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Ⅱ. 한민족의 기원
  • 3. 문헌에 보이는 한민족문화의 원류
  • 6) 맺음말

6) 맺음말

 한민족 형성 집단의 시조신화에는 곰과 호랑이의 토테미즘, 새 토테미즘과 난생신화, 태양신앙, 瓠生神話, 射日神話, 천손강림, 산악과 수목신앙, 천마와 거북신앙 등 다양한 요소가 반영되었으며, 각 집단에 따라 이 요소들의 복합도 상이하였다. 이러한 신앙은 모두 동아시아에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던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신앙을 담지한 집단과 한민족 형성 집단들이 일정한 교섭을 가졌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인정되며, 한민족 문화의 원류를 이 집단의 문화와 관련하여 탐색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신화적 발상을 가진 집단이 반드시 상호의 밀접한 교섭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동일한 계통의 신화를 공유한 집단이 반드시 동일한 문화권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또 동일한 문화권에 속한 것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 문화가 곧 동일한 것은 아니다. 문화에는 시간과 층차, 그리고 중심부와 주변부의 층차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殷과 예맥이 난생설화를 담지하였을지라도 난생신화의 유형과 변종도 다양할 뿐 아니라, 설혹 기본적으로 동일한 유형의 신화를 공유하였을지라도 그 공유가 신석기시대에 이루어졌던 것이라면, 또는 은대에 공유된 것이라도 은의 고도한 청동기 문화의 상층구조와 무관한 주변적 차원에서 이루진 것이라면, 굳이 예맥의 문화적 원류를 은 문화에서 찾을 이유도 없으며 더 더욱 은 문화를 예맥의 문화로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문화와 민족도 역사적으로 형성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이 한민족과 관련된 신화와 토템신앙의 다양성을 비교 분석한 것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의 원류를 탐색하는 작업에는 그 집단이 거주, 활동한 구체적인 공간과 그 시기를 확인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여기서 가장 큰 위험은 비슷한 발음이나 의미의 문자를 모두 동일한 집단으로 간주하여, 그 범위를 무한히 확대시키는 것이다. 특히 漢字는 假借와 同音異寫도 많고 외국의 고유명사를 의역하여 표기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상상을 절제하지 않으면 어떤 동일한 내용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문자가 너무나 확대되어, 오히려 불신을 자초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문헌을 보수적으로 이해해도 은주시대 예맥족이 중국의 섬서·산서·하북의 북방은 물론 회수 유역에서 활동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 북방에서 활동한 제 집단은 한민족 문화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겠지만, 회수 유역에서 활동한 맥족을 통하여 회수 유역의 문화가 한민족 문화에 영향을 준 것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또 주초 하북의 예맥 존재가 곧 그 부근이 고조선의 영역이란 의미도 아니며, 전국시대 ‘朝鮮의 像’을 은주시대까지 소급하는 것도 금물이다.

 한민족의 문명적 발전에 가장 영향을 준 것은 역시 중국 문명일 것이다. 기자조선은 바로 그 초기 중국 문명의 수용 내지 이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주장된 것이었다. 그러나 은말 주초 조선이란 국호 또는 지명이 존재하였는지도 의문이지만, 주초 대릉하 유역에 나타난 箕族의 一支도 은주 문명을 체계적으로 대거 이식하는 역할은 하지 못하였고, 이것은 역시 漢 4郡의 설치 이후에 속하는 것 같다. 그 결과 예맥족은 중국문명의 외각에서 또 다른 문명권에 참여하면서 발전하였다. 이것이 바로 홍산문화에서 하가점 상층문화에 이르는 요하 문화권이며, 이 중 특히 비파형동검, 미송리형 토기, 적석총은 예맥 문화라고 한다. 그러나 전한말 편찬된 揚雄의≪方言≫은 각지의 방언을 보고하면서 “朝鮮洌水之間”의 언어를 소개함으로써 조선을 중국 방언권으로 인식하였을 뿐 아니라, “燕代朝鮮洌水之間”, “燕之北鄙朝鮮冽水之間”, “燕之北郊朝鮮冽水之間”, “燕之外鄙朝鮮冽水之間”, “燕朝鮮冽水之間”, “北燕朝鮮之間”, “燕之東北朝鮮冽水之間”, “北燕朝鮮冽水之間”에 동일하게 사용되는 방언을 다수 소개하였다. 물론 이것은 연 또는 그 동북 외곽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지역이 모두 동일한 언어권에 속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적어도 연 문화가 이 지역에 상당히 확산되었거나 예맥족과 연의 밀접한 교섭을 반영한 것은 분명하며, 따라서 연을 통한 중원문화와 그 주변문화의 보급도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문헌을 통한 역사연구의 한계는 자명하다. 그것은 기록된 것만을 대상으로 하는데, 기록의 불충분, 누락, 망실은 차치하더라도 때로는 의도적으로 왜곡되고 심지어는 창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헌상으로 한민족 문화의 북방 계통을 추정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한 것 같으며, 남방 계통도 그 편린은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헌만으로 그 시간과 공간을 구체적으로 추정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면, 고고학에 기초하지 않은 신화와 전승의 분석은 시간과 공간의 학문인 역사의 범위를 크게 벗어난 것이다. 더욱이 한민족 문화의 원류를 논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문제, 예컨대≪삼국지≫위서 동이전 이전의 동아시아의 종족과 문화의 분포, 특히 삼한 이전 한반도 남부의 문화, 稻作을 시작 또는 전래한 집단과 고인돌 문화의 주인공, 등등의 문제는 고고학과 형질인류학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약간의 유물을 참고하였지만 기획자의 주문대로 주로 문헌의 검토에 始終할 수밖에 없었던 본고는 고고학 및 형질인류학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 글들과 함께 읽지 않으면 너무나 공소한 느낌을 줄 것이다. 마지막 부언하고 싶은 것은 한민족의 원류를 탐색하는 것은 특정 범위내에서 그 고유한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한민족의 문화를 계속 풍부하게 만드는데 직접 간접적으로 기여한 여러 집단의 문화를 확인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고는 한민족의 형성과 그 문화의 발전에 참여한 그 집단의 범위를 漢族을 비롯한 중국 내륙의 소수민족, 匈奴를 비롯한 북방의 여러 유목민족, 烏桓, 鮮卑, 肅愼, 挹婁, 靺鞨, 倭 정도로 일단 좁힘으로써, 그 구체적인 내용을 추적하는 과제의 기초를 정립한 것에 불과하다.

<李成珪>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