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3. 고려
  • 4) 사상적 특성
  • (2) 도교와 풍수지리·도참사상

(2) 도교와 풍수지리·도참사상

 佛·儒가 논의되는 자리에는 으레 道가 따라 나오듯이 도교 역시 우리 나라에서 크게 유행된 사상체계의 하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것은 고대의 민간신앙과 神仙說을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 道家나 음양·오행의 이론 등이 가미되어 성립된 신앙으로 불로장생 및 현세 이익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였는데, 특히 고려에서는 국가와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비는 의식과 관련하여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벌써 태조 7년(924)에 수도인 개경에다 醮星處의 하나인 九曜堂을 창건한 것에서 그 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현종 3년(1012)에는 대궐 안의 毬庭에서 크게 醮祭가 행하여진 사례가 발견된다. 이후 계속하여 北斗醮·太一醮·星變祈禳醮·老人星祭 등의 각종 齋醮가 베풀어지고 있는 것이다.379)李能和,≪朝鮮道敎史≫(東國大, 1955:李鍾殷 역, 普成文化社, 1977).

 이 같은 일련의 과정 속에서 도교에 많은 관심을 가진 예종(1105∼1122)이 즉위함에 미쳐 새 전기를 맞는다. 그는 왕 2년에 연경궁의 후원에 있는 옥촉정에다 元始天尊像을 안치하고 月醮를 지내게 하고 있거니와, 얼마 뒤에는 道觀인 福源宮(福源觀)을 건립하고 있는 것이다.≪高麗圖經≫권 17·18의 福源觀 및 道敎條에 의하면 그곳에 功行이 높은 道士 10여 명이 있어 일을 보았다 한다. 이렇게 도교의 총림격인 복원궁의 건립은 도교사상 매우 큰 의의를 지니는 것인데, 그 뒤에는 비슷한 도관인 神格殿이 설립되고, 또 祈恩色과 大醮色 및 祈恩都監·淨事色380)梁銀容,<高麗道敎의 淨事色考>(≪韓國宗敎≫7, 1982).·大淸觀 등의 여러 도교기관도 마련되어서381)梁銀容,<高麗時代의 道敎와 佛敎>(≪韓國宗敎≫8, 1983). 도교사상은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382)車柱環,<高麗의 道敎思想>(≪韓國의 道敎思想≫, 同和出版公社, 1984).
金澈雄,<高麗中期 道敎의 盛行과 그 性格>(≪史學志≫28, 1995).

 하지만 이 같은 도교기관과 도사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승려들과 같은 강한 교단을 형성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도교의 비조직성에다가 고려 후·말기에 들어와 그도 불교와 함께 사대부들의 배척을 받음으로써 위축되기 시작하였다.383)梁銀容,<도교사상>(≪한국사≫16, 국사편찬위원회, 1994).

 한편 풍수지리와 도참사상도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한 사상체계이었음이 알려져 있다. 이중 풍수지리설은 산세·수세를 살펴 도읍·주택·능묘 등을 선정하는 일종의 相地學과 같은 것으로서, 그 선정한 지역의 衰旺·順逆에 따라 국가나 인간의 길흉과 화복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특히 羅末의 道詵과 관련을 가지면서 널리 전파되어 각 지방의 호족들이 자기의 존재를 합리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었으며,384)崔柄憲,<道詵의 生涯와 羅末麗初의 風水地理說-禪宗과 風水地理說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韓國史硏究≫11, 1975). 태조 왕건 또한 그의 돈독한 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같은 풍수지리설은 그후에도 줄곧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는데, 더구나 여기에 도참사상이 결합되면서 그 비중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圖讖이란 원래 徵候·前兆 또는 神託·占言 등의 뜻을 지닌 말로 그것은 장차 닥쳐올 길흉화복을 예언·암시 혹은 약속하는 신비적·미신적 성격이 농후한 사상체계이었거니와,385)李丙燾,<圖讖에 對한 一二의 考察>(≪震檀學報≫10, 1939).
―――,<圖讖의 意義>(≪高麗時代의 硏究≫, 亞細亞文化社, 1980).
이러한 관념이 풍수지리설과 결부되어 정치·사회 및 일반생활에 이르기까지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태조대 이후의 그와 같은 사례로는 우선 정종의 서경천도계획을 들 수 있다. 이는 개경의 정정에 불안을 느낀 정종이 서경(평양)은 명당이라는 풍수설을 이용하여 추진한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대인 인종조에 妙淸 일파가 일으킨 서경천도운동 역시 자기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표면에 지리도참설을 내세우고 획책한 사건이었다.386)李丙燾,<仁宗朝의 妙淸의 西京遷都運動과 그 叛亂>(≪高麗時代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8:亞細亞文化社, 1980).
金南奎,<高麗 仁宗代의 西京遷都運動과 西京叛亂에 대한 一考察>(≪慶大史論≫창간호, 1985).
그 외에 개경에 이어서 서경과 동경(慶州)·남경(楊州:지금의 서울) 등 3경을 두는 것도 吉地說과 延基觀念에 따른 조처였으며, 三蘇宮을 경영한 것도387)李丙燾,<明宗의 世와 三蘇造成>(≪高麗時代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8:亞細亞文化社, 1980). 유사한 연유에서였다.

 비슷한 유형의 지리도참설은 고려 일대를 통하여 계속된다.388)崔柄憲,<高麗時代의 五行的 歷史觀>(≪韓國學報≫13, 1978). 그리고 조선조에서도 묘지의 선정 등 여러 방면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어떻든 우리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려시대에 도교와 풍수지리·도참사상이 줄곧 성행되어 온 것에서 당시 사상체계의 복합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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