 有窮의 后(君王) 羿의 경우, 예는 弓箭, 窮은 弓을 각각 의미한다면, 許愼의 해설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으며, 여기서 羿가 서언왕과 같은 偃姓, 偃은 鶠 즉 燕, 燕은 곧 玄鳥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서언왕 설화의 弓矢는 선사의 상징으로 삽입되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어쨌든 예에 관한 많은 고사와 신화가 전하지만, 그가 선사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은 10개의 태양이 일시에 출현하여 만물이 타들어가는 재난이 발생하자 9개의 태양을 활로 쏘아 떨어트려 자연의 정상을 회복시켰다는 신화일 것이다(≪淮南子≫本經訓). 한대 화상석에는 이 신화를 한 남자가 나무에 앉아 있는 새들을 활로 쏘아 떨어트리는 장면으로 형상화한 예가 적지 않다(<그림 7>). 이것은 湯谷의 扶桑木에 머무는 10개의 태양중 9개는 휴식하고 매일 1개의 태양만 교대로 새에 실려 운행한다는 신화에(≪산해경≫海外東經, 大荒東經) 근거한 작품들이다. 郭璞注에 의하면 태양을 실어 나르는 새는 태양안에 흔히 그려지는 三足烏라고 하는데, 한대 화상석중에도 가슴에 태양을 안고 나는 새의 모습들이(<그림 8>) 확인된다. 이것은 결국 새가 태양의 화신이란 관념을 단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며, 여기서 우리는 난생설화가 태양숭배와 결합된 이유를 확연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또 羿의 善射에 의한 9개 태양의 소멸이란 신화는 결국 궁술이 태양의 정상적인 운행을 보장할 수 있는 주술적 기술이었음을 의미한다면,173)J. Frazer의 Golden Bough에도 일식을 막기 위하여 화살에 불을 부쳐 하늘로 쏘는 주술의식이 전한다. 태양숭배와 선사의 결합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174)단군신화중 太白山·朝鮮·阿斯達은 일반적으로 태양숭배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고, 檀君도 샤만을 의미하는 ‘당글’ 또는 ‘하늘’을 의미하는 몽고어 ‘탱그리’와 관련하여 ‘天君’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당글’ 또는 ‘탱그리’를 굳이 ‘檀君’으로 音寫한 것은 혹 魏志 동이전 濊에 보이는 ‘樂浪檀弓’을 의식한 것일 수도 있다면, 다시 말해 檀君과 弓射의 관계를 암시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단군신화의 태양숭배도 이미 弓射와 결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아사달의 일명 弓忽山도 이런 각도에서 다시 음미할 필요도 있는 것이 아닐까. 즉 전자는 태양, 후자는 弓射를 각각 부각시켜, 양자가 함께 태양신앙과 궁사의 결합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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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穀神으로서의 주몽의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지적되는 李奎報<東明王篇>의 다음과 같은 설화는 앞에서 언급한 주몽신화에 직접 언급되지 않은 射日神話의 흔적을 전하고 있다. 즉 帶素 일행에 쫓기던 주몽이 大樹 아래에서 쉬고 있을 때 비둘기 한쌍이 날아 오자 神母(어머니, 柳花)가 두고 온 곡식 종자를 보낸 것으로 판단하고 두 마리 비둘기를 한 개의 화살로 쏘아 떨어트려(善射) 그 입을 벌려 보리 종자를 얻은 후 물을 뿜으니 비둘기가 다시 소생하여 날아 갔다는 것이다.175)<그림 6>상단의 새가 곡물을 물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보라. 이것은 고구려의 보리 농사의 시작과 관련된 설화이지만, 비둘기를 쏘아 죽였다 살린 것은 모든 태양이 사라진 후 다시 하나의 태양만 불러오는 招日儀式을 상징하는 것이176)射日神話 중 하나만 남은 태양도 숨어 버려 그것을 다시 불러오는 과정이 포함된 유형을 참고하라. 분명하고, 실제 일본의 신년 농경의례에 射日儀式이 포함된 예도 확인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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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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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1000년 이상으로 소급되는 사천성 三星堆 유지 祭祀坑에서 발견된 가지 끝에 각각 새가 앉아 있는(본래 10마리로 추정) 거대한(높이 약 4m) 靑銅神樹는(<그림 9>) 扶桑신화가 商代까지도 소급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혀 주었지만, 기원전 5천년까지 소급되는 절강성 餘姚縣 河姆渡 신석기 유지에서 발견된 雙鳳朝陽象牙彫刻과(가운데의 태양에서 좌우 양쪽으로 뻗어 나온 두 마리 새의 머리가 서로 마주 보는) 세 개의 다리에 머리가 둘인(좌우 반대로 향한) 수탉 모습의 새 가슴 부분에 태양이 조각된 상아(<그림 10>), 그리고 陝西·감숙·하남성 일대 앙소문화 유지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 ‘태양안의 三足烏’ 도안(<그림 11>) 등은 모두 태양과 새의 호환성 관념이 신석기시대 초기까지 소급될 수 있는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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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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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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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주몽설화는 곰 토테미즘이 배면으로 후퇴되고 태양숭배, 射日신화, 卵生, 새 토템의 복합이 전면으로 나온 것인데, 이와 관련 강소성 徐州市 銅山縣 苗山 漢墓의 화상석은(<그림 12>)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상단 왼쪽에는 새가 들어 있는 태양, 오른 쪽에는 熊首人身에 날개같은 깃털이 달린 神人, 그 아래에는 하늘로 솟으려는 듯한 천마, 다시 그 아래에는 貫珠를 등에 진 코끼리가 刻畵되어 있다. 여기서 일단 코끼리를 제외한 부분을 우선 주목해 보면, 扶桑 옆에 매어 있는 말도 한대 화상석에 빈번히 나타나는 주제인데, 이 말은 태양의 운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말·새·태양과 곰을 결합시킨 이 화상석의 주제는 주몽설화의 기본 모티브와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더욱이 코끼리가 남방 聖獸임을 고려하면, 코끼리와 그 윗 부분은 각각 남·북방의 성수들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여기서 필자는≪산해경≫海內經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즉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 朝鮮 天毒”. 천독은 인도이다. 따라서 이 기사를 동북의 국을 소개한 것이 아니라 양국을 각각 동북과 서남부를 대표하는 나라로 이해하지 않으면, 조선과 천독이 병거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이 기사를 앞에서 소개한 화상석의 구도와 결합하면, 코끼리는 인도, 그 上部는 조선의 신화를 각각 묘사하였다는 결론도 전혀 엉뚱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필자도 이것을 그대로 주몽설화에 천마신앙이 가미된 동북 예맥 신화의 형성화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 화상석은 태양숭배·새토템이 곰토템과 병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것은 분명하다. 주몽설화가 참고할 수 있는 신화와 설화를 작위적으로 복합하여 창작된 것이 아니었다면, 부여와 고구려의 문화적 원류도 이들 요소들이 개별적으로, 또는 복합적으로 형성된 문화권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비해 신라 박혁거세의 난생신화는 태양(電光같은 異氣, 알을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백마(천마), 天降, 몸의 광채, 光明理世), 난생, 새(鷄龍)의 요소만 확인되며, 遺棄된 후 회수된 과정과 善射의 요소도 없으며, 여인에 의한 産卵 과정도 없다. 그러나 대신 이 설화에는 주몽설화에는 보이지 않는 요소가 등장한다. 우선 천마를 통한 알의 하강도 기마문화와의 관련을 강하게 시사한 점에서 주목되지만, 알이 발견된 장소가 우물이며(蘿井, 그 부인 閼英은 閼英井) 알에서 나온 아이를 샘이나 川에서 목욕시켰다는 것도(東泉, 閼英은 月城北川) 이 설화가 주몽설화는 다른 문화적 배경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이것은 鯤淵의 대석 아래서 발견된 金蛙, 그 조선이 水中에서 나왔다는 고구려 淵氏, 용왕 아들 용성국왕의(용성국은 왜의 동북 천여 리에 있었다고 한다) 아들로 태어났지만 알 상태로 태어나 궤〔櫝〕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진 후 신라에 도착하였다는 석탈해 설화177)석탈해가 실린 궤가 떠내려 올 때, 한 마리의 鵲이 울며 따라왔기 때문에 ‘鵲’에서 ‘鳥’를 빼고 ‘昔’을 씨로 하였다는 것은 그의 난생과 鵲의 관계를 암시한다. 등과 같이 水 또는 海를 거치는 난생설화의 유형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박혁거세가 나온 알이 “瓠〔박〕와 같았다(如瓠)”는 점을 주목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하다. 이 역시 광명을 의미하는 당시 신라 말의 발음이 현재 ‘밝다’와 비슷하였고, 瓠를 신라에서 ‘박’으로 불렀기 때문에 거꾸로 ‘밝음’을 ‘박’으로 표시하기 위하여 그 알을 ‘如瓠’로 부회한 것으로 이해하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설명이 너무 어색한 것도 문제이지만, 박혁거세 시대부터 박·석·김씨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瓠公을 주목하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 같다. 그는 박혁거세를 위하여 馬韓과 교섭하기도 하였고, 계림에서 김알지를 발견하기도 한 인물인데, 석탈해는 속임수로 그의 택지를 빼앗으나 왕이 된 후 그를 大輔로 삼았고, 석탈해가 왜의 동북에서 왔고 호공도 본래 倭人으로 허리에 瓠를 달고 (헤엄쳐) 바다를 건너 왔다는 것을 보면 호공과 탈해는 모두 瓠 또는 櫝에 실려 해류를 따라 왜 또는 그 방향에서 신라로 건너온 집단으로 추정된다.

 중국 서남부 소수민족에 광범위하게 유행하는 홍수신화, 즉 홍수로 인류가 전멸하였으나 瓠 속으로 피신한 남매가 인류의 시조가 되었다는 신화(伏犧·女媧), 漢代 茂陵蠻의 시조였다는 神犬 槃瓠도 본래 호에서 나온 벌레였다는 신화(≪後漢書≫南蠻傳,≪搜神記≫권 14), 지금도 중국 서남부 彝族들은 호를 祖靈으로 받들고 있으며,178)앞에서 이들이 토템이 虎라는 것을 지적하였지만, 이들은 虎와 瓠의 토템을 결합하여 瓠에 虎를 그려 祖靈으로 받든다(<그림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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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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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記≫婚儀篇에 전하는 부부합체의식의 하나가 2개의 바가지(瓢)로 쪼갠 호를 다시 하나로 합쳐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는 것은 모두 ‘호에서 탄생한 인류’란 관념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瓠公이 허리에 瓠를 달고 바다를 건너왔다는 것도 실제 해류를 타고 흘러온 호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해도 대과는 없다면, 호공은 당시 신라의 호생설화를 담지한 집단의 대표로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최근 일부 일본학자들은 기원전 300년경부터 시작한 일본의 농경문화 야요이 문화의 원류를 중국 고대 강남문화에서 찾으려고 하는 한편 倭人 역시 이 지역에서 농경(稻作과 양잠) 및 금속 문화와 함께 이동한 집단이었을 가능성을 열심히 탐색하고 있다. 이 연구들을 참고하면 호공이 왔다는 倭도 일본열도가 아닌 중국의 연해안 지역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 어쨌든 호에서 탄생한 시조, 즉 瓠生說話와 중국 남부지역의 관련성은 부정하기 어려운 것 같다. 호생설화가 ‘해류를 타고 흘러온’ 요소가 결합된 것은 이 집단이 실제 해상으로 이동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홍수신화에도 인류의 시조가 나온 호는 大水를 떠 다녔다는 것을 상기하면 ‘물위로 떠 다니는 것’은 본래 호생설화의 중요한 모티브였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렇다면 석탈해설화는 호생설화를 중심으로 난생설화와 결합하는 과정에서 해류를 타고 온 瓠가 櫝으로 바뀌었고,179)≪삼국사기≫는 석탈해의 출자국을 왜의 동북 1천 리에 있는 多波那國으로, 그 어머니를 여인국의 왕녀로 전하는데, 이 여인국은≪위지≫동이전에 언급된 옥저의 동해에 있는 섬일 것이다. 따라서≪삼국사기≫도 탈해가 일본 열도의 동북에 위치한 것으로 인식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탈해가 冶匠이었던 점(脫解란 말 자체가 철을 의미), 일본 열도의 철기기술도 대체로 한반도를 거쳐 전해진 것을 감안하면, 일본 열도 동북 천리 밖에서 鐵冶匠이 신라에 왔다는 것은 너무나 어색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탈해설화는 중국 남부의 호생설화와 철기기술이 직접 또는 한반도를 거쳐 전래된 것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한다. 박혁거세의 설화는 騎馬文化와 결합한 난생설화를 중심으로 호생설화가 결합되면서 “그 알이 호와 같았다”는 것이 삽입되는 한편 알의 발견을 우물가로, 태어난 아기의 목욕장소를 샘 또는 川으로 추가하고, 성도 朴 즉 瓠로 칭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 같다.180)중국에서 박성은 槃瓠蠻(武陵蠻)과 동일한 종족인 板盾蠻의 대성으로 확인되는데, 朴胡란 이름의 巴夷王도 있었다고 한다. 박혁거세와 중국 남부 문화의 관계를 고려할 때 이 역시 우연만은 아닐지 모른다.

 한편 호공이 마한에 가서 알영과 박혁거세를 국가를 흥기시킨 ‘二聖’으로 주장하였고, 실제 알영과 박혁거세가 함께 순행하며 농상을 장려하였다는 것, 그 아들 남해왕의 妃 雲梯夫人도 영일현 雲梯山聖母로 신앙되어 한발을 구제하는 신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모두 모계가 중시되는 중국 남부 문화를 상기시킨다. 이 점은 바다를 통하여 도착한 首露王과181)首露가 깨어난 황금알도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점에서 수로 설화도 일단 태양숭배, 난생, 황금문화의 복합으로 이해되지만, 거북이를 매개로 알이 내려 왔다는 점에서는 거북신앙 내지는 바다를 통하여 이동해 온 집단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허황후의 설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182)皇后로 표기한 것도 首露王妃의 許氏의 특별한 지위를 시사하지만, 자손을 金과 許 양성으로 나누었다는 것은 강한 모계를 웅변하는데, 이 점은 일본 고대 국가의 호적에서도 확인된다.. 신라 왕권이 박·석·김씨에 의해서 교대로 계승되고 3명의 여왕도 추대된 것 역시 모계의 중시와 관련된 것이라면, 초기 신라와 중국 남부문화의 관계는 의외로 긴밀하였던 것 같다.

 이에 비해 金閼智설화도 白鷄가 핵심적인 요소인 만큼 일단 난생설화에 속한다. 그러나 황금궤 안의 내용물은 男兒이므로 이미 卵의 요소는 표면에서 후퇴함으로써 난생의 성격이 크게 약화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대신 이 설화에는 새로운 요소가 등장한다. 즉 금궤와 그것이 발견된 곳 숲 속의 나무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석탈해가 실려온 것도 궤〔櫝〕이므로 궤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木櫝이 아닌 金櫝이다. 이것은 신라의 화려하고 정치한 황금 수공예를 상기시키는데, 그 원류가 북방 스키타이문화와 무관하지 않다면, 이 설화는 황금을 즐겨 사용하는 북방 유목문화를 강하게 반영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閼智 역시 흉노 單于의 부인 閼氏를 연상시킨다183)閼智를≪삼국사기≫는 “총명하고 지략이 많다”는 의미로,≪삼국유사≫는 ‘小兒’의 의미로 각각 전하고 있지만, 脫解의 語義를 “解韞櫝而出(궤를 싼 것을 풀고 나왔다)”로 해석한 것처럼 이 역시 望文生意에 불과한 것 같다.. 한편 숲과 나무는 동아시아에 광범위하게 유행한 神樹신앙을 시사하는데, 이 점은 다음 장에서 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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