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2. 고대
  • 1) 국가의 성립과 발전
  • (1) 고조선의 형성

(1) 고조선의 형성

 고대의 개시를 알리는 가장 보편적인 징표를 찾는다면 그것은 국가의 성립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는 원시사회에서 진행된 일련의 변화 발전의 總和로 등장하였으며, 국가의 성립은 전시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사회가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한국고대사의 특징적인 일면도 국가의 형성과 발전의 과정을 통해 구체화되어졌다.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던 국가로는 일단 먼저 고조선이 상정되어진다. 전근대 시기 한국사의 서술은 고조선을 기원으로 하는 일원적인 역사체계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 이래로 칠백여 년간 유지되어왔던 이 역사체계는 근대에 들어서면서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한편에선 고조선의 실재 자체를 부정하였고, 다른 한편에선 거대한 제국으로서의 고조선상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일제시기 고조선사 연구는 식민주의사학과 민족주의사학이 맞부딪치는, 이어 마르크시즘사학도 이에 가세한 첨예한 이념적 대결의 장이 되었다.

 해방 후 남북한 사학계 모두에서 합리적인 고조선사의 정립은 시급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일제하에서 파행적으로 전개되었던 혼란스런 역사 이해를 정리하고 한국사의 여명기의 역사상을 밝혀 민족의 정체성 확립을 도모한다는 측면에서, 고조선사 연구에 큰 의미가 부여되었던 바이다. 나아가 이는 전통사서에 개진된 상고사 체계를 개항 이후 수용한 근대적 학문 방법론을 구사해 새로운 형태로 재정립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런데 해방 이후 제기되었던 고조선사에 대한 각양의 논의를 보면, 여전히 상이한 역사인식이 교차하는 면을 나타내었고, 고조선이 언제 어느 지역에서 처음 등장하였으며 그 정치체로서의 성격이 어떠한가를 둘러싸고 큰 견해의 차이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고조선사의 면모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고, 연구자들 간의 견해의 차이가 좁혀지는 부분도 늘어가고 있다.

 먼저 고조선이란 실체가 언제 역사상에 등장하였던가에 대해선 이른바 ‘단군릉’으로 상징되어지는 5천년전 설이 일각에서 주장되고 있지만, 빨라도 기원전 10세기 전후 무렵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에서 청동기 문화, 보다 직접적으로는 비파형동검문화의 성립 시기가 기원전 10세기 전후 무렵이라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국가의 성립은 청동기문화와 농업경제가 어느 정도 성숙해진 단계에 들어서야 비로소 가능하였다. 이런 면은 한국사의 경우에도 예외일 수는 없다. 구체적으로 ‘조선’이란 실체가 문헌상에서 확인되어지는 시기는 기원전 4세기이다.≪史記≫와≪戰國策≫에서 언급한 조선에 관한 기록이 그것이다.191)≪戰國策≫권 29, 燕策 1.
≪史記≫蘇秦傳.
물론 이는 고조선의 실체가 북중국 사람들에게 알려진 시기가 늦어도 그러하다는 것일 뿐이다. 실제 고조선이 등장한 것은 그보다 이른 시기일 수 있다.≪管子≫輕重甲篇의 기사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관자≫에서 언급한 齊와 조선과의 교역에 관한 기록은, 이 책 자체가 중국의 전국시대(B.C. 403∼B.C. 221)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기원전 7세기 사람 管仲에 가탁하여 기술한 것이므로,192)≪管子≫경중갑편의 저술시기에 관한 諸論議는 金谷 治,<管子 輕重甲篇の 成立>(≪東洋史硏究≫43-1, 1984) 참조. 어느 때의 상황을 기술한 것인지를 단정키 어렵다. 하지만≪관자≫가 비록 후대에 기술되었지만 그에서 사용된 자료는 그 전부터 내려오던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배제키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다. 따라서 더 이상의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그 가능성에 대한 검토는 고조선 지역의 유적 유물에 관한 고찰을 통해서 접근해볼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곧 고조선 중심지 위치에 관한 논쟁과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한 여러 설들 중, 시종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령성 지역에 있었다는 설은 부정되어진다. 적어도 기원전 3세기 초 북중국의 연나라가 동으로 침공해와 청천강을 경계로 삼은 이후에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 지역이었으며, 위만조선의 왕험성을 공략하고 설치한 낙랑군 조선현은 지금의 평양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이전은 어떠하였던가가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해선 초기에는 중심지가 요하유역이었다가 기원전 3세기 초 이후 그 중심지를 평양지역으로 옮기게 되었다는 이동설과, 평양 지역이 시종 중심지였다는 재평양설이 각각 견지되고 있다.

 한편 비파형동검문화 분포지와 고조선과의 관계에 대해, 전자를 모두 고조선의 세력권으로 보는 견해가 일찍이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비파형동검문화 분포지 내의 각 지역별 특성에 대한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그러한 시각은 부정되어졌다. 가령 비파형동검문화 분포지 내에서 내몽고 영성현 등 努魯兒虎산맥 이북지역에선 남산근 유적이나 소흑석구 유적에서 보듯 비파형동검문화 외에도 오르도스식 청동검이 많이 출토되고 또 한면으로는 북중국 방면의 商·周 청동기 문화의 영향도 강하게 보인다. 여러 갈래의 청동기문화가 착종하는 면모를 나타내며, 생활상에서도 농업과 함께 목축의 비중이 상당하였던 것 같다. 그에 비해 동으로 요하 하류지역으로 올수록 그런 면이 약해진다. 특히 요하를 경계로 그 동·서 지역간의 문화적 차이가 주목되어 왔다. 요하 이동지역은 비파형 동검의 여러 양식 중 短莖式 동검만 출토되어지고 요서지역과 내몽고 동부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는 鞏柄式이나 匕首式은 출토되지 않는다.193)靳楓毅,<論於中國東北地區含曲刃靑銅短劍的文化遺存>(≪考古學報≫1982年 4期, 1983年 1期). 토기 양식에서도 미송리형 토기는 요하 이동지역에서만 출토되고 반면에 요서 지역에서 널리 출토되는 삼족기는 요동지역에선 별로 출토되지 않으며,194)김용간·황기덕,<기원전 천년기 전반기의 고조선 문화>(≪력사과학≫67-2).
<고조선 문화의 특성과 그 발전>(≪고조선문제 연구론문집≫, 최택선·이난우 편집, 1976).
지석묘도 요하 선을 경계로 그 이동 지역에서만 확인되는 등 차이가 있음이 확인되어졌다. 특히 요동반도의 해성·개주 등지의 대형 탁자식 지석묘는 대동강 유역의 그것과 흡사한 모습을 지녔다. 그리고 서북한 지역의 지석묘에선 팽이형토기가 출토되는데, 요동의 지석묘가 있는 곳에서도 팽이형 토기와 유사한 계통의 그릇이 보인다. 일부 지석묘에서 아가리를 이중으로 겹싸 넘긴 甕이나 罐이 세트로 나오고 있으며 신금현의 당산 肇工街나 쌍타자 유적에서 나온 토기의 겹아가리에선 대동강 유역 팽이형토기의 구연부 수법과 매우 유사한 ‘彡’ 모양의 빗금 문양이 보이고 있고,195)송호정,<고조선 중심지 및 사회 성격의 연구의 쟁점과 과제>(≪韓國古代史論叢≫10, 2000). 변형 팽이형토기인 겹아가리 긴 목 항아리도 평안북도 용천 신암리 유적 등지에서 미송리형토기와 함께 출토되어져,196)尹武柄,<無文土器 型式分類 試攷>(≪震檀學報≫39, 1975). 美松里型土器 문화와 청천강 이남 지역 팽이형토기 문화간의 친연성이 보인다.

 한편 요동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에 대해 이를 고조선의 문화로 여기거나,197)황기덕,<비파형단검문화의 미송리유형>(≪력사과학≫89-3, 1989).
―――,<고조선국가의 기원>(≪고고민속론문집≫12, 1990).
노태돈,<고조선 중심지의 변천에 관한 연구>(≪한국사론≫, 1900:≪단군과 고조선사≫, 2000).
이를 고조선 문화로는 여기지 않고 맥198)鄭漢德,<美松里型土器の形成>(≪東北アジアの考古學(天池)≫, 1990), 87∼138쪽. 또는 예맥의 문화로 간주하는 견해가 견지되고 있다.199)宋鎬晸,≪古朝鮮 國家形成過程 硏究≫(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9). 고조선의 등장 시기나 그 초기 중심지 논의와 직결된 이 문제는 앞으로 요령성 지역과 서북한 지역의 청동기문화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고조선의 정치체로서의 성격은 그나마 약간의 기록이 남겨져 전하는 위만조선의 경우를 먼저 살핀 후 거슬러 추정해보자. 위만조선의 정치체제에서 주목되는 면은 왕 아래에 복수의 相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들 상은 단순한 왕의 관료가 아니라, 휘하에 자신의 집단을 거느리고 있던 자들이다. 이들 집단은 왕권에 의해 일정한 통제를 받지만, 그 내부의 일에 대해선 상당한 자치력을 지니고 있었다. 위만조선을 이끌어 나간 중심세력은 왕에 직속된 집단과 그리고 상으로 대표되는 자치 집단들로 구성되었고, 그 외곽에 진번·임둔 등의 피복속 집단들이 예속되어 있다. 중앙에 공납을 바치는 이들 피복속 읍락들도 그 내부의 일에 관해서 자치를 영위하였다. 위만조선의 국가구조는 이런 각급 자치체들을 연합한 형태를 지녔다. 자연 그 국가운영도 왕과 상들이 참여하는 회의체가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는 삼국 초기의 부체제와 유사함을 보여, 그 조기 형태로 상정되어지는 바이다.200)노태돈,<위만조선의 정치구조-관명 분석을 중심으로->(≪汕耘史學≫8, 1998:≪단군과 고조선사≫, 2000). 삼국 초기의 부체제는 이후 삼국시대가 진전되면서 점차 중앙집권적인 영역국가체제로 발전해 나갔다. 이러한 국가체제의 진전 과정을 역으로 추론해보면, 거슬러 시대를 올라갈수록 그 정치체제는 중앙집권력과 왕권이 미약한 그러한 형태였을 것임을 능히 상정할 수 있게 한다, 즉 위만의 정변이 있기 이전의 후기 고조선은 위만조선의 그것에 비해 집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형태의 유사한 정치체제가 상정되어진다. 일단 후기 고조선까지는 초기 고대국가의 범주로 설정할 수 있겠으나, 기원전 3세기 초 이전의 전기 고조선의 정치체로서의 성격은 추정키 어렵다. 이는 무엇보다 그 중심 지역이 확실한 유적 유물을 통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논의를 통해 고조선의 실재는, 그 처음 등장 시기나 정치체로서의 성격 규정 문제는 계속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있지만, 확인되어졌다. 나아가 고조선이 비파형동검문화-세형동검문화로 이어지는 문화에 바탕을 두었으며, 곰 숭배 제의와 같은 동북아 지역의 문화전통이 그 건국신화에 반영되어 있음이 논해졌다.201)곰을 조상신으로 여기는 토템신앙은 수렵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는 문화요소로서 시베리아에 거주하던 소박한 사회 단계의 족속인 퉁크스족이나 고아시아족 사이에 널리 보이며, 특히 흑룡강 유역에 살던 퉁구스족의 그것과 단군신화는 유사한 면을 지녔다(大林太郞,<朝鮮の檀君神話とツグス族の熊祖神話>,≪東アジアの王權神話≫, 1984, 374∼375쪽). 단군신화에는 환웅 등의 천신이 거주하는 神界와 곰이나 호랑이로 대표되는 자연계 및 인간계가 서로 교류하여 이상적인 조화의 세계를 추구하며, 여러 세계와의 교류에 산(태백산)과 宇宙木인 신단수 같은 매개체가 등장하는 등 샤머니즘 문화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이러 점들은 단군신화에 시베리아나 북동부 만주 지역과 연결되는 계통의 문화요소가 반영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세가 본격적으로 동진하여 오기 전에 고조선이 존재하였고, 그 청동기문화가 북중국의 商·周계통의 그것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닌 것이었음을 말한다. 이 면은 한국어의 특성과 함께, 한반도와 중남부 만주 지역의 주민이 중국 문물의 압도적인 영향이 미쳐온 뒤에도 그 개성적인 성격을 유지하며 이은 시기의 역사를 영위해나갈 수 있게 한 주요한 토대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 한반도와 남만주의 청동기 문화를 독자적 성격의 것이라고 또는 북방계라고 일반화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즉 이른 시기부터 요서지역과 북중국 방면으로부터의 영향이 컸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202)李亨求,<靑銅器문화의 비교(중국과의 비교)>(≪韓國史論≫13, 국사편찬위원회, 1983).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이 진전되면서 요령성 지역 청동기문화가 다원적인 성격을 지닌 면이 들어나고 있어, 이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한 바이다. 아울러 한국문화의 기원에 북중국 방면의 문화가 끼친 영향의 상징으로 언급되었던 이른바 ‘기자조선’ 문제도 다시 한번 논의되어야 할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한편 북중국 방면으로부터의 문화적 영향은 기원전 3세기 초 연의 군사적 공격으로 남만주 지역과 청천강 이북 지역이 그 영토가 되면서 본격화되었다. 나아가 기원전 2세기 초 북중국 방면으로부터 흘러온 유이민 위만이 고조선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이민과 토착민의 연합정권적인 성격을 지닌 위만조선은 중국의 철기문화를 수용하여, 급속한 팽창을 해나갔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동진하는 한제국의 세력과 충돌하게 되었다. 위만조선과 흉노의 연결을 차단하고 동북아시아 방면을 제패하기 위한 한제국의 침공은 기원전 108년 왕험성의 함락과 낙랑군 등의 설치로 종결되었다. 이에 동북아 지역에서 가장 일찍 국가를 형성하였던 고조선은 멸망하고, 평양 일대에 설치된 중국 군현은 그 뒤 400여 년 지속하였다. 이에 동북아 지역에서 가장 선진적이었던 고조선사회는 더 이상 동심원적인 확대발전이 저지되었다. 이은 시기에 예·맥·한족 사회에서 대두한 국가들은 고조선 사회의 바깥에서 등장하였으니, 삼국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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