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2. 고대
  • 2) 통일 신라의 수취제도
  • (2) 녹읍제의 성격

(2) 녹읍제의 성격

 통일 신라기 때 관리에 대한 보수 지급 제도로 기록에 전하는 것은 祿邑과 관료전이다. 이 중 중심을 이루는 것은 녹읍이었다. 녹읍은 관리에게 일정한 지역에서 부세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를 급여 대신 지급한 것이다. 녹읍은 신문왕 9년(689) 폐지되고, 대신 매년 租가 지급되었다가(歲租), 얼마 후 매월 지급되었다(月俸). 당시 관리에게 녹봉을 지급한 구체적인 사례는 佐波理加盤附屬文書에서 확인된다.244)尹善泰,<正倉院 所藏 ‘佐波理加盤附屬文書’의 新考察>(≪國史館論叢≫74, 1997). 폐지된 녹읍은 경덕왕 16년(757) 다시 부활되어 신라 말까지 지속되었다.

 녹읍이 폐지된 것은 신라 통일기 초로서, 강대해진 왕권에 의해 녹읍을 지급받는 주된 대상이었던 진골 귀족세력을 억제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개재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아울러 옛 백제 영역과 고구려 영역의 일부를 통합함에 따라 세원이 크게 늘어나 세조를 지급할 수 있게끔 국가 재정이 확충되었기에 가능하였다. 한편 녹읍의 부활 원인에 대해선 직접적인 사료는 보이지 않으나, 신라 중대를 거치면서 각종의 재정 지출이 크게 증대되었고 성덕왕과 경덕왕 대에 자주 보이는 자연재해 등으로 농민의 유망이 늘어남에 따른 재정궁핍과 진골 귀족의 이해가 어우러진 데서 찾기도 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녹읍주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수조권설, 조·용·조 징수권설, 調와 역역 징발권설, 등 그간 다양한 견해들이 개진되었다.

 먼저 수조권설을 보면, 통일기 신라의 녹읍은 녹읍주에게 녹읍 내의 전답의 소유주로부터 전조를 징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것으로서, 중세 전기의 특징적인 토지제도인 田主佃客制의 유형이었다고 보았다.245)金容燮,<前近代의 土地制度>(≪韓國學入門≫, 學術院, 1983).
이경식,<고대 중세의 녹읍제의 구조와 전개>(≪손보기박사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1988).
한편 이에 대해 만약 녹읍주에게 수조권이 지급되었다면 녹읍은 전결 수로 분급되어야 하는데, 학생 녹읍의 예에서 보듯 지역 단위로 지급되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 면에 대해 수조권설에선 당시 녹읍은 고을 단위로 그 수조권이 분급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246)李景植,<新羅時期 祿邑制의 施行과 그 推移>(≪歷史硏究≫72, 1999).

 만약 녹읍주에게 수조권이 분급되었다면, 녹읍의 농민들에 대해 전조가 수취되었고 전조가 농민의 부세 부담의 주요 부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녹읍의 농민에 대한 수취는 일반 촌락의 농민에 대한 그것과 일단 제도상으로는 차이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앞서 촌락문서에 관한 논의에서 보았듯이, 계연 산출의 근거인 9등호는 토지 소유 정도에 의거하여 산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토지가 주된 세 부과의 대상은 되지 못하였고, 전조가 수취되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그 다음 녹읍주에게 분급된 것은 전조를 제외한 공부와 역역 징발권 및 소와 말에 대한 지배권이었다고 본 설은247)吉田 孝,<公地公民制について>(≪坂本太郞古稀記念 續日本古代史論集≫中卷, 1972).
木村 誠,<新羅祿邑制と村落構造>(≪歷史學硏究≫428 別冊(世界史の新局面と歷史像の再構成), 1976).
武田幸男,<新羅の村落支配-正倉院所藏文書の追記をめぐつて->(≪朝鮮學報≫81, 1977).
고대 일본의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다. 즉 율령체제 하에서 관리에게 준 일본의 職分田을 신라의 관료전과, 그리고 封戶를 녹읍과 유사한 성격의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설은 촌락문서의 작성 연대를 헌덕왕 7년(815)으로, 그리고 촌락문서를 녹읍지배를 위한 기초문서로 간주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촌락문서의 작성연대에 대해선 최근 695년설이248)尹善泰,<村落文書의 作成年代-일본의 ‘華嚴經論’流通過程을 중심으로->(≪震檀學報≫80, 1995). 제기되는 등 논난이 분분하며, 촌락문서에 등장하는 촌락의 성격에 대해서도 논의가 일정치 않다. 그런만큼 좀더 고찰이 필요한 바이다.

 한편 녹읍주에게 주어진 것이 곡물 수취권이었다고 보는 설도249)全德在,<新羅時代 祿邑의 性格>(≪韓國古代史論叢≫10, 2000). 있으며, 조용조 모두를 수취하였다는 설은 일찍부터 제기되어온 바이다.250)金哲埈,<新羅 貴族勢力의 基盤>(≪人文科學≫7, 1962:≪韓國古代社會硏究≫, 1975).
姜晉哲,<新羅의 祿邑에 대하여>(≪李弘稙博士回甲紀念韓國史論叢≫, 1969:≪韓國中世土地所有硏究≫, 1989).
―――,<新羅의 祿邑에 대한 若干의 問題點>(≪佛敎와 諸科學≫, 1987:앞의 책, 1989).
朴贊興,<신라 녹읍의 수취에 대하여>(≪韓國史學報≫6, 1999).
그리고 전기 녹읍과 경덕왕 16년(757) 부활한 후기 녹읍간에는 수취 내용이 달랐다는 설도 제기되었다.251)김기흥, 앞의 책(1991), 142∼147쪽.

 이렇듯 당시 녹읍에 대한 수취 양태가 어떠하였던가는 그간 연구가 크게 진전되었으나 아직 논란이 분분하여 분명치 않은 점이 많은 형편이다. 앞으로 삼국시대와 통일기 신라 그리고 고려 전기로 이어지는 시기의 사회적 변화와 농업의 진전양상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의 확충이 요구되어지는 바이다. 아울러 삼분법 또는 오분법적인 시대구분론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데서 벗어나 이 문제를 접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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