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3. 고려
  • 2) 경제적 특성
  • (3) 상공업의 실태

(3) 상공업의 실태

 고려 때의 주된 산업은 농업이었으므로 상공업은 그렇게 발달하지 못한 편이었다. 아직 고려는 자연경제의 범주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수도인 개경을 중심으로 교역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상업은 크게 국내상업과 대외무역으로 나뉘며, 국내상업은 다시 도시상업과 지방상업으로 나뉘어지는데, 그 가운데에서 도시상업은 역시 개경의 市廛이 큰 축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高麗史≫에 의하면 이 개경의 시전은 이미 태조 2년(919)에 설치되었다고 전하거니와, 그 뒤 12세기 초엽에는 그들의 北廊 건물 65간이 불탔다는 기록이 보이며, 또≪高麗圖經≫에도 시전들이 廣化門 거리에 長廊을 이루고 있었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이와 같이 개경의 시전들은 중요 거리에 장랑을 이루고 있으면서 언제나 교역을 하던 상설점포였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도시인들의 생활품을 판매하기도 했지만 주로 관수품을 조달하고 국고의 잉여품을 처분하는 어용상점의 기능을 했다고 짐작된다.318)姜萬吉,<商業과 對外貿易>(≪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
金東哲,<고려말의 流通構造와 상인>(≪釜大史學≫9, 1985).
朴平植,<高麗時期의 開京市廛>(≪韓國史의 構造와 展開≫, 혜안, 2000).
개경의 이 같은 상황에 비해 고려의 제2 도시였던 西京만 하여도 상업이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방상업은 비상설적인 場市가 중심이었다. 즉 교통의 요지에 장시가 서서 주변의 1일 왕복거리에 있는 농민들이 모여 米·布로써 화폐를 삼아 물물을 교환하는 형태의 상업이 행하여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시가 며칠에 한 번씩 열렸으며 또 전국적으로 그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지방에는 이밖에 육로를 따라 장사하는 陸商과, 강이나 바다를 따라 배를 이용하여 장사하는 船商 등319)홍희유,≪조선상업사-고대 중세-≫(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9). 行商들도 있었다.

 고려 때의 상업상 하나 더 특기할 사항은 사원이 이 방면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원은 물론 종교의 道場이었지만, 여기서는 미곡 등 많은 농산물이 생산되고 우수한 수공업품도 제조되어 매매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원의 상행위는 寺院經濟에 큰 보탬이 되기는 했으나 반면에 많은 폐단을 낳기도 하였다.320)李載昌,≪高麗寺院經濟의 硏究≫(亞細亞文化社, 1976).
李相瑄,<高麗寺院經濟에 대한 考察>(≪崇實史學≫1, 1983:≪高麗時代 寺院의 社會經濟硏究≫, 誠信女大出版部, 1998).

 대외무역은 宋을 비롯하여 遼·金·日本 등 주변 각국들과의 사이에서 행하여졌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활발하게 교역을 한 나라는 송이었거니와, 공식적인 조공무역 이외에 사무역도 번성하였다.321)金庠基,<麗宋貿易小考>(≪震檀學報≫7, 1937:≪東方文化交流史論攷≫, 乙酉文化社, 1948).
羅鍾宇,<高麗時代의 對宋關係>(≪圓光史學≫3, 1984).
그러나 요·금의 경우 使行貿易이 행해지고 互市場인 榷場이 설치되기도 했지만 양국과는 전쟁 등의 긴장관계가 오래 지속되었으므로 교역도 그만큼 한계성을 지니게 마련이었으며,322)李龍範,<麗丹貿易考>(≪東國史學≫3, 1955). 일본과도 정식적인 국교가 없었으므로 주로 민간상인들이 내항하여 방물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아 가는 정도였다.323)羅鍾宇,<高麗前期의 麗·日貿易>(≪圓光史學≫1, 1981). 그런 일면에 大食國, 즉 아라비아 상인들이 송나라의 고려 무역에 힘입어 진출하여 온 것은 한 특이한 현상이었다.

 이 상업과 뗄 수 없는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화폐 문제가 있다. 고려 때 사용된 화폐로는 물품화폐와 금속화폐가 있었는데, 그 중 전자로 이용된 것은 布와 米였다. 하지만 이 가운데에서 보다 널리 사용된 것은 布貨였거니와, 그것으로 기능한 포는 주로 질이 나쁜 마포인 麤布였다가 뒤에는 5綜布(5升布)로 바뀌었다.

 금속화폐로는 성종 15년에 주조하여 쓰도록 한 鐵錢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널리 유통되지 못하고, 얼마 뒤에는 숙종이 海東通寶 등을 주조하여 사용을 적극 권장하였으며,324)金柄夏,<高麗朝의 金屬貨幣 流通과 그 視角>(≪東洋學≫5, 1975).
金光植,<高麗 肅宗代의 王權과 寺院勢力-鑄錢政策의 背景을 중심으로->(≪白山學報≫36, 1989).
또 銀 1근으로 우리 나라의 지형을 본 딴 銀甁 등도 만들어 통용토록 하였다.325)이경록,<高麗前期 銀幣制度의 成立과 그 性格>(≪韓國史의 構造와 展開≫, 혜안, 2000).
김도연,<高麗時代 銀貨유통에 관한 一硏究>(≪韓國史學報≫10, 2001).
그러나 실물경제에 치중되어 있던 고려에서 비록 도시의 경우 어느 정도 활발하게 금속화폐가 유통되었다고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렇지가 못한 편이었다.

 다음은 수공업에 대해서인데, 비교적 규모가 크고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관청수공업이었다. 그러한 관부로는 繕工寺(將作監)·軍器寺(軍器監)·掌服署(尙衣局) 등이 있었거니와, 여기에는 해당 기술자인 工匠들이 전속되어 정부와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해 조달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관청수공업으로는 각 도에서 운영하던 금기방·잡직방·갑방 등이 있었지마는, 그 수나 규모는 중앙에 비해 매우 미미한 편이었다.326)姜萬吉,<手工業>(≪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
홍희유,<10∼14세기(고려시기)의 수공업>(≪조선 중세 수공업사 연구≫, 과학백과사전출판부, 1978:지양사, 1989).

 所는 金所·銀所·銅所·鐵所·紙所·瓦所·炭所·瓷器所·魚梁所 등의 예에서 보듯이 특정의 물품을 만드는 특수행정집단이었다. 그러므로 所手工業의 생산활동은 역시 전업적이었는데, 그들 물품은 주로 공납품으로 충당되었다.327)徐明禧,<高麗時代 ‘鐵所’에 대한 연구>(≪韓國史硏究≫69, 1990).
田炳武,<高麗時代 銀流通과 銀所>(≪韓國史硏究≫78, 1992).
李貞信,<高麗時代의 漁業 實態와 魚梁所>(≪韓國史學報≫3·4, 1998).

 국가에 전속되지 않은 工匠들도 그들에 대한 일종의 호적이라 볼 수 있는 工匠案에 의하여 파악되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국가가 정한 일정한 기간 동안 공사에 징발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役만 부담하고 나면 자유로이 급료를 받고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하여 주거나 물품을 생산 판매하여 생계를 꾸려간 것으로 생각된다.328)洪承基,<高麗時代의 工匠>(≪震檀學報≫40, 1975:≪高麗社會史硏究≫, 一潮閣, 2001).
徐聖鎬,<高麗前期 지배체제와 工匠>(≪韓國史論≫27, 1992).
이러한 민간수공업 가운데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농민들의 가내수공업이었는데, 그러나 이들에 의한 생산은 자가수요를 위한 衣料나 관부에 납부하기 위한 布物類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고려 때의 상업과 수공업은 대략 이상과 같은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인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