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3. 고려
  • 5) 맺음말

5) 맺음말

 이상에서 고려 때 역사의 시대적 특성을 정치·경제·사회·사상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이제 거기에서 논급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우선 정치면에서 중앙의 경우 핵심기구들은 당·송의 제도와 고려의 독자적인 필요에서 만든 것 등 세 계통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조직은 2품과 3품을 경계로 하여 이중 편제로 되어 있었다는 것과, 특히 권력구조에서 宰臣이 6部判事를 겸직하고 다시 宰樞가 6部尙書를 중복직으로 지니는 사실과 관련하여 재추 중심의 정치체제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고려도 왕조국가였으므로 국왕권을 결코 낮추 평가할 수는 없으나 재추가 정치와 행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던 만큼 왕권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좀 미약했다는 이해인데, 그렇게 된 연유는 고려가 귀족사회였고, 따라서 그 같은 귀족적 성격이 정치제도에도 반영된 결과라고 파악하였다.

 다음 지방의 통치조직에서는 그 구역이 남도와 북계·경기 지역으로 다원화되어 있었고, 다시 거기에는 군현제 지역 이외에 향·소·부곡·莊·處 등 특수행정조직이 광범하게 존재했음이 한 특징이었다. 그리고 행정체계상으로는 중앙과 지방관이 파견된 主郡縣(領郡縣) 사이에 直牒關係에 있었다는 게 남다른 점이었다. 그러므로 중간행정기구인 京·都護府·牧 등의 界首官과 5道按察使의 기능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고, 지방관이 없는 많은 屬郡縣은 주군현을 통한 간접지배가 되었다. 이와 같은 광범한 속군현의 존재와 중앙과 주군현간의 직첩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外官 중심의 행정체계가 고려 군현제의 또 다른 특질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지방행정의 말단을 맡아 실무를 본 향리(長吏)들의 역할과 위치가 매우 높았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점이었다.

 한편 고려의 역사는 동아시아의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주변의 여러 나라와 유난히도 잦은 외교교섭과 전쟁을 벌이는 특성을 지니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五代·宋과는 친선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거란족의 遼와 여진족의 金, 몽고족의 元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으며, 말기에는 홍건적·왜구와도 충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같은 빈번한 국난을 끈질긴 투쟁으로 극복해간 대외적 성격이 강한 역사였던 것이다.

 이어지는 경제면에서는 당시의 주업이 농업이었던 만큼 토지지배관계가 중요한 대상이었는데, 먼저 민전의 존재에 유의하였다. 그것은 양적으로도 전체 토지의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더러 民産의 근본이요 국가 재정을 지탱하여 주던 地目으로서, 매매·처분과 증여·상속이 자유로운 백정농민 등의 소유지였던 것이다. 이처럼 민전은 소유권 측면에서는 국유지나 관유지와 같은 공전에 대칭되는 사전이었으나 수조권 측면에서는 그 田租가 국가나 공공기관에 귀속하는 경우에 공전이 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그것은 收租率에서도 1/4公田租 및 1/2私田租와 함께 논의가 거듭되었으나 지금은 대략 1/10조였다는 쪽으로 정리되고 있으며, 또 매매·처분 등이 자유로운 토지였음이 밝혀지면서 처음에 유력시되어 오던 토지국유제설을 부인하는 중요한 논거가 되고도 있다. 각종 地目들과 공전·사전 및 差率收租의 문제, 토지국유제와 사유제론 등이 고려 때의 토지지배관계를 파악하는 핵심적인 내용들인데, 그 중심에 민전이 있었던 것이다.

 국가의 관직에 복무하거나 職役을 부담하는 관리·군인 등에게 그 대가로 미곡을 주는 녹봉과 함께 전시과제도에 의해 이들 토지가 분급되었다. 그 가운데 문종 30년(1076)에 정비된 更定田柴科를 보면 전체 대상자를 관직의 고하와 중요도에 따라 18과등으로 나누어 전지와 시지를 분급하고 있는데, 이처럼 전지와 더불어 시지도 지급하고 있고, 또 그들 토지가 주로 外州에 산재해 있었다는 점에서 고려 나름의 실정이 반영된 分地制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지급이 收租權이었는지, 아니면 免租權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려 있으며, 그에 따라 토지의 경영방식도 달리 파악되고 있다. 이에 비해 녹봉은 文武班祿의 경우 역시 관직의 고하와 중요도에 의해 47과등으로 세분화되어 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끄나 더 이상의 특기할 만한 내용은 찾아지지 않는다. 그후 이 같은 체제는 무신정권기 이래 정치와 경제 질서 등이 문란해지면서 토지는 사적인 대토지지배의 특수한 형태인 農莊으로 나타나며, 녹봉제도 제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祿科田制를 시행하기도 하고, 농장의 폐단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도 없지 않았으나 결국은 모두 실패하였다. 고려 때의 농장주들은 대부분이 부재지주들인 개경 거주의 권세가들이어서 이 점에서도 조선시대의 그들과는 성격이 좀 달랐는데, 끝내는 이 농장이 안고 있는 문제가 고려의 운명을 재촉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상공업은 그렇게 발달하지 못한 편이었다. 도시상업의 경우 수도인 개경의 시전은 상설점포로서 비교적 교역이 활발하였으나 다른 곳은 그렇지 못하였으며, 지방상업도 비상설적인 장시가 중심이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寺院이 상업 방면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된다. 대외무역은 송 및 요·금·일본 등 주변 각국들과의 사이에 행하여졌으나 그중 가장 활발하게 교역을 한 나라는 송이었는데, 이들을 매개로 하여 대식국, 즉 아라비아 상인들이 진출하여 온 것은 한 특이한 현상이었다. 교역에 사용된 화폐로는 물품화폐인 布·米가 큰 몫을 하였다. 금속화폐로는 성종 때 鐵錢을 주조한 일이 있고 다시 숙종 때에는 海東通寶 등과 은 한근으로 우리 나라의 지형을 본떠 만든 銀甁을 통용토록 하였으나 도시를 제외하면 이들 역시 그다지 활발하게 유통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수공업으로는 관청수공업이 중심이었고 소수공업도 전업적이었으나 민간수공업은 여전히 미미한 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다음 사회면에서는 먼저 신분구조가 법제상 良身分과 賤身分으로만 구성되었다는 양천제 이론이 제기되면서 종래와는 달리 양반·귀족과 일반 양민과를 동일한 신분층으로 분류하게 됨에 따라 논란이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대의 입장에서는 양자가 士·庶로 표현되듯이 상호 대칭되는 신분계층으로 이들간의 상하·귀천의 질서는 양천의 그것에 못지않게 중요하였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각각의 신분층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려 종래에는 정치적·사회적 특권층인 귀족의 존재에 초점을 맞추어 고려를 귀족사회로 보려는 경향이 짙었으나, 한편에서는 귀족의 존재를 인정하되 귀족사회는 아니었다는 의견과 함께 차라리 양반사회로 이해하는 게 더 좋겠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서 귀족과 양반의 개념 및 범위 등이 다각도로 검토되고 있거니와, 어떻든 고려의 신분구조에서도 이들이 중요한 신분층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과거에 집단천민으로 간주하여 왔던 향·소·부곡민이 실은 하층 양민으로서 광범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도 주목되는 일면이다. 한데 노비를 비롯한 이들 각 신분층은 원칙적으로 자기의 신분을 세습토록 되어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양민은 잡과나 군인직을 통해서, 특히 향리나 서리 등 중류층은 별다른 제약없이 신분이동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고려는 이렇게 신분의 세습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변동의 길을 열어놓고 균형과 조화를 찾아갔다는 데서 또 다른 특성이 찾아지는 신분구조였다.

 가족제에 있어서 그 유형은 소가족 형태가 주류였다고 보는 견해가 다수인데 대해 대가족 내지 중가족 형태가 많았다는 의견도 있어 단정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이 가족 형성의 한 중요 계기가 되는 혼인은 여자의 경우 16∼18세 전후, 남자는 20세 전후였던 듯 싶은데, 그리하여 대개 일부일처제에 입각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다가 혹 남자쪽이 먼저 사망하는 경우 여자의 재가는 자유로운 편이었다. 아울러 근친혼 내지는 동성혼이 널리 행해지고 심지어는 동성동본혼의 사례도 보이는 것은 고려 때 婚俗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가족제에 있어서 보다 큰 특성은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 매우 높고 컸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우선 가호의 구성에서 여자가 호주가 되고 있다든가 여러 자녀 중 딸이 위일 경우 그부터 기록하고 있는 데서 살필 수 있다. 그리고 婿留婦婚과도 관련하여 딸·사위가 친정부모, 곧 장인·장모와 한 가족을 구성하여 모시는 것도 그 한 모습이며, 노비나 민전 등 家業·財産의 상속이 원칙적으로 자녀에게 균분상속하게 되어 있었다는 것 역시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이런 측면이 친족조직에도 반영되어 相避制나 五服制 및 호적에 있어서의 世系推尋 범위 등에 本族뿐 아니라 外族·妻族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같은 특성으로 인해 고려 때 가족·친족의 사회적 기능은 여러 모로 달랐던 것이다.

 다음으로 사상면에서 불교의 경우 나말려초에 호족과 연결된 선종이 크게 유행하면서 교종과 양립하는 형세를 이루었다가 점차 후자가 우위를 점하였다. 그런 가운데 문벌귀족사회가 형성되면서는 왕실 및 이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교종의 법상종과 화엄종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거기에 더하여 의천이 敎觀幷修를 표방하고 새로이 천태종을 開立하여 번창하였다. 이와 짝하여 유학도 크게 달라진 사회체제와 분위기 속에서 새 전기를 맞는데, 광종 때의 과거제 실시는 발전의 한 큰 계기였으며, 여러 가지 유교의례가 마련되는 성종조에 이르러서는 확고한 기반을 잡을 수 있었다. 이후 私學을 열어 유학 학풍을 크게 진작시킨 최충에 의해 유교는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발전하며, 예종·인종대에는 국학의 정비와 經學에 대한 강론회의 개최 등으로 한층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얼마 오래지 않아 무신란이 폭발하고 그들 정권이 서면서 유학은 매우 위축되지마는, 반면에 선종계의 조계종은 지눌의 활동으로 중흥을 이루어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를 宗旨로 삼고 수선사를 중심으로 신앙결사운동을 전개하여 크게 떨쳤다. 이 같은 결사운동은 천태종계의 요세가 중심이 되어 백련사에서도 일어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그러나 원 간섭기에 접어들어 일연이나 普愚·慧勤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많은 폐단을 낳고 승려들도 타락하여 한 사회의 지도이념으로서의 기반을 상실하여 갔다. 이러한 시기에 주자성리학이 안향·백이정 등에 의해 전래되어 사대부들에게 수용되면서 불·유병립의 상황은 점차 성리학 중심으로 교체가 이루어져 갔던 것이다.

 한편 고려에서는 도교도 국초부터 줄곧 유행하였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九曜堂 같은 醮星處가 마련되고 이후 北斗醮·太一醮·星變祈禳醮 등 각종 齋醮가 베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예종 때에 道觀인 福源宮(福源觀)이 건립되는 것은 도교사상 매우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후 도교행사가 더욱 빈번해지고 神格殿과 祈恩色·淨事色·大淸觀 등 도교기관도 여럿 설치되지만, 아직 불교에서와 같은 강고한 종교교단을 형성하지 못한 것은 그가 지니는 한 한계성이었다. 이 도교와 함께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상 역시 국초부터 유행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처음에는 지방의 호족들이 자기의 존재를 합리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종과 인종 때에는 정치적 목적과 결부된 서경천도운동의 연유로 앞세워지기도 하고, 또 延基觀念에 따라 3京이 설치되고 三蘇宮이 조성되는 것도 이들 사상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처럼 풍수지리·도참사상은 정치·사회 등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고려 때의 사상계는 이상에서 소개했듯이 佛·儒와 함께 도교·풍수지리·도참사상 등이 공존하면서 상호 대립·융합하기도 하고 또 영향을 미치고 받는 복합적 성격을 지닌 데 커다란 특징이 있었다.

<朴龍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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