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Ⅱ. 한민족의 기원
  • 3. 문헌에 보이는 한민족문화의 원류
  • 4) ‘기자조선’과 은주문명

4) ‘기자조선’과 은주문명

 韓民族 문화의 원류를 논하면서 동아시아에서 가장 선진한 중국 문명의 요소를 논하지 않는다면 상식적이 아닐 것이다. 漢 4郡의 설치에 의한 본격적인 중국 문명의 보급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辰韓의 주민이 秦末의 전란을 피하여 온 중국의 유민이었다던가 衛滿이 燕의 유민집단을 이끌로 조선으로 들어왔다는 것도 중국 문화가 韓民族 문화를 형성한 중요한 일부였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箕子朝鮮의 실재 여부와 그 범위에 관한 논쟁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두 가지 문제와 직결된다. 즉 ① 중국 殷·周文明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한민족 형성 집단에 파급되었고 ② 과연 은말 주초에 이미 조선이 한민족 형성의 핵심 집단으로 존재하였느냐는 것이 그것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기자가 조선에 봉해지자 단군은 藏唐京으로 이동한 후 아사달에 숨어 山神이 되었다고 하는데, 한초 伏生의≪尙書大傳≫이 기자의 조선 被封을 언급한 이래185)≪周易≫明夷 六五爻辭 “箕子之明夷”의 ‘明夷’를 ‘朝鮮’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적어도 기자가 조선으로 간 전승은 춘추시대 이전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사기≫를 비롯한 역대 사서와 문헌들은 모두 이것을 史實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특히≪한서≫지리지는 현토·낙랑군을 조선·예맥·고구려의 지역으로 설명하면서 朝鮮으로 간 箕子에 의한 禮義와 농경·蠶桑·방직의 보급을 예찬하고 있으며, 위지 동이전 夫餘 條가 殷曆 정월의 祭天을 전한 것도 기자를 통한 은 문화의 전래를 의식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대의 鮮虞氏는 기자의 후예를 자칭하였다(鮮于璜碑文). 이에 비해 衛滿 이전의 조선왕들이 스스로 기자의 후예를 자칭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며, 宋微子世家에서는 기자의 조선 봉건을 대서특필한≪사기≫도 막상 조선열전에서는 이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대의 학자들이 기자의 조선 봉건을 그토록 확신한 것은 무언가 선진 문헌에 근거하였거나 조선의 자칭을 傳聞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186)≪尙書大傳≫도 기존의 문헌 또는 口傳에 의거한 것으로 추측되지만,≪사기≫도 단순히≪상서대전≫을 근거로 宋微子世家의 箕子 기사를 창작한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서≫지리지의 낙랑·현토의 풍속기사는 현지 郡縣의 보고에 의거한 성격이 강한데, 함께 언급된 箕子의 敎化도 그 보고 또는 傳聞의 일부일 가능성이 농후하다.≪魏略≫이 전하는 朝鮮 기사도 찬자의 창작은 아니라면, 적어도 위만 이전 朝鮮의 고사전승이 별도로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箕子는 은왕의 친척 또는 서자로 전해졌지만 箕族 출신은 분명하다. 은대의 갑골문이나 은대 기족 청동기의 출토 상황을 보면 은대 기족은 주로 산동성 서부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6년 발굴된 은왕 武丁의 妃 婦好의 묘에서 출토된 기족 청동기 21건은 은대의 기족이 산동의 유력한 씨족으로서 왕실과 관계도 밀접하였으며 은대 청동기 문화의 중심에 참여한 것이 분명하다. 실제 기후 청동기에는 ‘㠱’ 또는 ‘其’ 字와 함께 상왕조의 畿內 제후를 표시하는 ‘亞’ 字가 함께 표기된 것도 그 일족의 정치적 지위를 잘 말해 준다. 기자가 실제 조선에 봉건되었다면 이와 같은 기족이 보유한 은대 최고의 청동기 문화가 조선에 이식되었을 것이며, 周初 齊·魯·燕 등의 봉건 사례로 보아 기자 일족 뿐 아니라 봉건시 사여된 상당 규모의 예속 씨족 집단도 함께 이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左傳≫에 보이는 현 산서성 浦縣 동북 부근의 箕, 晉의 귀족 箕氏의 활약은 은대 기족의 일부가 晉侯에 복속되어 산서로 천사된 사실을 입증해 준다. 한편 70년대 遼寧省 喀左 北洞에서 발견된 㠱侯 청동기도 이 지역까지 기족의 일부가 이동한 사실을 밝혀주었는데, 이 기후는 은말·주초 대릉하 유역까지 진출한 殷系 세력의 일부로 보인다. 특히 이 청동기는 孤竹國의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었는데, 그 銘文에 의하면 기후와 고죽은 모두 燕侯에 복속된 소 집단에 불과한 것 같다. 더욱 이 산동의 紀(㠱)국도 姜姓이었다면, 이것은 은대 기족의 근거지에 강성을 봉건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周初의 기족은 유력한 봉건 제후에 각각 분산 신속되었을 뿐 기족 주체의 대규모의 봉건은 없었던 사실을 말해 준다. 기자의 조선봉건을 전한 기사들도 대체로 그 봉건이 주 왕실의 계획된 정식 봉건이 아니라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한 이후에 朝鮮侯로 추인한 것으로 전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 같다. 사실 주대 봉건 제후국중 複字名의 예가 확인되지 않는 것을 고려하면 조선후란 칭호 자체도 대단히 의심스럽지만, 기자가 다시 周에 입조하였을 때 殷墟를 지나며 망국의 비애를 담은 麥莠之詩를 읊었다는 것도 허구에 불과한 것 같다. 서주의 王都 成周는 낙양이었고 鎬京은 섬서성 서안 이서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하남성 安陽의 殷墟를 지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설사 기자 또는 그 일족이 조선지역으로 간 것은 사실이었을지라도, 그 이동 집단의 규모도 작았고 그 일족이 보유한 전 역량을 대동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아직까지 요서 일대에는 전형적인 은문화나 조기 주문화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서주 이후 이 일대에서 발전한 夏家店上層 문화에서도 중원 청동 禮器 문화의 영향이 뚜렷하지만 주의 대규모 봉건 식민과 은주 문화의 대대적인 이식을 추측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요동지역의 상황은 더욱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마치 “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의 (땅)이었는데, 주대에 그곳에 기자를 봉하였다”는≪隋書≫裴矩傳의 주장을 입증하는 것 같다. 고죽은 현재 하북성 灤縣 부근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과연 기자가 실제 고죽 또는 그 일대에 봉건된 것이었는가. 아니면 燕侯에 臣屬된 기후의 일시적인 이 지역 진출이 기자의 조선 봉건으로 부회되었는가. 아니면 기자 또는 그 일족이 이 일대에 기후로 봉건되었으나 그후 이 지역을 차지한 조선이 기자의 후예를 자처한 것인가. 이 문제는 결국 적어도 은말·주초에 조선이 이미 존재하였느냐는(그 위치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문제와 직결된다.

 기자의 봉건 또는 기자의 조선행을 전하는 자료들은 모두 당시 조선의 존재를 전제로 기술한 것 같다. 그러나 선진 문헌 중 조선을 직접 언급한 것은≪山海經≫(海內北經, 海內經)·≪管子≫(輕重甲)·≪戰國策≫(燕 1)에 불과한데, 이들의 성립 연대는(특히 조선이 언급된 편장)은 전국시대 이상 소급되지 않으며,187)≪관자≫의 ‘發 朝鮮’이 管仲과 齊 桓公의 대화에 나온 것을 근거로 ‘조선’의 명호가 적어도 제환공의 시대인 기원전 7세기까지 소급되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관자≫, 특히 그 輕重篇의 성립 연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소치일 뿐이다. 전국시대 魏 襄王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逸周書≫王會解는 여러 동북이를 열거하면서도 조선은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많은 학자들은 중국의 동북에서 확인되는 집단 중 ‘조선’의 의미(밝음, 광명) 또는 현재 한국어의 ‘밝다’라는 음에 근사한 집단, 즉 發·不·符婁·白民(이상≪일주서≫)·貊·亳·北(이상≪시경≫)·番 등이 바로 조선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發과 조선이, 예맥과 조선이, 진번과 조선이 각각 병칭된 것을 보면, 설혹 이들이 모두 동일한 계통에 속하였을지라도 조선도 이들중 하나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또 發과 貊이 은말·주초에 이미 존재하였다고 조선 역시 동시기에 존재하였다는 보장도 없으며, 조선이 ‘발’ 등의 의미를 한자로 표기한 것인지도 분명치 않다. 조선이 순록을 의미하는 현지어의 音寫였고, 따라서 肅愼(息愼·稷愼)도 조선과 동일하다는 주장도 있고, 한편 朝와 鮮을 구분하여 鮮은 魚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조선이 燕의 동 또는 동북에 존재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史記≫의 기술로 보아 위만의 국호가 조선이었고 그 이전 朝鮮과 眞番이 그 부근에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위략≫의 기사를 신뢰한다면 전국시대의 조선은 燕과 대결할 정도로 강성한 나라로 보인다. 그러나≪위략≫에 소개된 그 국가의 명호가 실제 조선이었지는 분명치 않다. 그 君王이 연의 稱王 이후에 비로소 칭왕하였고 그 이전에는 侯를 칭하였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지만, 準王의 국호가 조선이었다면 그가 위만에 쫓겨 달아나서 한왕을 칭하였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조선의 왕이었다면 남부로 달아나서도 조선왕을 칭하였을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위략≫의 朝鮮王 또는 朝鮮侯는 ① 조선이 동북지역의 통합세력이었고 ② 기자의 조선봉건을 전제한 허구에 불과하거나 중국인들이 일방적으로 이민족을 外臣 제후로 편입하는 관념의 소산으로 보인다. 은말 주초에 조선이 없었다면, ‘朝鮮侯 箕子’도 존재할 수 없었겠지만, 주초 燕侯의 통제하에 대릉하 유역에 진출한 기후가 설혹 ‘조선’의 일부를 복속하여 조선후를 자칭하였을지라도 그 ‘조선’은 전국시대의 조선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소국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소국도 문명의 중심과 계속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하였다면, 그리고 그 일대의 문화가 현격히 낮았다면, 이 소국은 문명의 거점으로서 주변의 문명화에 크게 기여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도 서주와의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춘추시대 연도 융적의 핍박을 계속 받은 상황에서 기후국도 문명의 중심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 지역은 이미 夏家店 하층문화 이래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고 있었고, 그것을 계승한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은주 문명의 요소는 별로 강하지 않다. 그렇다면 箕侯國이 설혹 상당 기간 존속하였을지라도 요동은 물론 요서에서도 문명의 전초 기지 역할을 크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箕子神 제사도 단순한 ‘기자조선’의 계승을 자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혹 고구려의 모체와 기후국의 역사와 긴밀하게 관련된 것이었을지라도, ‘기자조선’이 예맥세계에 은주 문명을 이식한 공헌을 적극적으로 평가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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