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2. 고대
  • 2) 통일 신라의 수취제도
  • (1) 계연과 9등호제

(1) 계연과 9등호제

 신라 통일기 때의 수취제도의 실상에 대한 이해는 남겨진 자료에 따라 두 측면에서 시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민이 부담하였던 조세의 내용에 대한 검토이고, 다른 하나는 관리에 대한 보수 지급 방법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서원경 인근 지역의 4개 촌락에 관한 문서를 통해 검토되어왔다.

 신라 촌락문서에는 각 촌의 호구와 전답, 소와 말, 뽕나무와 잣나무, 추자나무에 관해 기록하였고, 조사된 뒤의 변동사항을 추기하였다. 이 문서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이 計烟과 孔烟이다. 공연의 성격에 대해선 자연호설과 편호설이 그간 제기되어 왔다. 촌락문서에서 몇 사람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함에 따라 공연 하나가 소멸된 사례로 전하고 있어, 공연은 일반적으로 편호로 여겨지고 있다. 이들 공연이 모두 다 인위적으로 몇 개의 자연호를 합쳐 편성한 것은 아니다. 공연에는 유력한 자연호 하나로 구성된 것, 자연호와 그에 예속된 개별 인들로 구성된 것, 자연호 몇 개를 합처 이루어진 것 등이 상정되어지는데, 일단 공연 자체의 성격은 수세를 위해 설정된 것이라는 점에서 행정호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에 대해 자연호설에선, 여러 명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는데도 공연의 수의 감소로 기록되지 않는 경우도 보이므로 공연을 편호로 보기 어렵다는 반론이 제기된 바 있다.224)이희관,<통일신라시대의 공연의 구조에 대한 새로운 이해>(≪한국사연구≫89, 1995). 이 점에 대해 편호설에선, 당시 당이나 일본의 예로 보아 정식 허가를 받지 않고 도망해간 경우에는 공연의 감소로 인정치 않고 3년 동안 계연을 계산할 때 그대로 포함시켰기 때문에 추기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225)李泰鎭,<新羅 村落文書의 牛馬>(≪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碧史李佑成先生定年退職紀念論叢(상)-≫, 1990).
全德在,<統一新羅期의 戶等制의 性格과 機能에 관한 硏究>(≪震檀學報≫84, 1997).
윤선태,≪신라통일기 왕실의 촌락지배≫(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0), 149∼160쪽.

 공연은 9등호로 편제되었고, 이에 의거하여 仲上烟을 1로 하고 하하연을 1/6로 계산하여 각 촌의 계연이 산출되었다. 이 계연에 의거하여 각 촌의 조세나 역역이 부과되었던 것으로 파악되어진다. 계연의 합계를 통해 전국의 조세나 역역의 총액이 산정되어질 수 있으니, 이에 근거하여 재정운영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형식의 문서양식은 西魏의 計帳에서 찾아볼 수 있어, 중국에서 비롯한 계장 양식의 영향을 받아 이를 신라의 실정에 맞게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226)윤선태,<신라 촌락문서의 計烟과 孔烟-中國·日本의 戶等制, 年齡等級制와의 비교검토를 중심으로->(≪韓國古代史硏究≫21, 2001).

 촌락문서에서 수취액을 직접적으로 표기한 것으로는 계연 이외의 것은 보이지 않으므로, 계연의 성격 파악이 당시 조세부과의 주된 기준에 대한 이해의 요체가 된다. 이는 곧 공연의 9등호가 무엇을 기준으로 설정되었는가와 계연 수가 적용되는 세목의 범위를 규명하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해선 人丁기준설, 토지기준설, 資産기준설 등이 제기되어 왔다.

 이 중 먼저 제기되었던 설이 인정기준설이다. 즉 각 호의 인정의 다과에 따라 9등호로 나누었으며, 9등호에 의거한 계연은 역역 징발의 기준이 되었고, 전조와 공물은 전답과 뽕나무·잣나무·추자나무 등에 기초하여 징수되었다는 견해이다.227)旗田 巍,<新羅の村落-正倉院にある村落文書の硏究>(≪歷史學硏究≫226·227, 1958·1959:≪朝鮮中世史の 硏究≫, 1972).

 이에 대해 자산기준설로서, 호등은 助·丁의 수를 일차적 기준으로 하고 다른 경제적 조건 등이 참작된, 각 호의 자산에 의하여 결정되었고, 계연 수는 촌에 부과되는 모든 부담의 이행 기준이 되었으며, 그것은 다시 각 호등에 따라 각 공연간에 분배되었다고 보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28)李泰鎭,<新羅 統一期의 村落支配와 孔烟>(≪韓國史硏究≫25, 1979).

 한편 토지 기준설에선 각 호가 소유한 토지의 면적을 기준으로 호등이 정해졌고, 계연 수는 토지에 기초하여 산출되었으며, 조·용·조 전반이 이에 의거하여 수취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229)李仁哲,<新羅 統一期의 村落支配와 計烟>(≪韓國史硏究≫54, 1986). 또한 토지를 기준으로 한 9등호제는 인정하지만, 계연 수에는 면조지인 촌주위답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를 통해 田租의 수취는 불가능하며, 계연 수는 단지 戶調의 수취에만 관련되고, 전조는 촌락문서에 기록된 田結 수에 의거하여 1/10의 租가 부과되었다고 이해하는 설이 있다230)김기흥,≪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사회변동과 관련하여-≫(역사비평사, 1991), 158∼186쪽..

 한편 근래에는 인정을 중심으로 한 자산이 기준이 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즉 당시 당과 일본의 사례로 보아, 각 호가 보유한 전답의 면적 자체는 호등의 설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며, 각 호의 가용 노동력을 비롯하여 생산곡물의 양, 가축, 가옥 등을 포괄하는 ‘총체적 자산’에 의해 공연의 호등이 산정되었다는 설이 그것이다.231)윤선태,<新羅村落文書의 作成年代와 記載樣式-중국·일본의 적장문서와의 비료검토를 중심으로->(332회 역사학회 월례발표회 발표문, 1996).
전덕재,<통일신라기 호등 산정 기준>(≪역사와 현실≫23, 1997).
그리고 전조는 결부수에 의거하여 수취되지 않았으며, 호등제를 통해 租·調를 수취하였을 것이라고 보았다.232)全德在, 앞의 글(1977). 나아가 연령등급제의 의미와 동 시기 당과 일본의 사례 및 고려 때의 변화된 측면 등을 고려하여, 신라의 9등호제는 인정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233)윤선태, 앞의 글(2001).

 이렇듯 호등의 설정 기준과 계연이 포괄하는 세목의 범위 등에 대해 서로 다른 다양한 설들에서 제기되었다. 각 설을 다시 검토해보면, 먼저 토지가 기준이 되었다고 볼 경우, 이는 삼국시대의 조세 부과 양상과는 질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된다. 삼국의 조세제도에 관한 기록으로선 고구려의 경우가 전해지고 있다.≪隋書≫고려전에 “人稅는 포 5필 곡 5석이고 遊人은 3년에 한 번 10인이 細布 1필을 낸다. 租는 家戶 당 1석, 다음은 7斗, 다음은 5斗를 낸다”라 하였다. 이에서 人이란 가호의 호주를 뜻한다고 보아지므로, 곡 5석과 포 5필은 일종의 戶調로 여겨지며, 정남을 중심으로 한 가호 단위로 부과된 것으로 볼 수 있고, 가호마다 균일하게 부과된 것이니 인두세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 하겠다.234)곡 5석과 포 5필은 가호에 부과하는 것으로는 지나치게 많은 양이어서, 이를 ‘곡 5석이나, 포 5포필’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김기흥, 앞의 책(1991), 53∼54쪽.
이 외에 租는 3등으로 나누어 차등으로 부과되었는데, 이는 가호의 빈부에 따라 부과된 것이라고 보아진다.235)≪周書≫고려전에서, ‘賦稅는 소유한 바에 따라 빈부를 헤아려 차등으로 징수하였다’고 하였다. 戶租는 그 세액에서 보듯 조세의 주된 부분은 아니고, 부가세적인 것으로 보아진다.236)당시 隋에서 開皇 16년 司倉을 설치하면서, 부가세로 3등의 戶等에 의거하여, 上戶1石, 中戶7斗, 下戶4斗를 부과한 예는 참조가 된다(≪隋書≫권 24, 食貨志). 고구려의 3등호제에 의거한 租를 義倉租나 北齊의 義租와 비슷한 성격의 것으로 이해한 견해가 있다(안병우, 앞의 글, 1994).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의 경우, 조세 부과의 주된 기준은 人丁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만약 통일 신라에서 토지가 기준이 되어 9등호가 설정되었다면, 이는 삼국시기와는 크게 다르고 토지가 조세 부과의 기초가 되었다는 측면에선 고려시대의 그것과 동질적인 면을 보이는 것이 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촌락문서에는 토지가 결·부·속 단위로 자세히 파악되어 있다. 국가에 의한 양전은 곧 토지에 대한 조세부과를 전제로 한 것이라고 볼 때, 결부법에 의한 토지의 파악은 토지가 주요 세원이 되었음을 뜻한다고 상정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토지는 노동력과 결합되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안정적 생산을 낼 때, 수취의 주된 대상이 될 수 있다. 당시 토지에 비해 인구가 적고, 호구의 이동이 잦으며, 토지 생산성이 낮고 농법이 휴한법 단계에 있었던 상황을 고려할 때, 결부법에 의한 토지 면적 표시가 곧 결부 단위로 전조가 수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시기 당에서도 頃·畝 단위로 토지를 파악하였지만 조세는 호등에 의해 부과되었고, 그 호등은 소유한 토지 면적에 의해 산정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신라 통일기 때 토지가 조세 부과의 기준이 되었다면, 고려 시대의 田券에서 보이듯 陳田 여부에 관한 언급이237)旗田 巍,<新羅·高麗の田券>(≪史學雜誌≫79-3, 1970:≪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1972). 따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당시는 아직 토지의 연작상경이 일반화되지 못한 단계였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는 간과할 수 없는 요소이다. 그리고 이 시기 사용된 결부법은 수확량 기준이 아니고 절대면적 기준이었던 만큼238)李宇泰,<新羅時代의 結負制>(≪泰東古典硏究≫5, 1989). 토지의 비척도에 대한 고려는 안정적 조세 수취를 위한 필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언급이 촌락문서에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호적과 양안이 분리되었고,239)盧明鎬,<高麗時代 戶籍 記載樣式의 성립과 그 사회적 의미>(≪震檀學報≫79, 1997). 연령등급제가 폐지되었으며, 절대면적단위인 결부법으로 표시된 토지에 대한 조세부과를 좀더 합리적으로 하기 위해 田品이 설정되었던 점 등이 유의된다. 특히 신라 말에 세워진 개선사 석등기에서 소유주의 畓의 소재처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사방의 지점을 기술하고, 奧畓과 渚畓으로 답의 종류를 구분하여 기술하여, 촌락문서와는 다른 기재 방식이 사용되었다.240)윤선태, 앞의 글(2001). 이는 위에서 지적한 요소와 연관해 볼 때 새로운 변화로서 주목되어진다.

 한편 인정기준설의 문제점도 지적되었다. 즉 만약 인정이 기준이었다면 왜 이들 촌에는 등급이 높은 호는 없고 仲下烟이 최고의 등급호가 되었으며, 4개의 촌락의 등급호의 분포 비율이 각 촌락의 호당 인구수나 丁의 수와 비례하지 않은가 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241)허종호,≪조선토지제도발달사(1)≫(1991), 209쪽.
이인철,<新羅村帳籍에 대한 몇 가지 論議>(≪韓國古代史硏究≫21, 2001).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당시 조세 부과의 주된 지표인 계연을 산출하는 근거인 호등을 설정하는 기준은 인정을 중심으로 한 총체적인 자산이었다고 보는 설이 보다 설득력을 지닌다. 촌락문서는 수취를 위해 작성한 행정문서이다. 국가는 조세를 안정적으로 징수키 위해 세원에 대한 자세한 파악을 하려 했을 것이고, 그런 면을 행정문서에 반영하였을 것이다. 촌락문서에서 인정에 대한 기술이 자세하고 양적으로도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적어도 인정이 조세 수취에 중심이 됨을 뜻한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반면 토지에 대한 기술에선 陳田 여부와 전답의 종류나 등급에 대한 기술이 전혀 없다는 점은242)≪三國遺事≫駕洛國記에 首露王廟의 位田으로 ‘上上田 30頃’을 언급하였다. 이에 따르면 문무왕대에 토지의 9등급 田品制가 시행되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기사는 사료 비판이 요구되는 것으로서, 그대로 인정키는 어렵다(전덕재,<統一新羅期 戶等制의 性格과 機能에 대한 硏究>,≪震檀學報≫84, 1997). 적어도 토지가 주된 조세부과의 항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당시 토지가 전혀 조세의 대상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촌락문서에 烟受有畓에 속하는 촌주위답이 있다. 이는 촌주의 직무 수행에 대한 보수로 지정된 것으로서, 아마도 촌주 소유지를 位畓으로 설정하여 면세를 해준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곧 토지에 어떤 형태의, 아마도 부가세적인 성격의, 조세가 부과되었음을 말해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243)전덕재, 위의 글.

 이렇게 볼 때, 통일신라의 수취제도가 삼국 시기의 그것과 현격하게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통일기 신라 때 조세 부과의 주된 기준이 토지에 있지는 않았다는 점은 이 시기 관리에 대한 보수 지급방법체계에 대한 이해에도 적용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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