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1. 선사
  • 5) 한국 농경문화의 기원-쌀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5) 한국 농경문화의 기원-쌀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한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농경문화를 유지해왔다. 애초에 우리 선조들이 무엇을 먹고 살았는가, 먹을 것으로서 맨 처음 무엇을 심기 시작했는가 라는 것은 흥미로운 문제이다. 현재까지 약 300여 종의 작물을 심고 가꾸어 왔지만 그 가운데 기본이 되는 것은 역시 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성행하고 발달한 원인과 자연 조건이 벼농사에 알맞았는가의 여부, 어떤 경로를 통해 볍씨가 들어왔는가 등 볍씨 전래 문제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구석기시대에는 사냥, 고기잡이, 조개줍기, 초목의 채취 등으로 식량을 얻었다. 구석기시대인들은 식량을 얻는데 항상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식량의 부족이란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그 해결책으로 농경을 개발하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하면 농경을 제외하고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지역에 따라서는 환경 조건이 맞지 않아서 농경 생활은 하지 않았으나 간석기나 토기와 같은 신석기시대의 문화요소가 나타나고 정착생활을 한 지역이 있다. 이와 같이 농경은 행하지 않았으나 정착 생활을 하고 간석기를 만들어 쓴 분명한 신석기적인 요소를 보이는 곳이 한국을 포함한 일본, 시베리아지역이다. 이러한 극동아시아의 신석기시대는 농경을 전제로 하지 않더라도 나름대로의 신석기문화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신석기시대는 수렵과 채집, 어로를 중심으로 한 수렵채집경제를 그대로 이어왔으며, 중요한 식물자료로서는 도토리가 주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 전반에 걸쳐 농경이 행해진 것은 아니며, 신석기시대 후기에 와서 그 흔적이 나타난다. 그 예로 황해도 지탑리유적에서는 유일하게 재배곡물이라고 생각되는 식물이 나왔는데, 벼는 아니고 조나 피로 보인다. 평남 궁산리유적에서는 곡물 자체는 나오지 않았지만 돌괭이와 수확도구로 쓰였던 농경구가 쏟아져 나왔다. 이를 보면 궁산리유적과 지탑리유적을 잇는 한반도 서북부 서해안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 말기인 기원전 2000년경부터 원시 농경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한반도의 신석기시대도 그 초기부터 농경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다는 주장을 한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러한 주장은 출토 유물 중에 원시 맷돌과 돌도끼가 나온 것을 근거로, 그것들이 농경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원시 맷돌은 말안장 모양의 갈판과 갈돌이 한 조를 이룬 것으로 이런 형태의 유물은 이란과 이라크 등 서남아시아의 신석기유적에서도 출토되는데, 보리나 밀의 껍질을 까는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도 그 용도가 같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것을 농경의 방증 자료로 보고, 커다란 돌도끼 또한 농경에 사용된 하나의 도구로 보아 신석기시대 전기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일부 있다. 이러한 주장은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신석기시대의 유물 중에서 앞서 말한 두 종류의 석기만을 예로 농경의 존재를 주장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 않은데, 신석기시대의 수많은 도구 중에서 단지 두 종류만 뽑아서 다양한 석기의 용도 중 농경에 사용되었을 가능성만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소극적인 자료에 의한 미약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신석기시대는 수렵·채집·어로생활에 기반을 두었지만 말기에 가서 농경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본격적인 농경으로의 전환은 무문토기 사용 단계인 청동기시대이며 이 때의 농경은 벼농사에 보리·조·수수 등이 병행되었을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한민족이 처음 식량으로 삼은 곡류는 쌀이 아니라 조·피·기장 등의 잡곡이다. 그 후 쌀이 선택되어 수도작이 시작되고 이것이 한반도 전역에 보급되어 벼농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수도작은 비가 많이 오는 지역에서 이루어진다. 세계의 농경지 분포를 보면 250mm 이하 되는 지대는 거의 없고, 500∼1000mm 정도의 지대면 밀과 보리가 80% 이상 재배되며, 1000∼1200mm의 비가 내리는 지대가 벼의 재배에 알맞다. 따라서 벼농사의 발상지로 생각되는 곳도 강우량이 많은 곳으로 보고 있으며 하천을 끼고 있어서 비교적 물이 풍부한 지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벼농사의 기원과 발생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고 고고학자와 농학자가 보는 견해가 조금씩 다르다. 고고학자가 보는 입장은 杭州 근처의 河姆渡 유적을 발견했더니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발견되었는데 그 연대가 기원전 4955±15년이므로 기원전 5000년, 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으로 올라간다.

 양자강하류 즉 하모도유적이 있는 太湖지구 주변에서는 야생종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벼농사 중심지의 하나로 보는 견해가 강하게 대두된다. 이제까지 중국의 볍씨가 발견된 50개의 유적의 절대연대를 보면, 양자강하류에서 북으로 올라갈수록 후대의 것이 많다. 그 대부분이 지금으로부터 약 4000∼5000년 전의 것이 많고 벼가 풍성하게 재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볼 때 벼농사가 남쪽에서 발생했으며 발상지의 한 곳이 태호지구라고 추정할 수 있다.

 하모도지역에서는 기원전 5000년의 문화로부터 시작하여 기원전 5000∼4000년 사이의 양자문화 등이 계속되어 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부터 4000년 전까지 영속적인 문화를 배경으로 한 문화가 이어져 내려왔다. 이런 의미에서 고고학자들은 태호지구를 벼농사의 기원지 중 하나로 중요시하고 있다. 반면 농학자들은 야생종을 총망라하고 있고 기후 조건이 알맞은 인도의 아삼 벵골만 벨트지역을 기원지로 보는 견해가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벼는 이 화남지역으로부터 파급된 것이 한반도로 들어왔을 것인데, 그 전파 경로는 크게 세 가지 루트가 상정된다. 첫째는 북로(북방)설인데 인도의 아삼과 운남성 일대에서 북상하여 하모도가 있는 양자강 하류 지역에서 다시 북상하여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를 통하여 육로를 통해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하는 견해이다. 둘째는 황해를 곧바로 건너 들어왔다는 황해횡단설이다. 중국의 양자강 하류에서 쌀과 수확 도구인 배 모양의 반달칼이 나왔다. 그것들은 한반도 서해안에서 나온 유물들과 아주 흡사해서 황해횡단설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중국의 사회과학원 안지민은 기원전 10세기경에 한국과 일본으로 동시에 벼농사가 전래됐다고 주장하는데 불행하게도 그렇게 오래된 시기의 유적이 일본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가설 자체에 머문 채 학자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셋째는 남방설이다. 인도의 아삼과 중국의 운남성 지역에서 타이를 거쳐서 오키나와를 지나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방증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 설의 성립을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벼 전래는 북로설이 가장 유력하지만 황해횡단설도 유력한 가설로 남아 있다. 우리 학계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연구가 미약한 편이다.

 1936년까지만 해도 김해패총에서 나온 탄화미가 1세기경의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기원전 3세기의 쌀이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의 쌀은 일본에서 유입됐다는 설마저 대두되고 있었다. 당시까지 한국에서는 많은 유적을 발굴하고도 농경에 관련된 자료들이 나오지 않아 자료의 빈곤은 북로설을 주장한 학자들을 수세에 몰리게끔 한 것이었다. 지난 1972년부터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 야산에 있는 청동기시대유적을 연차적으로 발굴조사하여 온 필자는 1975년과 1976년에 흔암리유적발굴에서 미세자료를 찾아내는 방법을 응용했다. 채집한 흙을 가는 눈금이 있는 그물에 거르는 방법인 부유법으로 많은 곡물 자료를 얻었다. 흔암리의 시료를 연대측정한 결과 기원전 13세기, 10세기경, 7세기경 등으로 측정되었고, 이에 따르면 한반도의 벼농사는 기원전 10세기경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흔암리의 발굴 결과로 인해 수세에 몰렸던 북로설의 입장이 많은 지지를 얻게 되었다.

 흔암리유적 발굴 5년 뒤에 평양에서 남경유적이 발굴조사되어 농경관계에 중요 자료들이 제시되었다. 36호 주거지에서는 탄화미 250여 개와 보리·조·수수·기장 등이 출토되었으며, 그 내용이나 연대는 흔암리와 비슷하다. 충남 부여군 조천면 송국리유적에서는 잡곡류는 나오지 않았으나 탄화미가 300g 정도 나왔는데 기원전 6∼5세기경으로 밝혀졌다. 일본학자들은 이 같은 결과를 보고 흔암리유적과 남경유적에서는 논농사가 아니고, 송국리유적에서부터 논농사가 시작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청동기시대는 신석기시대 채집경제에서 식량생산 경제로의 급격한 전환이 일어난 시대였다. 이때부터 안정된 생활, 정착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큰 혁명이었다. 농사를 짓기 위해 지도력이 필요했고 관개사업도 벌여야했기 때문에 자연히 정치적인 힘도 생겨났다.

 이상에서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로서 벼농사와 관련한 농경의 제반문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직은 농경의 기원에 대한 확고한 설명을 하기에는 자료가 불충분하므로 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자료의 축적과 함께 주변 국가와의 연계 연구가 절실히 요구된다.

<任孝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