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2. 고대
  • 3) 발해인과 발해국

3) 발해인과 발해국

 8∼9세기 한국고대사에서 주요한 쟁점의 하나는 발해사에 대한 이해이다. 발해사의 성격과 그 귀속을 둘러싸고 그간 국내외 학계에서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왔는데, 이는 발해가 고구려 유민이 중심이 된 고구려 계승국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보는 견해와 말갈족이 중심이 된 국가로 여기는 견해로 대별된다. 전자는 남북한 학계에서 제기되어 왔다. 후자에선 발해를 중국의 중세 지방봉건정권이라고 규정하고 당 왕조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중국학계의 주장과 말갈족 역사로서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러시아 학계의 설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렇듯 발해사의 이해를 둘러싸고 각국 학계의 견해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에는 정치적 입장과 이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부정키 어렵다.

 발해국은 다종족 국가였는데, 그 중 두 계통의 주민이 대종을 이루었다. 발해국의 주민은 발해 멸망 직후부터 요나라에 의해 ‘발해인’과 ‘여진인’으로 구분되어져 각각 다른 형태로 지배를 받았다. 즉 전자는 주현의 민으로 편제되어 요의 지방관에 의해 漢法 즉 漢人에게 적용하는 법으로 통치되었다. 그와는 달리 후자는 부족 단위로 편제되어 자치를 영위케 하고 간접 지배를 하였다. 이는 양자의 사회의 성격이 달랐던 데서 비롯한 것이다. 전자의 사회는 이미 공동체적인 관계가 해체되고 사회분화가 깊이 진전되었는데 비해, 후자는 그렇지 않았다. 고려에서도 귀부해 온 옛 발해국의 주민을 발해인과 여진인으로 구분하였다. 여진인의 경우, 집단적으로 안착시켜 그 내부의 일은 자치에 맡겼다.

 이렇게 발해국의 주민이 두 부류로 나뉘어지는 것은 발해국 존립 당시에도 그러하였다. 발해 초기에 발해를 방문하였던 일본인의 견문기에서 그 주민이 ‘土人’과 말갈로 구분되었고 도독, 자사 등은 ‘토인’이 되었다고 기술하였다. 주민구성의 이중성은 발해 말기에도 확인되어진다.

 발해의 묘제에서도 그런 면을 찾아볼 수 있다. 발해 초기의 무덤 양식을 보면 석실봉토분과 토광묘로 대별된다. 전자는 수도와 주요 지방 중심지에 축조되었고, 후자는 주로 변방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발해 초기, 수도의 주민들의 묘지였던 돈화현 육정산의 무덤떼를 보면 고구려 문화적인 요소와 말갈 문화적인 요소가 함께 보인다. 구체적으로 육정산 고분 분포지 내에서 대형 석실분이 자리잡은 구역에선 고구려적 요소가 두드러지며, 작은 무덤이 밀집한 구역에선 말갈 요소가 현저하게 보인다. 이는 곧 발해 건국의 주도세력이 고구려계의 주민이었음을 말해주는 바이다.252)宋基豪,<六頂山 古墳群의 성격과 발해 건국집단>(≪汕耘史學≫8, 1998).
―――,<事實과 前提-발해 고분의 경우->(≪韓國文化≫25,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2000).

 그리고 발해인들의 의식에서 고구려 계승의식은 찾아볼 수 있으나 말갈 계승의식은 확인키 어렵다. 792년 당에 발해사절로 파견되었던 양길복이 띈 관명이 ‘押靺鞨使’였다.253)≪唐會要≫권 96, 渤海. 즉 ‘말갈을 관할하는 관리’라는 뜻의 관직명이다. 만약 발해 조정이 말갈족 출신이고 말갈족에 소속의식이 있었다면, 존재키 어려운 관직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발해국의 성격에 대한 인접국인들의 인식 또한 이를 고구려 계승국으로 보는 것이 절대 다수였다. 즉 보장왕의 손자인 高震의 묘지명에서 고진의 출자를 발해인으로 기술하였고, 발해를 멸망시킨 후 그 땅에 거란이 설립한 동단국의 左次相이었던 거란인 야율우지가 요동지역을 발해인의 고향이라고 하였으며, 일본인들이 발해사절을 고려사라 하였다.254)이에 대한 구체적인 전거는 盧泰敦,<渤海國의 住民構成과 渤海人의 族源>(≪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一潮閣, 1985) 참조. 그리고 8세기 후반 9세기 초에 티베트어로 기술된 돈황문서 P.1283에 의하면 당시 내륙아시아 터키계 유목민들이 발해를 ‘Muglig’라고 불렀다 하는데, 이 말은 고구려 존립 당시 고구려를 돌궐에서 Mökli 또는 Moukri라 하였던 데서 비롯한 것이다. 같은 문서에서 당나라 사람들이 이 Muglig를 ‘Keuli’ 즉 고려라 하였다고 전한다. 발해와 고구려를 계승관계에 있는 실체로 이해하였음을 말해준다.255)盧泰敦,<高句麗 渤海人과 內陸아시아 住民과의 交涉에 관한 一考察>(≪大東文化硏究≫23, 1989:≪고구려사 연구≫, 1999).

 이런 면으로 볼 때, 발해국을 이끌었던 주된 족속인 ‘토인’-‘발해인’은 고구려계가 중심이었다고 보아야겠다. 그리고 그간 가장 논란의 대상이었던 대조영의 출자는 변경의 고구려인256)盧泰敦, 앞의 글(1989).또는 말갈계 고구려인257)宋基豪,≪渤海政治史硏究≫(一潮閣, 1995), 41쪽.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발해인의 족속계통을 파악하는 것이 발해사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주요한 부분이지만, 그 점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발해사를 고구려사의 연장으로만 이해케 하는 오류를 낳게 한다. 발해는 200여 년 존속하는 동안 그 시기의 내외의 객관적 여건에, 특히 고구려유민들이 목단강 유역 등 동부 만주 신개척지에서 다수의 말갈족과 함께 생활하여야 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그 나름의 개성적인 면모를 형성하였음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면에 대한 천착이 진전되어야 발해사의 특성이 보다 부각될 수 있겠다.

 한편 발해와 신라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서, 양국이 시종 적대적 관계를 지속하였고 당이 그것을 조장하였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다.258)李佑成,<南北國時代와 崔致遠>(≪창작과 비평≫10-4, 1975). 즉 강대한 외세의 조종에 휘말려 양국은 서로 동족의 나라임을 자각치 못한 채 당 중심의 국제질서에 안주하여 분열과 대립을 지속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발해와 신라는 시종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상호 교류도 하였다.259)宋基豪,<발해에 대한 신라의 양면적 인식과 그 배경>(≪韓國史論≫19, 서울대, 1988). 발해에서 신라로 가는 ‘신라도’라는 이름의 교통로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은260)≪新唐書≫渤海傳. 그런 면을 말해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양국간의 관계는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고, 교류 또한 활발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실제 양국은 733년 한 차례의 전쟁을 치른 바 있다. 이 해의 전쟁에서 그러하였듯이, 발해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신라는 당에 밀착하여 이에 대응하려 하였다. 발해는 일본과 관계를 맺어 신라를 견제하려 하였다. 이런 경향은 장기간 지속되었다. 그 결과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세력균형을 이루어 안정을 유지하였으나, 신라와 발해간의 관계는 적대적이지는 않았을지라도 특기할만한 관계 개선 없이 병존 상태를 지속하였다. 삼국 통일 전쟁 후 신라 조정은 삼한일통의식을 전면 내세워 적극적으로 백제와 고구려 유민을 동족으로 포괄했지만, 뒤 이어 등장한 발해에 대해선 능동적으로 동족의식을 표방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신라 조정이 삼한일통을 자신의 위업이요 정통성의 주요 기저로 내세웠는데, 고구려 영역의 대부분을 차지한 발해를 고구려계승국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논리와 상충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라는 풀이는 의미가 있다.261)李康來,<三國史記의 靺鞨 인식>(≪白山學報≫52, 1999).

 그러면 양국이 존재하던 8세기에서 10세기초에 이르는 기간의 시기 명칭을 정한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그간 ‘통일 신라와 발해’, ‘남북국시대’, ‘발해와 후기 신라’ 등이 제기되어 왔다. 이 면에 대해선 그 시기의 역사적 실상과 함께, 발해인과 발해국에서 이룩한 역사적 성취가 어느 정도 고려사회에 이어졌는가에 의해 가름지워져야 할 것이다. 고려사회의 주된 부분이 그 영역과 함께 통일기 신라의 그것을 이었음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盧泰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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