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2. 고대
  • 1) 국가의 성립과 발전
  • (2) 삼국의 성립과 발전

(2) 삼국의 성립과 발전

 한 군현은 설치된 뒤 얼마 안 있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기원전 75년 맥족의 저항으로 현토군이 퇴축되었고, 소로집단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연맹체가 태동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75년 이후에도 한제국은 일단 직접 지배 방책은 포기하였으나, 간접통제정책을 구사해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고구려사회에 미쳤다.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여러 지역집단(那)과 각각으로 외교 무역관계를 맺어 이들을 회유하고 분열시켰으며, 때로는 무력 간섭을 감행하여, 고구려 사회 내부에서 강력한 단일 통합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당시 중국 군현 세력은 고구려의 정치적 성장을 억제하는 작용을 하였다. 그런데 또 한 면에선 한 군현과의 교역과 교류를 통해 한의 철기문화가 수용되어졌다. 집안 등지에서 출토된 漢式 철제 농기구와 오수전과 같은 한의 화폐 등은203)古兵,<吉林省集安歷年出土的錢幣>(≪考古≫, 1962年 2期). 그런 일면을 전해준다. 새롭게 수용한 선진 철기문화는 고구려사회의 성장을 촉진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당시 태동하던 고구려 연맹체는 한편으로는 한의 분열 기미정책에 저항하고 다른 일면으로는 한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국가의 형성을 지향하였다. 기원 전후 무렵 소로집단을 대신해 주몽이 이끄는 계루집단이 연맹체를 주도하는 고구려가 성립하였다. 이어 1세기 중반 이후 장기간의 내분을 거처 1세기 말 태조왕 때 강한 통합력을 갖춘 국가가 확립되었고, 대외적인 팽창이 본격화되었다.

 한편 백제의 경우, 문헌에서 전하는 바처럼 부여-고구려계 유이민 집단에 의해 건국되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성립 시기에 관한≪삼국사기≫백제본기 초기 기사는≪삼국지≫위서 동이전에서 전하는 상황과 상치되는 면을 보여, 역사적 사실로 그대로 인정키는 어렵다. 근래 한성시기 백제의 도읍지로 확실시되는 서울의 풍납동 토성이 언제 축조된 것인지가 주목되고 있다. 이 성은 둘레가 3.5㎞이고 높이가 약 8m에 달하는 대형 토성이다. 토성과 성 내의 여러 곳에서 출토된 목재와 목탄 자료를 이용한 몇 차례의 탄소연대측정 결과, 그 연대가 이른 경우는 기원전 1세기로 산출되기도 하였다. 만약 그것을 따른다면 백제의 건국은≪삼국사기≫의 기사를 그대로 신뢰하여도 무방한 것이 된다. 그러나 몇 차례 행한 탄소연대측정의 수치들이 2백년 이상의 큰 폭의 차이를 내면서 각각 다르게 나와서, 그것을 통해 토성 축조의 연대를 추정키는 어려운 형편이다. 그런데 성안에서 삼중 環濠가 둘러친 취락이 발굴되었는데, 이 환호가 폐기되고 토성이 축조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환호 내부에서 타날문토기·심발형토기·긴 달걀모양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이를 볼 때 토성의 축조 시기의 상한은 3세기 중반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풍납토성지에서 서진의 전문토기가 대량 출토되었다는 것은 이 곳에 근거지를 두고 서진과의 교섭을 주도하던 정치체의 존재를 말해준다.204)朴淳發,≪漢城百濟의 誕生≫(2001), 179∼183쪽.

 이러한 고고학적 자료와, 3세기 중엽 마한 臣智205)≪三國志≫東夷傳 韓條.와 대방군 간의 그리고 백제와 낙랑군 간의206)≪三國史記≫권 24, 백제본기 2, 고이왕 12년조. 무력 충돌을 전하는 등의 문헌 기록을 고려할 때 3세기 후반에 백제가 국가로 성립하였음을 추정해볼 수 있겠다. 이후 4세기 대에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으로, 남으로는 반도의 서남부 지역으로 그 세력을 확대하면서 성장해나갔다. 단 3세기 중반 이전 시기의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다.

 신라의 경우,≪삼국사기≫에선 기원전 1세기 중엽에 국가로 성립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의 사실성에 대해선 논란이 이어져왔다.≪삼국지≫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2세기 후반 3세기 초까지도 사로국은 진한의 한 소국이었을 뿐이며 그 존재가 특기되지 않았다. 기원 전후 무렵 경주 일원에 토광목관묘가 조영되었다. 이들 토광목관묘와 그 출토 유물의 양식은 서북한 지역 고조선의 그것에서 유래하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조선 유민이 내려와 신라를 건국하였다는≪삼국사기≫의 기록은 적어도 그 문화계통 면에선 일정한 객관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토광목관묘가 국가 성립 단계의 상황을 반영하느냐는 의문이다.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초로 그 연대가 추정되는 토광목관묘인 경주 사라리 130호 경우 우수한 유물을 부장하였으나, 같은 무덤떼 내의 다른 무덤에 비해 무덤 입지상의 구분이 없으며, 같은 무덤떼 내에서 동질의 우수한 부장품을 담은 1급 무덤이 더 이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런 면은 이 무덤떼를 남긴 집단의 사회와 문화가 계속 확대 재생산을 해나가, 대내적으로 안정성을 지닌 지배계급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대외적으로는 이 곳이 연속성을 지닌 지역 세력의 중심지로 발전해나가는 그런 형태의 진전을 이룩하지는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무덤떼 내에서 대형 무덤과 소형 무덤 간에 무덤의 입지에서 차이를 나타내게 된 것은 2세기 후반 이후 조양동 3호분과 같은 유의 목곽묘가 축조되는 단계에 들어선 뒤였다.207)崔秉鉉,<新羅의 成長과 新羅 古墳文化의 展開>(≪韓國古代史硏究≫4, 1991). 이들 목곽묘에는 더 이상 청동기는 보이지 않고 철기 유물만 부장되었다, 3세기 말 4세기 초의 구정동 고분의 경우, 다량의 쇠창과 단갑을 부장하였다. 성장해가던 이사금시기의 사로국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경주지역의 고분이 여타 영남 지역의 고분과 현격한 차이를 들어내며 우월한 모습을 들어낸 것은 4세기 후반 적석목곽분이 출현한 이후부터이다. 적석목곽분이 조영되던 중심 연대는 마립간시기로서 이 시기에 신라는 영남지역의 여타 세력들을 정치 군사적으로 압도하며 급속한 성장을 해나갔다.

 한편 신라의 등장과 발전 과정을≪삼국사기≫신라본기와≪삼국유사≫에 기술된 그 수장의 칭호의 변화를 통해 살펴보면, 그것은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왕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 중 그 어원이 불분명한 거서간은 차차웅과 같은 단계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208)남해거서간을 남해차차웅이라고도 하였다(≪三國遺事≫권 1, 南解王條). 이런 임금 칭호의 변화는 토광목관묘-토광목곽묘-적석목곽묘-석실봉토분으로 이어지는 경주 평야의 무덤양식의 변화와 상관관계를 설정해볼 수 있는 면이 있다.209)崔秉鉉, 앞의 글. 물론 문헌기록의 기년과 무덤 편년 사이에선 괴리가 있지만, 양자가 대체적인 사로국의 성장 단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측면에선 부합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구체적인 신라국의 성립 시기에 대해선 백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삼국사기≫의 기사를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앞으로 고고학적 발굴의 진전과 그리고 국가형성과정에 대한 이론적 검토를 통해 계속 논의되어야 할 사항이다.

 이렇듯 삼국은 고조선사회의 바깥에서 각각 상당한 시차를 두고 등장하였고, 발흥 지역이 상호 떨어져 있었으며, 성립기의 주변 상황도 서로 다른 면을 지녔다. 삼국이 국경을 접하면서 실제적인 상호 접촉을 하게 된 것은 4세기 후반 이후부터였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삼국은 그 초기의 문화에선 상호 공통성에 못지 않게 각각의 개성적인 성격을 짙게 지녔다. 가령 묘제의 경우를 보면,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의 전통적인 적석총 양식을 5세기 초까지 계속 사용하였다. 경주 지역의 경우, 앞서 언급하였듯이 토광목관묘-토광목곽묘에 이어, 4세기 후반 이후 적석목곽묘를 사용하여 소백산맥 이남의 여타 지역의 그것과도 다른 독특한 면모를 나타내었다. 백제의 경우는 서울 지역에서 여러 양식의 묘제가 사용되어 보다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그 뒤 5, 6세기가 지나면서 삼국 모두에서 그 지배층의 묘제는 돌방흙무덤으로 단일화되어 갔다. 대가야와 영산강 유역의 묘제도 그렇게 되어 갔다.

 그런데 이처럼 삼국은 그 성립시기와 발전 과정에서 상호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만, 정치체제에선 일정한 공분모를 지녔다. 구체적으로 먼저 고구려의 경우를 보면, 대체로 3세기대까지는 5부가 중심이 된 정치체제였다. 고구려 초기의 5부는 4세기 이후 시기의 그것과 같은 수도의 행정구역 단위는 아니었다. 5부의 전신은 那였다. 나는 川과 같은 말로서, 압록강 중류 지역 일대에 있는 여러 작은 하천변에 생성된 지역집단으로서 부족이나 시원적인 소국이었다. 이들 다수의 ‘나’들이 상호 통합과정을 거쳐 다섯이 되었고, 그 중 가장 유력한 계루집단에 의해 여타 집단의 자치력의 일부가 통제되어져 部가 되었던 것이다. 5부는 계루부 왕권에 의해 대외교섭권 등을 박탈당하였지만, 부의 내부 사항에 대해선 상당한 자치력을 지닌 단위정치체였다. 각 ‘부’의 大加들은 왕족 대가들과 함께 회의체를 구성하여 이를 통해 국정의 운영에 참가하였다. 왕은 초월적인 권력자라기 보다 이들 대가들의 대표와 같은 성격을 지녔다. 한편 고구려 국가구조에서 보면 5부는 지배족단의 위치에 있었다. 당시 고구려국에는 5부 외에 피복속 종족들이 귀속되어 있었다. 이들 피복속 집단은 5부와는 차별되었다.≪삼국지≫위서 동이전에서 보듯이, 고구려라고 하였을 때는 5부만을 뜻하고, 피복속 집단은 동예·옥저 등 각각의 종족 명으로 지칭되었다. 그런데 옥저·동예 등의 피복속 종족들은 읍락 별로 고구려에 예속되어 공납을 바쳤고, 읍락 내부의 일은 자치에 맡겨져 그 수장을 통해 간접 지배되었다. 3세기 무렵까지의 고구려국은 각종 자치체들을 그 정치적 위상에 따라 누층적으로 편제한 자치체의 연합체와 같은 성격을 지녔다, 이와 같은 정치체제를 나타내게 된 근본적인 동인은 당시까지도 작용하고 있던 읍락의 공동체적인 성격에 있었다.210)노태돈,≪고구려사연구≫(2000), 135∼149쪽.

 이와 같은 초기고대국가의 정치체제는 3세기 말 4세기 초 이후 점차 해체되어졌다. 왕권과 중앙집권력이 강화됨에 따라, 각급 자치체들은 해체되어지고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가 구축되어 나갔다. 그런 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고구려의 경우, 초기의 고유한 명칭을 가진 5부의 소멸과 方位名 5부의 등장이다. 각급 자치체들이 해체됨에 따라 기존의 加들은 중앙귀족으로 전신하여 수도에 집중해서 거주케 되었는데, 방위명 5부는 수도를 구획하여 만든 행정구역단위이며, 귀족의 原籍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고구려 초기에 보였던 5부가 중심이 된 국가구조와 정치운영체체를 部體制로 명명해 볼 수 있다.211)노태돈,<초기 고대국가의 국가국조와 정치운영-부체제론을 중심으로->(≪한국고대사연구≫17, 2000).
―――,<삼국시대의 部와 부체제-부체제론 비판에 대한 재검토->(≪한국고대사논총≫10, 2000).

 한편 고구려의 부체제와 비슷한 양태를 6세기 초 이전의 신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양자의 성격이 반드시 꼭 일치한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유사한 면모는 확인할 수 있다. 냉수비와 봉평비를 통해서 볼 때, 部名을 冠稱하였던 왕은 아직 초월적인 권력자라기보다 6부 귀족의 대표와 같은 성격을 지녔고, 왕을 위시한 여러 干들이 모여 주요 문제를 논의하였던 회의체가 국정 운영에 주요 기능을 하였다. 간들 중 으뜸가는 간이라는 뜻인 마립간이라는 임금 칭호는 이 시기 신라국의 정치체제와 왕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212)朱甫敦,<6세기 초 新羅王權의 位相과 官等制의 成立>(≪歷史敎育論集≫13·14, 1990).. 또 ‘신라’라는 말이 6부만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여지기도 하였다. 피복속 지방 촌락은 기존의 수장인 干을 통해 간접 지배를 받았다. 이러한 부체제는 마립간 시기를 거치면서 점차 변화되어 나가, 임금을 왕이라 칭하게 된 6세기 초 이후에는 해체되고, 영역국가의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되어 갔다.

 백제의 경우, 그 초기의 정치체제는 당시 사실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금석문이나 중국측 사서와 같은 당대의 기록이 없어 추정키 어렵다. 그러나 늦어도 6세기 대에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해 나가, 고구려나 신라의 그것과 비슷한 면을 나타내었다.

 삼국이 중앙집권적인 영역국가체제를 구축해나감에 따라 일원적인 관등체계가 확립되고 중앙 관서가 증치되는 등 관료조직과 율령이 정비되어 갔고, 지방에 대해서도 종래와는 달리 피복속 지역을 간접 통치하던 데서 벗어나 지방관을 파견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민과 땅을 중앙정부가 직접 장악하는 체제를 지향하였다. 5세기에 세워진 중원고구려비에서 보듯 ‘國土’라는 개념도 이때 등장하여 영역국가의 면모를 나타내었다. 그리고 단양 적성신라비에서 ‘佃舍法’과 ‘小女’ 등의 표현이 보인다. ‘소녀’는 연령 등급제에 따른 편제를 나타내며, 전사법은 그 전후 구절이 떨어져 나가 구체적인 내용은 분명치 않지만 토지제도와 연관된 법령으로 여겨진다. 이는 곧 6세기 중반 신라의 국가권력이 지방의 토지와 민에 대한 지배력을 구사하고 이를 율령으로 규정하였던 면을 전해준다. 그리고 울진 봉평신라비에 奴人法이 언급되었다. 이 역시 전후 부분의 글자가 모호하여 자세한 내용은 분명치 않으나, 노인은 피정복되어 신라에 흡수된 변경지대의 주민들로서, 아마도 집단예민의 처지에 있었던 이들로 여겨진다. 이들을 신라 조정에서 일반 민으로 그 처지를 개선시키는 어떤 조처를 취하였는데, 이들이 모종의 소요를 일으킴에 그에 대한 응징으로 기존의 노인법에 따라 집단적인 처벌을 한 내용을 비문에 담고 있다. 이는 신라 영내에 있던 각종의 주민집단을 고대국가의 일반 민으로 편제하여 지방제도와 율령을 통해 일원적으로 지배해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진흥왕 북한산비에서 새로이 편입한 지역의 주민을 포함한 신라 영역의 모든 민을 ‘新舊黎庶’라 표현한 것도 그런 일면을 반영한 것이다. 백제에서도 중앙 관서인 ‘點口部’가 있었다.213)≪周書≫百濟傳. 구체적으로 부여 宮南池 출토 목간의 하나에 ‘歸人中口四 小口二 邁羅城法理源 水田五形’이라 기록되어있는데,214)小口는 下口로 판독하기도 하는데, 연령구분과 관련된 丁이나 中에 대응하는 小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李鎔賢,<扶餘 宮南池 出土木簡의 年代와 性格>,≪宮南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1999). ‘中口’나 ‘小口’는 주민을 중앙정부가 연령 등급별로 편제하여 파악하였음을 말해준다.

 민과 함께 중앙정부는 주요한 지배기반인 물적 자원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장악을 도모하였다. 진흥왕 창녕비에 ‘土地彊域山林’‘大等與軍主幢主道使與外村主審照’‘海州白田畓’‘△鹽河川’ 등의 구절이 보인다. 마멸이 심하여 전후 문맥을 알 수는 없으나, 전답 등의 토지와 하천, 鹽, 산림 등에 대해 ‘審照’ 즉 조사하여 파악할 것을 언급한 것으로 여겨진다.215)노용필,≪眞興王代 國家發展의 經濟的 基盤≫(1996), 74∼82쪽. 물적 자원 중 핵심은 토지일 것인데, 적성비에서 보이는 ‘전사법’의 존재는 토지에 대한 어떤 제도적 조처가 취해졌음을 전한다.

 토지를 어떤 형태이든 간에 조세 부과 대상에 포함시키기 위해선 토지에 대한 측량 사업을 요한다. 삼국시대의 양전에 대한 구체적인 실태를 파악키는 어려우나, 고구려의 경우 고구려척에 의한 절대 면적 기준의 段步制가 행해졌다는 설은216)朴贊興,<고구려의 段步制>(≪韓國史學報≫12, 2002). 유의되는 바이다. 신라의 경우, 늦어도 문무왕 3년(663)에는 結負法이 행해졌던 것이 확인되어진다.217)문무왕 3년(663) 김유신에게 田 500結을 하사하였다(≪三國史記≫권 42, 金庾信傳). 그런 만큼 그 이전 시기에 토지에 대한 측량과 양전을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삼국의 중앙집권체제가 진전되어 나감에 따라, 삼국간에선 영역국가의 지배 기반인 민과 땅을 보다 많이 획득하기 위한 갈등이 첨예화되었고, 빈번한 전쟁이 해를 이어 벌어졌다. 특히 고대의 귀족은 기본적으로 무사였다. 전쟁은 이들에게 부와 권력과 명성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십대 후반의 어린 화랑이었던 斯多含이 대가야 공략전에서 공을 세워 높은 명성을 얻고 300명의 포로와 토지를 사여받았던 예는218)≪三國史記≫권 43, 斯多含傳. 그런 일면을 말해준다. 이들 귀족이 전쟁 수행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삼국이 중앙집권적인 영역국가로 발전해나가게 된 동인으로는 4∼5세기를 지나면서 야철 기술의 발달과 한반도 전역에 걸친 철제 농기구의 광범위한 보급이 거론되었다. 개간용구, 起耕具, 수획구 등의 철제농기구는 생산성을 향상시켰으며, 특히 철제 보습의 사용은 우경과 심경을 가능케 하였다.219)전덕재,<4∼6세기 농업생산력 발달과 사회변동>(≪역사와 현실≫4, 1990).
李賢惠,<三國時代의 農業技術과 社會發展>(≪韓國上古史學報≫8, 1991)
―――,<한국 고대의 犁耕에 대하여>(≪국사관논총≫37, 1992:≪韓國 古代의 생산과 교역≫, 1998).
그리고 ‘살포’와 같은 논농사에 필요한 농구도 사용되었다.220)金在弘,<살포와 鐵鋤를 통하여 본 4∼6세기 농업기술의 변화>(≪科技考古硏究≫2, 아주대박물관, 1997). 자연 이러한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개선에 따른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영농단위의 축소를 가능케 하였고, 가족 내지 家의 사회적 역할을 증대시켰으며, 그간 민의 생활과 재생산의 기반이었던 읍락공동체의 기능 축소와 해체를 가져왔다.221)안병우,<신라 통일기의 경제제도>(≪역사와 현실≫14, 1994). 그와 함께 민호의 분화 또한 진전되었다. 이는 국가 권력이 읍락 내에 까지 침투하여, 호 단위로 민을 파악하여 수취하는 제도의 시행을 가능케 하였다. 고구려의 3등호제는222)≪隋書≫高麗傳. 그런 면을 말해준다.

 이런 면과 함께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은 전쟁이다. 4세기대 동아시아 국제 정국의 격동으로 빈번한 전란이 일어났고, 전쟁은 중장기병이 동원되는 등 대규모화하였고 그 파괴력도 훨씬 커졌다. 이런 정세에 대응하며 생존키 위해서는 각국은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확보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생산력 자체의 증대를 꾀하여야 하였을 뿐 아니라 보다 조직화된 동원력의 확충을 도모하였다. 특히 생산력 증대에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통제와 조직 강화를 통한 동원과 수탈이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조직과 동원력은 때로는 수리시설의 축조 사업에 구사되어졌고, 그것은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기여하였다. 곧 이 시기 삼국이 중앙집권적 영역국가로 발전해나간 데는 빈번한 전쟁에 따른 이런 면이 깊이 작용하였다고 보아진다.

 장기간 지속되던 삼국간의 전쟁은 7세기 중반 이후 급격한 물살을 타고 진전되었다. 그간 따로따로 전개되었던 고구려와 수·당제국 간의 전쟁과 한반도에서 진행되었던 삼국간의 전쟁이 648년 당의 수도에서 있었던 김춘추와 이세민의 회담 이후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신·당 연합군에 의한 660년 사비성의 함락과 668년 평양성의 함락으로 귀결되었다.

 당은 평양성에다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평양에 중국 왕조의 통치기관이 설치된 것은 기원전 108년 왕험성의 함락과 함께 설치된 낙랑군에 이어 두번째였다. 그러나 양자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기원전 108년 한 제국은 1년여의 공방전 끝에 왕험성을 공략하였고, 그 땅에 설치된 낙랑군은 그 뒤 400여 년 유지되었다. 그러나 668년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데에는 수·당 두 왕조에 걸쳐 70년의 세월이 소요되었고 그나마 신라의 도움을 받아 가능하였다. 그런데 안동도호부는 불과 8년만에 신라에 의해 쫓겨나게 되었다. 양자간의 이런 차이는 곧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한국고대사회가 이룩한 역사적 성취의 결과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왕험성 함락 당시 한과 고조선간에는 여러 면에서 큰 발전의 낙차가 있었는데,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한국고대사회가 성장하여 이를 극복해나갔음을 말해준다.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 조정은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편제하였고, 그 아래 설치된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나아가 外司正을 주와 군에 파견하여 지방관과 행정을 감찰하게 하였고, 지방 유력자를 상경케 하는 상수리 제도를 시행하였다. 한편 결부제에 입각한 양전 사업이 전국에 걸쳐 행해졌고, 민은 9등호제로 편제되었다.

 이렇듯 통일기 신라는 전국에 걸친 고도의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였으며, 한편으로 국학을 설치하였고 8세기 후반에는 국학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독서삼품과를 운영하여 인재 양성과 등용 방법을 개선하기도 했다.223)고경석,<신라 관인 선발제도의 변화>(≪역사와 현실≫23, 1997). 그러나 끝내 보편적인 성격의 인재 등용제도는 마련되지 못하였고, 정치와 관료제의 운영은 여전히 골품제에 의해 규제되었으며, 세습 신분인 진골이 권력을 독점하였다. 민에 부과하였던 조세 또한 여전히 인두세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그 면은 수취제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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