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1. 선사
  • 3) 청동기문화

3) 청동기문화

 일제시대에는 김해패총유적에서 청동기와 함께 철기, 석기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한국에는 청동기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즉 전국시대 말기에 중국으로부터의 이민들에 의해 청동과 철이 동시에 한국으로 유입된 것으로 보았던 것이고, 일본학자들은 이 시기를 청동기시대 대신에 금석병용기시대라고 설정하였다. 이런 용어는 해방 이후 얼마간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나 ‘금석병용기’는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아직 청동합금기술이 개발되지 못한 단계이기 때문에 자연동을 두드려 도구를 제작하던 순동시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순동제품이 출토되지 않는 한국에서 금석병용기란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에도 모순이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강계 공귀리, 의주 미송리유적을 비롯한 많은 유적이 발굴 조사됨에 따라 청동기시대의 문화 양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상한연대의 설정은 그리 용이하지 않은데, 한반도에서의 고고학적 자료의 성격 규명만이 아니라, 그것이 주변 지역의 청동기문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중국의 수원-요령지방, 나아가서는 시베리아 지역의 미누신스크 청동기문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안드로노보, 카라스크, 타가르기로 이어지는 미누신스크 청동기문화 중 기원전 1200∼700년의 카라스크문화는 몽골계의 농경문화로 청동단검·청동단추 등의 청동기가 대표적이며, 무덤으로는 돌널무덤을 사용하였다. 기원전 700∼200년의 타가르문화는 돌로 덮은 나무곽을 무덤으로 이용하였고, 기원전 4세기경에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청동문화는 기원전 7세기경에 이르러 수원 청동문화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周를 동천시키기까지 하면서 만주와 몽골 일대에 타가르-스키타이-오르도스계통의 북방 청동문화를 퍼뜨렸다.

 요령지방에는 일찍이 카라스크문화의 영향을 받아 비파형의 독특한 청동단검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가 번성하였다. 이 중 대표적 유적인 남산근유적에서 西周 말, 春秋 초의 청동기가 출토됨으로써 그 연대가 기원전 9∼8세기에 해당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반도 내에서 이러한 비파형의 요령식동검이 발견됨으로써 이 지역과 한반도와의 관련성뿐만 아니라 청동기시대의 상한설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위와 같이 한반도와 두 지역과의 관계를 고려해 볼 때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한국의 청동기시대는 대체로 기원전 10세기경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10세기경부터 청동기의 유입과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기원전 3세기에 접어들어 한국식동검이라 할 수 있는 세형동검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철기가 청동기를 대체해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를 기점으로 하여 기원전 10세기부터 4세기까지를 청동기시대, 기원전 3세기부터 원삼국시대가 시작되는 서력기원 전후까지를 초기 철기시대로 구분한다.

 청동기로는 비파형단검·부채형도끼·날개촉·손칼·거친무늬거울·장신구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비파형단검은 기원전 9∼8세기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검 하반부의 곡선이 점차 완만해지는데, 한반도 내에서 출토된 비파형단검은 약간 늦은 시기에 속한다. 부채도끼는 자루를 끼울 수 있는 자루투겁부가 있고 날 부분이 부채꼴처럼 넓어져 있으며, 단추의 경우 카라스크문화의 특징적인 청동기의 한 종류를 띠며 장신구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는 크게 한반도 서북지방에서 성행하였던 팽이형토기, 동북지방의 구멍무늬토기, 남한의 무문토기로 대별된다. 팽이형토기는 角形土器라고도 불리는데 바닥의 지름이 3∼4cm밖에 되지 않는 좁은 납작바닥이고, 아가리 부분은 밖으로 말린 이중이며, 동체부는 아가리 부분보다 부풀어 팽이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중으로 말린 아가리 부분에는 짧은 빗금이 새겨져 있고, 바탕흙에는 점토에 모래, 활석, 석면 등을 섞었다. 이상과 같은 특징으로 인하여 일반 무문토기와 쉽게 구별이 되는 팽이형토기는 분포지역도 청천강 이남, 한강 이북으로 국한되어 있다.

 구멍무늬토기는 한반도 동북지방의 특징적인 토기이면서 남한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토기로서 약간 외반된 아가리 부분에 구멍이 돌려져 있고, 입술 부분의 윗단에는 새김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이 외에도 동북지방에는 그릇의 두께가 얇고 그릇 표면을 간 다음 붉은 칠을 하거나 덧띠무늬와 음각무늬를 장식한 붉은 간토기가 출토된다.

 남한지역의 무문토기는 납작한 바닥의 화분형태를 기본으로 하고, 동북지방의 영향으로 아가리 부분에 구멍무늬로 장식된 것도 포함된다. 서북지방 팽이형토기의 변형으로서 형태는 화분형이면서 아가리부분이 이중이고 짧은 빗금이 장식된 것이 있으며, 붉은 칠을 하고 표면을 간 둥근 바닥의 긴 단지(紅陶)가 고인돌 등에서 집중 출토된다.

 석기는 신석기시대 이래로 계속 사용되던 갈판을 비롯하여 돌칼·화살촉·반달형 돌칼·돌도끼 등 다양한 종류의 간석기류가 있다. 간돌칼은 청동기시대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나타난 것으로 그 기원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며 형태는 대체로 손잡이가 부착되어 있는 단검으로 자루 중간에 홈장식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 돌칼은 종래에는 주로 고인돌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의기로 생각되어 왔지만 집자리에서 출토된 예도 많아져 실용기로서의 기능도 충분히 담당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화살촉은 신석기시대에 이미 출현하였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의 화살촉은 자루가 달리지 않은 것과 뗀화살촉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청동기시대가 되면 그 형태가 다양해지고 제작도 세련되어진다. 화살촉의 형태는 자루가 달린 것과 달리지 않은 것, 버들잎형으로 구분되는데, 대부분의 것은 실용성을 지니고 있지만 일부 무덤에서 출토된 것은 형태와 크기로 보아 부장용으로 제작된 것도 있다. 반달돌칼은 중국 신석기시대의 앙소·용산문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주로 이삭을 따는데 사용하는 수확용구이다. 반달돌칼은 장방형·빗·배·삼각형 등으로 그 형태가 다양하면서, 각기 지역적 분포를 보인다. 돌도끼 역시 그 형태와 기능이 매우 다양하다. 일반적인 원통형의 조개날도끼 외에도 목공구 또는 농경구로 생각되는 턱자귀나 홈자귀, 곤봉두인 바퀴날도끼·톱니날도끼 등이 있다.

 무덤으로는 돌널무덤과 고인돌이 있다. 돌널무덤은 지하에 판석이나 할석으로 매장부를 만들고 지상에는 봉토나 상석과 같은 뚜렷한 무덤 표식 시설이 없는 무덤이다. 청동기시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고인돌은 그 분포지역이 유럽, 근동지방, 인도, 동남아시아, 한국 등으로 인접한 중국이나 시베리아에서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남방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아직 논란의 여지가 많은 상태이다. 극동지방의 경우 한국이 분포권의 중심이 되는 이 고인돌은 탁자식·기반식·개석식 등으로 구분된다. 탁자식은 매장부가 지상에 놓여 석실의 벽이 고임돌의 역할까지 하는 것으로 주로 북한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므로 북방식으로도 불리고 있다. 기반식은 지상에 고임돌의 역할을 하는 괴석이 따로 설치되고 분포지역도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남방식이라고도 불린다. 개석식은 변형 고인돌이라고도 불리는데, 고임돌이 따로 없이 지상의 대형돌이 매장부의 뚜껑 역할까지 하고 있으며, 남한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면서도 북한에도 다수 분포되어 있다.

 기원전 3세기경에 들어서면 새로이 철기가 보급되면서 실용화되고 청동기는 의기화되는 초기철기시대가 시작된다. 초기철기시대의 청동기로는 세형동검·잔무늬거울, 다양한 형태의 차마구류·공구류·무기류가 있다. 이 중에서 세형동검은 비파형단검이 한국화된 것으로 중간의 돌기부가 더 아래 쪽으로 내려오고 검 하반부의 폭이 좁아져 가늘고 긴 형태를 띠고 있다. 잔무늬거울은 전기의 거친무늬거울이 발전된 것으로 동심원문, 사선으로 채워진 삼각문 등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토기는 청동기시대에 뚜렷하던 지역적 특성들이 점차 약해지면서 새로이 검은 간토기와 함께 덧띠토기가 출현한다. 이 중에서 후자는 원통형에 가까운 몸체의 아가리부분에 점토를 말아 붙인 것으로 후기의 특징적인 토기이다. 석기는 간돌칼·반달돌칼·유구석부 등이 계속 사용되기는 하지만 전기의 다양한 석기들은 점차 퇴화하거나 소멸해가면서 철기가 이를 대체한다.

 무덤은 고인돌이 점차 소멸되면서 새로운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널무덤이 출현한다. 초기철기시대의 다양한 수레부속구는 대체로 이들 널무덤에서 출토된다.

 청동기시대의 주거 양식은 움집으로서 대체로 강을 바라보는 얕은 구릉지대에 분포되어 있고, 집자리의 면적도 다소 확대되는 현상을 보이는데, 이와 함께 반달돌칼·괭이·홈자귀 등의 출토유물을 통해 당시의 경제력이 강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경기도 흔암리에서는 쌀·보리·조·수수가, 충남 송국리에서는 쌀이, 신석기 후기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친 유적인 평양 남경유적에서는 쌀·조·콩·기장·수수 등이 탄화된 상태로 출토되었고, 볍씨자국이 찍힌 토기가 경남 대평리, 전북 소산리, 경남 강루리 등에서 출토되었다. 청동기에는 따비로 밭을 갈고 괭이로 땅을 파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양상 등을 통해 볼 때 청동기시대의 경제적 측면은 농경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남 울주 반구대의 암각화는 당시 예술활동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데, 수렵과 어로의 생활 모습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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