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1. 선사
  • 2) 정착생활의 신석기문화

2) 정착생활의 신석기문화

 이제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의 수는 약 150개소에 이른다. 이들은 한반도 전역에 균등하게 분포되어 있지는 않고, 주로 대동강·한강 유역 및 그 인접도서를 포함한 서해안지역, 두만강유역을 포함한 동북해안지역, 낙동강유역을 포함한 남해안지역 등 세 개 지역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 이들 각 지역군 사이에는 문화 양상의 차이 또한 적지 않다.

 서해안지역에서는 토기의 기형이 곧은 아가리와 뾰족 바닥으로 이어지는 포탄 모양의 뾰족밑 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이들 토기의 바탕흙에는 운모가 혼입된 것이 많고, 수적으로는 적지만 석면과 활석이 혼입된 것도 있다. 무늬는 그릇 표면의 전면 혹은 일부에 장식되어 있으며, 이들 무늬는 바탕흙이 마르기 전에 이빨이 하나인 단치구 또는 여러 개 달린 다치구의 무늬새기개로 긋거나 눌러서 새긴 것이다. 아가리부분의 주된 무늬로는 평행밀집단사선문, 점열문, 사격자문 등이 있고, 몸체 부분에는 어골문 또는 그의 변형이 대부분이고, 바닥은 몸체와 다른 무늬로 장식하였다. 이런 특성을 갖는 토기를 총괄하여 서한첨저유형토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서한토기는 표면의 장식무늬가 아가리부분, 몸체부분, 그리고 바닥 가까운 부분 등 각각의 몸체 부위에 따른 장식 무늬의 유무와 조합 관계에 따라 3기로 나뉘어진다. 제1기는 기원전 5000∼3500년, 2기는 기원전 3500∼2000년, 3기는 기원전 2000∼1000년까지이다.

 동북해안지역의 토기는 그릇 형태에 있어 예외 없이 납작바닥인 점이 특징이다. 바탕흙에는 굵은 모래가 섞여 있으며, 수적으로는 많지 않지만 조개가루를 혼입한 것도 있다. 무늬는 토기 표면 전체에 걸쳐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릇 표면의 아가리부분 또는 아가리부분과 몸체부분에 국한되어 있다. 무늬를 그린 수법은 매우 다양한데, 바탕흙을 빚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눌러찍기 또는 그어서 무늬를 새긴 것이 아니라 뾰족한 무늬새기개로 찔러서 점 같은 것을 새긴 것이다. 그러나 무늬가 없는 토기도 반출되고 있다. 이들 토기를 일괄하여 동한평저유형토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동한토기는 함북 웅기군 서포항유적 발굴 조사에서 층서적 상하관계가 잘 나타나 있으므로 그에 따라 1기에서 5기로 세분되며 1기는 기원전 5000년경에서부터 시작되어 기원전 1000년까지 계속되었다.

 남해안지역에서는 부산 영도섬에 있는 동삼동유적이 중요하다. 동삼동유적에서 나타난 층서 관계를 기준으로 볼 때 토기군 상호간의 특성을 달리하는 여러 종류가 5기로 세분되는 각 분기의 주체를 이루고 있다. 이들 토기를 일괄하여 남한유형토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토기는 기원전 5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까지 지속되었다.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여러 종류의 석기들이 출토되었다. 이 중에는 화살촉·창·도끼·조합식 낚시바늘 등이 있다. 화살촉의 등장에는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종래에 창처럼 근접해서 수렵을 하는 단계에서, 먼 거리까지 날아가는 활의 사용으로 기술의 발전과 함께 식량 확보의 증대를 가져온 것이다. 또한 어구류가 다수를 점하고 있어 어로에 커다란 비중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암사동유적을 위시한 서해안지역의 유적에서는 돌로 된 그물추가 다수 발견되어 주로 그물에 의해 고기를 잡았음을 시사해준다. 이와 같이 그물에 의한 어로 방식은 강원도 오산리나 부산 동삼동유적처럼 신석기전기의 낚시바늘이 개별적 작업인데 반하여 다량의 어획량을 보장하는 집단적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전기부터는 냇돌에서 떼어낸 타원형 격지를 안팎으로 떼어낸 돌도끼가 출현하여 후기에까지 그 전통이 지속된다. 후기에 들어서면 이와 같은 냇돌 석기 전통이 지속되지만, 간석기의 양이 증가하면서 농경과 관련된 석기류가 출토된다.

 집자리는 대부분 땅을 파고 들어간 움집이다. 초기에 속하는 집터로는 서포항의 경우 평면이 타원형 움집이나, 오산리에서는 발굴된 14기가 모두 평면형태가 원형 또는 타원형인 지상 집자리이다. 이는 유적이 가는 모래로 이루어진 모래 언덕이기 때문에 움집터 대신 점토를 다져서 지상가옥을 만든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강가나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으며, 평면형태가 방형 또는 원형을 이룬다. 이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암사동 취락지를 들 수 있는데, 대부분 장축이 5m, 깊이가 1m 내외인 방형 또는 원형의 움집들이다. 중기의 집자리는 서포항유적에서 확인되었는데, 전기와 뚜렷한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후기의 집자리는 이전에 비해 규모가 커져 서포항에서 확인된 당시의 집자리 중에는 장축이 7m가 넘는 장방형 집자리도 있다.

 무덤으로는 춘천 교동유적과 시도유적이 있는데, 교동유적은 동굴에 시신과 부장품을 안치한 것이고, 시도유적은 장축 1.65m의 타원형 돌무지무덤이다.

 신석기시대의 생활경제는 대부분의 유적이 강가나 해안가에 위치하고, 석기의 주종이 어구류라는 점에서 어로에 의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후기에 들어서면서 농경이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은 채집경제라 할 수 있으므로 필요한 탄수화물의 공급원으로는 도토리가 큰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실제로 도토리가 확인된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암사동·미사리·오산리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이 신석기문화는 주변 지역과의 긴밀한 교류관계를 보이고 있다. 이 중에서 서한첨저유형토기의 경우 범시베리아적인 공통 요소를 보이며, 한반도에서 번영하였던 이 토기문화는 일본 규슈(九州)의 소바다식토기의 성립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동한평저유형토기는 연해주의 토기와 관련성을 보이고 있다. 오산리하층의 토기는 중국 동북지역과의 관련성이 시사되며, 동삼동패총에서 출토된 덧무늬토기는 일본과의 관계 규명에 중요한 자료로서 주목된다. 동삼동에서는 소량이기는 하지만 일본의 죠몽토기 각종이 발견되어 일찍부터 양 지역 사이에 빈번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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