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3. 고려
  • 1) 정치적 특성
  • (2) 지방의 통치조직과 그 성격

(2) 지방의 통치조직과 그 성격

 고려의 건국(918년)을 전후한 때로부터 얼마 동안은 중앙과 함께 지방도 통치조직이 정비되지 못하여 중앙의 행정력이 거의 미치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는 호족이라 일컬어지는 재지세력이 번성하여 지방은 이들의 지배에 맡겨져 있다시피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태조 23년(940)에는 州·府·郡·縣의 명칭을 개정하는 조처가 취해졌다. 그리고 租賦의 징수·보관과 관계되는 今有·租藏과 그의 운송과 관계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轉運使가 파견되기도 하고, 또 光宗 즉위년(949)에 州縣의 歲貢額을 정하고 있는 데서 지방에 대한 통제의 일면을 엿볼 수는 있으나 이들이 아직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못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려의 조정이 지방에 본격적으로 통제를 가하기 시작하는 것은 성종 2년(983)에 들어와 12주에 목을 설치하면서부터였다. 이는 그 전 해에 있었던 崔承老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거니와, 집권화 정책을 수행하면서 우선 중요지역인 楊洲·廣州·忠州 등 12주에 목을 설치하고 상주하는 外官(地方官)인 牧使를 파견함으로써 중앙의 통제력이 비로소 지방에 본격적으로 침투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해에 戶長·副戶長 등의 鄕吏職制가 마련되는 것도 이와 관계가 깊지마는, 뒤이어 몇 가지 조처가 잇따랐다. 이제 그런 과정을 거쳐 성종 14년에 당시의 실정을 반영하여 수도인 開州가 開城府로 개정되고, 10道가 신설되며, 또 종래의 12州 牧使制도 12軍 節度使制로 개편되는 한편으로 7都團練使·11團練使·15刺史·5都護府使·21防禦使 등의 편제도 마련된다. 그후 이는 다시 穆宗 8년(1005)과 顯宗 3년(1012)의 개정을 거쳐 마침내 동왕 9년(1018)에 이르러 4都護·8牧·56知州郡事·28鎭將·20縣令으로 마무리 지어진다. 물론 이 조직도 그후 여러 차례 바뀌며, 또 상급기구인 5道按察使制가 윤곽을 드러내는 것은 휠씬 뒤인 睿宗朝(1106∼1122)경이지만, 보통 郡縣制로 불리는 고려조 지방통치조직의 골격은 이로써 일단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지방의 통치조직을 구역별로 보면 南道 지역과 兩界 지역 및 경기 지역으로 다원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단위별로는 道·界와 京·都護府·牧 등의 界首官, 그 아래 주·부·군·현·진 등의 다층적 구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이 군현제 지역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들과 구별되는 鄕·部曲·所·莊·處 등의 특수행정조직이 따로이 광범하게 존재하였다. 이른바 部曲制 지역인 것이다.

 종래에는 이렇게 군현제 지역과 구별되는 부곡 등의 특성을 신분적인 면에서 파악하여 천민집단으로 보려는 경향이 많았다.274)旗田巍,<高麗時代の賤民制度「部曲」について>(≪和田還曆紀念 東洋史論叢≫, 1951:≪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2). 그러나 근자에는 부곡 등에 비록 그 같은 천민적 존재가 더러 있기는 했을지라도 대체적으로 부곡민 역시 良人이었다고 이해하고들 있다. 그리하여 이들을 주로 수취관계와 관련하여서거나275)朴宗基,<高麗 部曲制의 構造와 性格-收取體系의 運營을 中心으로->(≪韓國史論≫10, 1984:≪高麗時代 部曲制硏究≫, 서울大出版部, 1990). 越境地와 같은 지리적 조건과 연관지어276)李佑成,<李朝時代 密陽古買部曲에 대하여-部曲制의 發生 形成에 관한 一推論>(≪震檀學報≫56, 1983:≪韓國中世社會硏究≫, 一潮閣, 1991). 해석하고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곡제 지역 사람들이 일반 군현민에 비하여 사회적으로 여러 면에서 차별대우를 받은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이처럼 일반 군현과는 구별되는 특수행정조직인 부곡 등이 광범하게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우선 하나의 특징으로 꼽아도 좋은 것이다. 혹자는 부곡제 지역의 광범함에 유의하여 고려의 지방행정조직을 이것과 군현제 지역으로 대별하여 파악하기도 한다.277)朴宗基,≪高麗時代 部曲制硏究≫(서울大出版部, 1990). 그러나 이 같은 이해는 통치구조면에서 볼 때 얼마간의 여운이 남는다.

 다음 행정체계상의 큰 특징은 중앙과 외관이 파견된 主郡(領郡)·主縣(領縣)과 直牒關係에 있었다는 점일 것 같다. 이어서 설명하듯이 고려에서는 전체 군현에 외관(지방관)을 파견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지역에 한정시켰는데, 중앙의 官司는 일반 행정 사항에 대한 公貼을 중간기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이들에게 발송하였고, 지방의 수령들 역시 해당 중앙관서에 직접 보고하는 체계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국초부터 상급 기구의 위치에 있던 경·도호부·목 등의 계수관들이 담당한 역할도 몇몇 가지 사항에 한정되어 있었다.278)尹武炳,<高麗時代 州府郡縣의 領屬關係와 界首官>(≪歷史學報≫17·18 합집, 1962). 그것들은 구체적으로 上表하여 陳賀하는 일과 鄕貢을 選上하는 일 및 外獄囚 推檢 등이었다는 연구가 있거니와,279)邊太燮,<高麗前期의 外官制-地方機構의 行政體系->(≪韓國史硏究≫2, 1968:≪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중간기구로서의 그들 기능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뒤에 성립되는 5道按察使制의 경우도 유사하였다. 안찰사도 전임의 외직이 아닌 使命官으로서 도내의 州縣을 巡按하면서 ① 수령의 賢否를 살펴 黜陟하는 일을 위시하여, ② 민생의 疾苦를 묻는 일, ③ 刑獄의 審治, ④ 租賦의 수납, ⑤ 군사적 기능 등을 담당하는 데280)邊太燮,<高麗按察使考>(≪歷史學報≫40, 1968:≪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그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무기구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임기는 6개월에 불과하였다. 거기에다가 안찰사에 임명되는 사람이 대부분 5∼6품의 微官이었고, 또 5도의 명칭과 그 소관 구역이 시기에 따라 변동되고도 있다. 이런 연유 때문에 안찰사를 도의 장관으로 보지 않으려는 견해까지 있는 것이다.281)河炫綱,<後期道制에의 轉成過程>(≪高麗地方制度의 硏究≫, 韓國硏究院, 1977:
≪韓國中世史硏究≫, 一潮閣, 1988).
여기서도 중간기구로서의 道制가 지니는 한계성을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계수관이나 안찰사제가 지니는 이 같은 제약성과도 관련하여 중앙과 지방 사이의 행정체계가 위에서 지적했듯이 직첩관계에 있었다고 하였거니와, 그러나 그것도 외관이 파견된 주군현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고려 때는 이러한 주군현보다도 특히 남방 5도를 중심으로 외관이 없는 속군·속현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주군현을 통한 간접지배를 하였던 것이다. 고려에서는 이처럼 일부 지역에만 外官을 파견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행정을 펴 나갔으므로 邑格보다는 외관의 설치 여부가 한층 중요하였다. 광범한 속군·속현의 존재와 더불어 이 같은 외관 중심의 행정체계가 고려 군현제의 또 다른 특질의 하나였던 것이다.282)邊太燮, 앞의 글(1968).

 그러면 고려의 군현조직에 있어 이러한 主屬關係가 생겨나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羅末麗初에 호족들이 지배하던 세력권과 관련이 깊은 듯 하다. 고려는 건국의 초기에 각 곳의 유력한 在地勢力들에게 土姓을 分定하여 준다던가283)李樹健,<「土姓」硏究(其一)>(≪東洋文化≫16, 1975
―――,<土姓의 形成過程과 內部構造>(≪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1984).
공신책정이나 官階를 수여하여284)金日宇,<高麗 太祖代 地方支配集團 편제의 제도적 장치>(≪濟州島史硏究≫6, 1997:≪고려초기 국가의 地方支配體系 연구≫, 一志社, 1998). 그들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여 주었다. 이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세력권을 형성하여 그 안에 들어온 주변세력과 주속관계를 맺었던 것 같으며, 이런 관계가 곧 군현 상호간의 주속관계로 전환되지 않았나 짐작되는 것이다. 고려는 건국 초기뿐 아니라 그 후 줄곧 시혜나 징벌의 의미에서 邑號를 승강시키고 있어서285)金甲童,<‘高麗初’의 州에 대한 考察>(≪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朴恩卿,<高麗時代의 邑號陞降>(≪高麗時代 鄕村社會硏究≫, 一潮閣, 1996).
이와 좀 다른 차원에서 운용하고 있지만 주속관계의 시원은 대체적으로 그와 같이 파악되고 있는 듯 생각된다.

 많은 속군현의 존재는 중앙의 행정력에 일정한 제약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예종조로부터 심해지는 백성들의 流移 현상이 그 점을 보여주는 한 좋은 사례였다. 고려조는 국초부터 이 부분에 유의하여 本貫制 등을 시행하였지마는,286)蔡雄錫,<高麗前期 社會構造와 本貫制>(≪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高麗時代의 國家와 地方社會-‘本貫制’의 施行과 地方支配秩序≫, 서울대출판부, 2000). 이제는 속군현에 최하급의 외관이긴 하나마 監務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로써 백성들의 유이 현상을 막고 변화하는 향촌질서에도 대처하려 하였던 것이다.287)元昌愛,<高麗 中·後期 監務增置와 地方制度의 變遷>(≪淸溪史學≫1, 1984).
金東洙,<고려중·후기의 監務 파견>(≪全南史學≫3, 1989).
이인재,<고려 중후기 지방제 개혁과 감무>(≪外大史學≫3, 1990).
그러나 주요 지역을 중심으로 외관을 배치하는 고려의 지방통제 시책은 麗末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시정되지 못하였다.

 지방행정의 말단을 맡아 실무를 본 것은 보통 長吏 또는 外吏로 불린 鄕吏層이었다. 이들은 군현제 지역이나 부곡제 지역을 막론하고 모든 행정구획에 설치된 邑司에 근무하면서288)李樹健,<高麗時代「邑司」硏究>(≪國史館論叢≫3, 1989).
尹京鎭,<高麗時期의 地方文書行政體系>(≪韓國古代中世古文書硏究(下)≫, 서울대출판부, 2000).
백성들과 직접 접촉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역할이 매우 컸다. 더구나 이들은 신분적으로 국초의 호족과 연결되어 있었고 과거 등을 통해 중앙의 관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등 권한과 지위가 상당히 크고 높았던 것이다.289)朴敬子,<高麗 鄕吏制度의 成立>(≪歷史學報≫63, 1974).
趙榮濟,<高麗初期 鄕吏職의 由來에 대한 小考>(≪釜大史學≫4, 1980).
李純根,<高麗初 鄕吏制의 成立과 實施>(≪金哲埈華甲紀念 史學論叢≫, 1983).
尹京鎭,<高麗前期 鄕吏制의 구조와 戶長의 직제>(≪韓國文化≫20, 1997).
고려시대의 향리들은 조선의 그들과 상당히 다른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의 중앙정부가 其人制度나 事審官制度를 마련해 이들에 대한 통제책을 삼았다 함은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다.

 행정조직의 하부 단위로 백성들이 생활하는 곳은 촌락이었다. 고려 때의 촌은 대체적으로 신라 장적문서에 보이는 沙害漸村 등과 유사한 자연촌락으로 이해하여 왔는데, 시기와 지역에 따라서는 그 몇 개씩이 합쳐진 ‘地域村’을 이루기도 했다 한다.290)李佑成,<麗代 百姓考-高麗時代 村落構造의 一斷面->(≪歷史學報≫14, 1961). 한데 근자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전진된 ‘行政村’說도 나오고 있거니와,291)朴宗基,<高麗時代 村落의 機能과 構造>(≪震檀學報≫64, 1987). 고려 때 지방의 촌락이 수도인 개경의 坊·里制와 유사하게 행정적으로 편제되어 있었는 지의 여부는 지금의 시점에서 단정하여 말하기가 좀 어렵지 않나 싶다.

 매우 소략하게 살피는데 그치긴 했지만 고려시대의 지방통치조직과 구조 및 그 성격은 이처럼 여러 모로 특성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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