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4. 조선
  • 2) 조선 초기의 사회와 문화

2) 조선 초기의 사회와 문화

 조선왕조의 개창은 다만 역성혁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경제·문화·사상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큰 변혁을 가져오게 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성계 일파는 위화도회군을 통하여 정권·병권을 장악하였으나 그들의 개혁이 성공하려면 공·사의 군사를 유지하기 위한 軍資 및 신진관료들의 녹봉을 확보하는 일과 농민들을 수탈과 핍박의 고통에서 구제하는 일이 함께 이루어져야 했다. 민중의 호응없는 개혁은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개혁파들은 그 길을 私田改革에서 찾았다. 즉 권문세족의 私田을 몰수하여 농민에게 급여하고 농민들로부터 法定의 전세(1/10)를 수취하면 군자·재정도 해결되고 민생도 구제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공양왕 3년(1391) 정치·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개혁파에 의하여 科田法의 실시를 보았다. 그것은 개혁파의 경제적 기반을 확립해 준 것이었으나 처음 그들이 이상으로 했던 완전한 개혁은 되지 못하고 결국 구귀족의 토지를 빼앗아 이성계일파와 신진관료 등에게 분배하여 농민들은 배제되었다. 이처럼 정권과 군권 및 사전개혁의 경제기반을 확보하게 된 이성계는 그 일파와 都評議使司의 추대를 받아 1392년 7월 17일 새 왕조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새 왕조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 유신과 이에 동조한 세력의 승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새 왕조의 정치지도이념은 숭유억불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과전법체제와 대명사대관계는 이미 정해진 방향이었다. 또한 고려말 가혹한 착취와 억압을 받던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도 새 왕조의 과제였고 또 백성들은 그것을 기대하였다. 그러한 정책방향과 기대는 태조 원년(1392) 7월 28일에 반포된 태조의 卽位敎書에 상당부분 반영되었다.

 새 왕조가 건립된 후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한 작업이 신속하게 진척되었다. 즉위 직후 이성계의 즉위사실을 명에 알렸고 이어 즉위교서와 함께 문무백관의 제도가 공포되었다. 즉위한 지 한 달만에 康氏소생 芳碩을 서둘러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조 2년 2월 15일에는 국호를 ‘朝鮮’이라 결정하였고, 동 3년에는 새 국도를 ‘漢陽’으로 정하였다. 태조 원년에 개국공신 52명을 책봉하였고 원종공신은 원년부터 6년 10월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1,400여 명이 선정되었다. 태조 3년에는 고려 왕족(王氏)들을 제거했다. 이러한 조처들은 새 왕조의 정치적 안정을 위한 것들이었다.

 태종은 두 차례의 쿠데타를 통하여 왕위를 쟁취하였으므로 그의 왕권은 무단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태종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하는 집권적 양반관료체제를 확립하면서 왕권의 강화와 공적 영역의 확대에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또한 公私노비의 변정과 추쇄, 사원토지·노비의 정리와 호구성적 및 전국적인 양전사업 등 정책에도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여 세종 치세의 기초를 마련했던 것이다.

 세종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뽑아 집현전을 세웠으며 그들로 하여금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학술적인 직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집현전은 經筵·書筵·知製敎·史官·試官·古制硏究·편찬사업 등 학술적인 직무를 수행하였고, 賜暇讀書制를 두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쟁쟁한 학자들이 양성되었고 이들에 의하여 유교적 의례·제도의 정리작업과 편찬사업이 전개되었다. 유교정치를 할 수 있는 기틀이 여기서 만들어졌고 세종대의 문화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세종대를 일관하는 국정운영의 특징은 세종이 의정부대신뿐 아니라 많은 관료들과 끊임없는 대화와 의논을 통하여 국정을 풀어갔다는 데 있다. 세종 26년 貢法을 반포하기까지 15, 6년 동안 중외의 관료는 물론이고 많은 농민들의 의견까지 수렴한 것은 세종대 정치의 중요한 한 면이다. 이러한 국정운영은 세종대의 유교정치의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 바탕 위에서 유교적 민본정치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문종은 세종 20년대 후반에 세자로서 섭정의 경험을 가진 바 있고 즉위 후의 정치적 분위기도 세종대와 크게 변하지 않았으므로 세종대와 같은 정치가 계속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으나 재위 2년 남짓에 승하하였다. 1452년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치분위기는 일변하였다. 문종은 皇甫仁·金宗瑞 등 의정부대신들에게 단종을 보필해 줄 것을 遺命하였으므로 황보인·김종서 등은 의정부서사제하에서 막강한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왕권은 상대적으로 허약했다. 단종 원년(1453) 10월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은 정권과 병권을 독차지하였고, 단종 3년 윤 6월 양위의 형식을 취하였으나 실제로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였다.

 계유정난을 통한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은 세조 왕위의 명분과 정통성에 흠이 되었고 도덕성에도 큰 허물을 남겼다. 세조 2년(1456) 6월의 死六臣事件은 명분·정통과 도덕성에 흠 있는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세조가 왕위에 있는 동안 치적은 적지 않았다. 중앙과 지방의 통치기구를 재정비한 일, 재정제도의 개혁, 職田法의 단행, 五衛制의 확립 등 큼직한 치적을 이루었고≪經國大典≫의 편찬도 그가 남긴 업적의 하나로 꼽지 않을 수 없다.

 예종은 재위 1년 2개월 만에 승하하였으므로 예종대는 세조대에서 성종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라 할 수 있다. 1469년 성종이 13세로 즉위한 이래 7년 동안은 尹大妃(세조비)의 수렴청정과 院相制가 계속되었으나 정치적인 분위기는 크게 변하였다. 원상들은 훈신세력의 핵심으로서 세조의 승하 후 강력한 정치주도세력으로 떠올랐으므로 성종의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훈신들은 세조공신들로서 靖難·佐翼·敵愾·翊戴·佐理 등의 공신으로 거듭 책록되어 직전 이외에도 막대한 공신전을 받아 과다한 재력을 소유하였고 막강한 정치세력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세력은 왕권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성종으로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훈구대신들의 과대한 정치력을 약화시켜 왕권과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 필요했다. 金宗直을 위시한 사림세력의 정계진출은 훈구세력을 견제하려는 성종의 의도가 내재한 것이었다.

 성종대에는 집현전제도를 이은 弘文館의 설치, 讀書堂制度 운영, 유생교육의 장려 등 인재양성에 힘썼고,≪東國輿地勝覽≫·≪東文選≫·≪東國通鑑≫·≪五禮儀≫·≪樂學軌範≫등 큰 편찬사업, 문화정리사업이 이루어졌으며≪경국대전≫을 완성·반포하는 등 문풍이 진작되어 조선 초기의 문화·제도의 정리사업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성종대에는 훈구대신들 간에 고리대 행위가 일어나고 뇌물이 성행하였으며, 사치와 퇴폐의 풍조가 풍미하게 되었으며 왕도 점차 유흥에 빠지고 후궁에는 분규가 생겼다. 연산군대의 士禍의 꼬투리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선은 개국 전후 압록강·두만강 연안일대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에 대하여 태조대부터 세종대에 이르는 동안 초유와 진무를 함께 하며 4郡과 6鎭을 설치하였다. 북쪽 경계를 침입·약탈하려는 여진족과 이를 밀어내고 지키려는 조선의 공방전은 계속되었고 북방개척을 위한 정부의 노력은 대단하였다. 특히 세종의 적극적인 북방개척 의지와 김종서·崔潤德 및 많은 군사들의 피와 땀으로 4군·6진이 설치되어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여진족의 침입은 그치지 않았고 조선정부의 방어노력도 끊이지 않았다. 함길도·평안도로의 사민정책도 여진족에 대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북변으로의 사민은 태조대부터 있어 온 것이지만 세종 16년(1434)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도내와 남도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사민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사민정책은 국가의 입장에서는 연변을 충실히 하고 국방을 위한 것이었으나 入居人의 입장에서는 강제적 사민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고 참기 힘든 고역이 따랐으므로 도망자가 속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조 이후에도 下三道民의 사민은 계속되었다. 북변을 지키기 위한 국가의 노력도 계속되었고 이에 따른 백성들의 고통도 심하였던 것이다.

 조선은 국초부터 주변국가와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한 외교정책을 세웠다. 14세기 후반 중국대륙은 원의 지배에서 명의 지배로 바뀌었으므로 조선의 외교적 관심은 명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있었다. 또한 삼국시대 이래 있어 왔고 특히 고려말에 극심했던 왜구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아왔던 터이므로 일본과의 적절한 외교관계 수립도 필요한 것이었다. 만주 일대 및 압록강·두만강 남쪽에까지 들어와 살던 여진족에 대하여도 그들을 위무하기 위한 적당한 외교관계의 유지가 필요하였다. 琉球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도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들 국가 중 명과는 사대관계를 맺었고 그 밖의 나라들과는 교린관계를 유지하였으므로 흔히 조선의 외교정책은 사대교린정책이 기초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의 정치체제는 ‘중앙집권적 양반관료제’라고 한마디로 규정되고 있지만, 실제의 운영면에서는 시기에 따라 내용의 차이가 많았다. 그리고 명분상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유교적인 양반관료에 의해서 통치되는 지배체제를 갖추었다. 유교정치가 왕권을 정점으로 삼고 있지만 실제로는 유교적인 지배기구와 그 제도를 통해서만 권력이 행사되게 마련이었고 또 실제로 정권도 왕권을 기반으로 하는 양반 중심의 관료기구를 통해서만 발동되는 체제였다. 조선왕조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한 양반은 그들의 유교적인 정치성향에 맞도록 文班위주의 집권적 관료체제를 확립해 나갔던 것이다. 麗末의 신흥사대부가 조선왕조의 정치체제를 마련함에 있어 중앙집권체제의 강화 추구는 새로이 접한 新儒學의 영향에서 앞 왕조의 정치체제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데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왕조의 집권화 과정을 역사적·시대적 발전추세로 보는가 하면 官僚制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도 있으나 신유학에 훈도된 신흥사대부의 성향이 다분히 서울 指向性과 관료지향성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는 데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도 있다.

 ≪경국대전≫체제를 염두에 두고 보면 조선왕조의 정치권력은 형식상 왕에게 있었다. 왕은 그 권력을 中外관원에게 배분하는데, 그 지표는 品階와 職事였다. 관품체계는 우선 宗親·儀賓·文班·武班·土官·雜職으로 구분되어 그 명칭과 대우가 각각 달랐다. 당시의 권력구조가 왕을 정점으로 크게 宮中과 府中으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이는 종친·의빈의 행정참여를 차단하고 행정과 군사를 구분하여 행정의 우위를 보장하며, 賤人신분의 정치참여를 봉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官品체계의 다른 구분은, 문반을 중심으로 보면, 大夫와 郎의 구분, 堂上·參上·參外의 구분이 있었다. 대부와 낭의 구분은 인사절차의 차이에 있다. 大夫階는 왕이 敎旨의 형식으로 바로 주는 데 비해, 郎階는 銓曹의 낭청·당상의 결재를 거쳐 주어지고 臺諫의 署經을 거쳐야 했다. 당상·당하의 차이는 정책결정이나 인사의 참여 여부에 있었으며, 참상·참외의 차이는 治事·治人의 자격 여부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하여 당상관은 정치·인사를, 참상관은 행정실무와 牧民의 기능을, 참외관은 그 보조업무를 맡도록 하였다. 그런데 관직에 일정한 품계를 고정시키고 그 품계에 맞는 관원이 거쳐가도록 짜여진 관직·관품관계의 괴리에서 생기는 문제를 완화시키기 위한 제도가 ‘行守法’이었다. 관직·관품의 괴리는 주로 加資濫設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는 지배층의 자기보전욕구의 결과로서 나타났는데 代加制도 이 같은 맥락에서 파악된다.

 관직체계를 보면, 정치적으로 책임이 있는 주요 관서는 모두 왕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나머지는 중앙의 경우 행정 최고관서인 六曹의 屬衙門으로 편제되어 있고, 지방의 경우는 觀察使·兵使·水使를 거쳐 왕에게 연결되도록 편제되어 있다. 그 연결을 보완하는 장치는 중앙의 경우 주요 3품아문의 1, 2품직과 기타 관서의 提調制이고 지방의 경우는 敬差官·御史 등이다. 그런데 중앙의 관직은 주로 正品階이고 지방의 관직은 주로 從品階이다. 軍事와 행정간의 견제·통합은 중앙의 경우 兵曹-五衛都摠府의 관계와 都摠官·副摠官·五衛將 등이 모두 兼官인 것 등에 나타나 있고, 지방의 경우 관찰사-兵馬節度使의 관계와 守令이 僉使∼都尉를 겸임하도록 한 것 등에 나타나 있다. 이러한 中外官職체계에 있어 文官의 우위가 제도나 관행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중앙관제는 왕을 정점으로 그 밑에 議政府와 6조 및 三司를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다. 이러한 기관은 권력구조상에 있어서 정책의 입안과 집행, 언론, 탄핵, 署經 및 法司의 여러 기능을 통하여, 때로는 왕권의 전제를 제한하기도 하고 때로는 권력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료기구는 항상 견제와 균형이란 원리에 입각하기 마련인데 그것도 시기에 따라 한결같지 않았다.

 지방통치체제는 중앙의 관료체제와 마찬가지로 양반관료의 권익을 일차적으로 옹호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으며, 지방행정이란 것도 결국 양반의 지배체제를 부지하기 위한 행정적 보조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방통치의 방식은 왕권의 강약과 훈구·사림파란 집권세력의 성향에 따라 상이하였다. 15세기는 지방제도의 개혁이란 면에서 볼 때 획기적인 시기였다. 즉 고려의 五道·兩界가 八道體制로 확정되고, 신분적이며 다원적이던 郡縣制가 일원적으로 행정구획화되며, 事審官制가 京在所와 留鄕所로 분화 발전해 나가고, 종래의 속현과 향·소·부곡이 소멸, 直村化하면서 새로운 面里制로 점차 개편해 나갔던 것이다. 경재소와 유향소는 무엇보다도 조선왕조를 창건하는 데 주역을 담당했던 신흥사대부 세력이, 그들이 소유한 外地의 토지와 奴婢를 효과적으로 지배 관리하고, 이제까지 군현지배권을 갖고 있던 향리를 배제하고 그들 주도의 지방통치와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확립하려는 과정에서 설치되었던 것이다. 경재소는 1邑 1所의 원칙대로 主邑을 단위로 조직되었던 것이며 각 읍의 京邸와 병존하면서 해당 읍의 유향소를 거느리고 있었다. 유향소가 초기에는 군현지배권을 향리로부터 인수받기 위해서 경재소의 힘을 빌렸던 것이며, 在京官人들은 경재소와 유향소를 배경으로 각자 연고지의 지방행정은 물론, 자기들의 사회적·경제적 기반도 부식해 갔던 것이다.

 양반사회의 정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양반사대부가 지향하려 했던 유교적인 향촌질서가 먼저 확립되어야 했다. 그런데 향촌사회는 일찍이 재지사족들에 의한 자율적 조직체가 존재했음이 밝혀졌는데 ‘鄕案’은 그 구성원의 명부이며, 鄕規는 그 규약이라는 것이다. 향약의 보급에 앞서서 유향소와 향안을 규제했던 향규는 벌써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유교적인 향촌질서의 확립과정은 성리학적 교육과 윤리·의례의 수용 및 사림파 세력의 성장과 유기적인 관련하에서 진행되었다. 그것은 바로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강조하던 사림파 세력의 성장에 따라≪朱子家禮≫의 수용과≪小學≫교육의 보급, 社倉의 설치 및 유향소의 설치와 향규·향약의 시행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한 양반사대부들의 본래 취지는 유교적인 덕치, 위민정치의 실현수단으로 제시되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반 대 농민의 원만한 관계 유지에 있었던 것이며, 향촌의 지배권을 장악한 재지사족들이 민중을 보다 효과적으로 지배 내지 수탈하기 위한 필요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적 지방통치체제가 비교적 잘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은 왕→감사→수령으로 이어지는 관치행정적 계통과 경재소→유향소→面·里任으로 연결되는 在地士族 중심의 자치적인 행정체계 및 이들 중간에 介在한 上計吏·京邸吏·營吏·邑吏의 향리계통, 이 3자가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 이후 군대의 징발과 통솔권이 모두 장수에게 위임되어 있던 私兵체제적인 고려말의 군사조직은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병권의 분장과 사병적 존재가 중앙집권적 군사조직으로 개편되어 갔던 것이다. 조선 초기의 군사조직 중 우선 중앙군의 실태를 보면, 여기에는 법제적인 측면에서의 10위와 갑사로 이루어진 왕실 사병으로서의 의흥친군위, 그리고 각 도의 번상 시위패와 반법제적인 존재였던 궁중 숙위병력인 成衆愛馬 등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 또한 군역 역시 군제만큼이나 여러 형태로 시행되고 있었다. 이들은 왕조의 안정과 더불어 차츰 정리되어 왕권을 직접 호위하는 무반관료로서의 금군과 중앙군은 5위제, 그리고 지방군은 鎭管體制로 정리되었다.

 중앙군의 근간이 된 5위는 의흥위·용양위·호분위·충좌위·충무위로 구성되었다. 이들 5위에는 각기 조선 초기 중앙군의 13개 병종들이 편입되었고 또 전국의 지방군까지 각 위별로 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지방군은 각 지방절도사에 의하여 지휘·통제받고 있어서 지방군의 분속은 그들이 직접 번상하여 수도방어에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대열 등 군사훈련에 대비하여 전국의 지방군을 거주지의 진관별로 파악하고 5위에 분속시킨 데 불과한 것이다. 즉 중앙군은 5위제로 대표된다고 하나 5위제는 하나의 훈련체제이고 실제 중앙군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중앙군의 각 병종을 살펴보아야 한다. 조선 초기의 5위제에 분속된 중앙군의 병종으로는 시취에 의하여 선발되는 군인(別侍衛·親軍衛·甲士·破敵衛·壯勇衛·彭排·隊卒)과 시취에 의하지 않고 특전 혹은 의무병역으로 편입되는 군인(族親衛·忠義衛·忠贊衛·忠順衛·補充隊·正兵)으로 대별되었다. 이 중 중앙군의 대표적 군사력은 갑사였다.

 지방군제 역시 세조 때에 정비되었다. 세조 원년에는 이때까지 북방의 익군과 남방의 영진군으로 이원화되어 있던 군사조직을 북방의 예에 따라 군익도의 체제로 통일하였고, 이것이 2년 뒤에는 다시 진관체제로 변경되어 지방군제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 때에 육군만이 아니라 수군도 이러한 진관조직을 갖추었다. 조선 초기의 지방군사제도는 이 진관체제를 바탕으로 조직되었다.

 이 시기의 군역은 양인의 의무이지만, 관직으로 올라가는 권리이기도 하였다. 한편 번상보병은 15세기 후반부터 役卒化하였고 이후 대립·수포의 주대상으로 군역의 변화를 겪는다.

 조선 초기는 강력한 문교장려책으로 인해 여말에 문란했던 관학체제가 잘 정비되어 전국의 인재들이 지방의 향교에서 성균관으로 진출하고 또 관학을 이수한 유생들이 소과나 文科에 합격함으로써 인재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시대의 교육은 크게 관학과 사학으로 나눌 수 있다. 관학 교육기관으로는 성균관·4부학당(4학)·종학·잡학·향교 등이 있었으며, 사학 교육기관으로는 서재·서당·가숙 등이 있었다. 연산군 폭정을 계기로 문신들이 향교의 교관을 기피하자 향교교육이 급격히 쇠퇴한 반면 재지사족들의 서당·서재에서 교육받는 사림세력이 배출하게 되었고 그러한 관학과 사학의 성쇠는 결국 16세기 중반에 가서 서원설립을 보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대체로 세종조에 정비되었다. 과거 중에 문·무과는 고급관료를 뽑는 시험이고, 잡과는 기술과 실무의 하급관료를 뽑는 시험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거는 초입사로로서 중요한 관문이었다. 그러나 초입사로는 과거 이외에 문음과 천거가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문음·과거 외에 유일·남반잡로·성중애마 등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남반과 성중애마가 吏職으로 떨어져 나가게 되자 천거의 성격이 강한 遺逸(隱逸이라고도 함)만이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있어서 문음과 과거는 초입사로로서 쌍벽을 이루는 두 가지 중요한 관문이었다.

 한편 조선시대의 인사관리제도는 과거제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고려시대에는 초입사의 의미가 강했던 과거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초입사에 못지 않게 超資·超職의 의미가 컸던 것이다. 이 초자·초직의 특징은 조선시대 과거의 특징을 드러내주는 법제였다. 循資法·考課法과 같은 까다로운 진급규정을 무시하고 파격적으로 고급관료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조선시대 과거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였다. 이처럼 현직관리에게 과거 응시자격을 주는 것과 그 합격자에게 더 큰 승진의 특권을 주었던 것은 조선 양반관료제의 하나의 특성이었다.

 고려말 사전개혁운동은 공양왕 3년에 과전법을 공포하기에 이르렀고, 이 과전법은 조선시대 토지제도의 근간을 이루었다. 과전법은 농장의 不輸租특권을 배제하여 모든 전지를 과세지로 재편성하며 소유권적 토지지배관계를 공인하게 하였고, 私田의 재분배는 私田畿內의 원칙에 따라 分給收租地가 축소되었으나 신진관료의 경제적 기반을 제공해 주었으며, 농민의 所耕田에 대한 소유권을 보호하여 어느 정도 농민생활의 안정을 기하게 하였다.

 종래 조선 초기의 토지제도는 과전법에서 직전법으로의 변천을 주된 제도적 골격으로 다루어 왔으나, 그것은 조선 초기 토지제도의 일부인 양반관료의 수조지 지배만을 다룬 것에 불과하였다. 양반관료의 수조지 지배인 과전은 사전억압시책으로 태종·세종년간의 私田 하삼도 移給과 還給, 세조 12년의 직전법, 성종 원년의 직전세 官收官給制로 이어졌으며, 직전세의 관수관급제는 직전 내에서 田主의 토지지배관계가 불가능하게 된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직전제마저도 명종 때에 이르러 소멸되고 말았다.

 토지소유관계는 일제시기 이래 일제 관학자와 유물사관론자에 의하여 토지국유제로 주장되어 정설로 인정되어 왔으나, 1960년대 이래 토지사유제가 주장되어 토지국유제는 하나의 표방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토지사유제임을 밝혀냈다. 토지사유제를 주장하는 근거는 공전·사전·민전의 개념에 대한 재검토와 민전의 실태에 대한 규명이었다. 공전·사전·민전의 개념에는 토지국유제론자가 말하는 바와 같이 수조관계로서의 개념이 담겨 있는 것 이외 소유관계로서의 개념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민전은 상속·매매·증여·전당할 수 있는 토지로서, 평민은 물론 양반·중인·천인 등 모든 계층의 민유지였다.

 과전법 체제 아래 영농형태는 지주의 농장형, 소농민의 자영형, 영세소농·무전농민의 병작형으로 분류된다. 영세농민이나 무전농민은 병작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과전법에서 병작을 금하고 있으나 조선 초기 이래 병작은 널리 보편화되어 갔다. 병작이 발달한 원인은 토지집적의 진전과 영세·무전농민의 끊임없는 증가,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유통경제의 발달, 농민의 小經營능력 보유와 철저한 양인 影占의 금지 등을 들 수 있다. 과전법으로 여말 권문세가의 대토지소유에 의한 권력형 농장이 사라진 이래 15세기에는 중소지주의 理財형 지주전호제가 발달하기 시작하여 16세기에는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여말·선초에 休閑法이 극복되고 連作法이 보급되면서 농업생산력이 발전하였다. 조선 초기에 연해지역의 개발과 下濕地의 水田개발은 중국 江南農法의 도입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수전농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고려말까지 중국의 농서만이 간행, 보급되었으나 세종 때 비로소 우리의 농서인≪農事直說≫이 편찬, 보급되어 농업기술의 발달에 이바지하였다. 조선 초기 이래 수전은 直播連作法이 정착되었으며 移秧法은 수리·생산기술면에서 아직 널리 행해지지 못하고 乾耕法이 조선의 기후 조건에 맞추어 독특한 耕種法으로서 개발되었다. 旱田농업은 15세기에 1년1작식의 연작법이 지배적이었고, 16세기에는 비옥한 밭에서 1년2작식 혹은 2년3작식도 행하여졌다.

 조선 전기의 상업은 농본주의 정책으로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상업은 국내상업과 대외무역으로 구분되고, 국내상업은 다시 도시상업과 지방상업으로 나눌 수 있다. 도시상업으로, 서울에 行廊상점인 시전은 상설점포이었으며 개성과 평양 등 도시에도 상설점포가 개설되고 있었다. 서울의 시전은 개성의 것을 본떠 태종 때에 대규모의 행랑을 조성한 후에 개설되었다. 시전은 宮中과 府中의 수요를 조달하는 반면 상품에 대한 독점판매의 특전을 차지한 어용상점이었다.

 지방상업으로 장시는 15세기 후반에 전라도에서 발생하여 점차 3남지방으로 파급되고 이어 전국적으로 발달되었다. 장시의 발생은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유통경제의 활성화 현상이었다. 즉 조선 초기에 휴한법이 극복되고 연작법이 보급되면서 농업생산력이 증대됨에 따라 장시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16세기에 접어들어 장시는 정부의 금압책이 이완되는 가운데 충청·경상도로 번지고 이어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각 군현마다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장시 발달의 배경은 지주제의 발달, 중국과의 사무역 발달, 군역의 布納化, 농민층의 분화와 이에 따른 상인의 증가, 防納의 성행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정부는 米·布 등 물품화폐 기능의 한계를 통감하고 화폐경제가 발달한 중국의 영향을 받아 楮貨·銅錢 등을 유통시키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경국대전≫에는 布貨를 國幣로 규정하고 있는 바, 포화에는 麻布와 綿布가 있고, 그 중에서 마포가 正布로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면포가 세종 때부터 유력한 유통수단의 기준이 되어 왔다. 이처럼 화폐유통정책이 실패한 것은 상품교환경제가 미숙한 상태인 까닭도 있겠지만 면포의 화폐적 기능에도 한 원인이 있었다.

 대외무역은 사대교린정책에 따라 朝貢과 回賜의 형식인 관무역과 使行에 의한 사무역이 행하여졌다. 대외무역의 대상국은 명·여진·일본·유구·남만 등이었다.

 수공업은 15세기에 관영수공업인 官匠制가 주도하였으나 16세기에는 민영수공업인 私匠制로 바뀌어 갔다. 관장제는 工匠이 관부에 예속되어 물품을 생산하며, 중앙관아에 경공장이, 지방관아에 외공장이 배속되었다. 공장의 신분은 양인과 公賤으로 구성되며, 그들은 관아의 수요에 따라 각기 책임량을 제작하였다. 그들의 작업은 公役에 응하는 것이므로 무상이며, 공역 이외에 사적으로 생산한 물품에는 납세의 의무가 부과되었다. 민간수공업도 독립수공업자, 농민·승려·백정 등에 의하여 수공업품이 생산되었다. 독립수공업자는 관부의 匠籍에 등록되어 공역을 부담하지만 공역 이외에 생산된 물품에는 匠稅가 부과되었다. 농촌수공업은 농민의 부업으로 생산되었으며, 승려의 수공업으로는 製紙·製鞋·木工·製麵 등이, 백정의 수공업으로는 製革·柳器제조 등이 있었다.

 철광업은 야철수공업의 성장과 함께 발달하였다. 태조 7년에 염철법이 혁파되고 鐵場都會制로 바뀌었다. 철장도회제는 철장도회에서만 선공감·군기감에 공철을 납부하고, 철장도회가 설치되지 않은 곳에서는 민영으로 광산이 운영되었다. 세조 때에 철장도회의 공철이 미곡으로 代納되었고, 성종 때에는 철장 생산지에 한하여 각 읍 採納制를 시행한 바 있다. 그러나 16세기 초에 민간 야철수공업의 성장으로 각 읍 채납제도가 무너지고 대납제가 보편화되었다.

 방직업에는 주로 絹織과 麻織·綿業이 있었다. 견직을 위해서 잠업진흥정책이 수립되었다. 조선 초기에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 蠶室都會를 설치하여, 5등호제에 따라 뽕나무 수량을 의무화하는 양잠조건을 펴 생산이 배증되었으며, 관영수공업에 의한 견직물 생산이 주도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관영수공업은 독립수공업이나 농가 부업의 민간수공업으로 바뀌어 갔으며, 농가의 견직이 장시에서 거래되었다. 면업은 여말에 文益漸이 원나라에서 목면 종자를 가져와 재배되기 시작하였으며, 목면의 전래에 따라 조선 초기 의료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종래의 주된 의료는 마포였으나 태종대에 목면이 서민 의료에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세종·세조 때에는 아래로 천민에 이르기까지 목면으로 옷을 입게 되었다. 한편 세종 때 이래 목면은 일본으로의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일본의 목면 재배는 조선보다 1세기 이상이나 늦게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16세기에 목면은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화폐의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代役價나 노비 身貢 등이 모두 면포로 납부되었다.

 제지업은 종이의 용도가 많아 발달하였는데 관영수공업이 위주이나 민영수공업도 있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경공장과 외공장의 전체 인원 중 紙匠 인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1위로 가장 많았다. 서울에는 造紙署가 있었고, 지방에는 각 읍마다 官楮田에서 官備貢物로 국가의 수요를 조달하였는데 주로 하삼도와 강원도에 배정되었다.

 造船은 민간 조선업이 없지 않았으나 관부의 조선관리가 위주였으며, 典艦司에서 造船을 관장하였다. 세조 때에 새로운 兵漕船을 개발하여 전시에는 병선으로, 평시에는 조운선으로 사용하였다.≪경국대전≫에 보이는 大·中·小猛船은 병조선을 그 크기에 따라 일컫는 것이다. 조선 초부터 제조되어 왔고 임진왜란 때에 위력을 보인 거북선은 平屋船에 두터운 널빤지(蓋板)를 복개한 군선이다.

 염업은 모든 해안에 鹽盆을 두어 소금을 생산하였다. 고려시대에 비하여 염분 수가 배로 증가되고, 황해·평안·함경도 해안에까지 염분이 널리 설치되었다. 조선의 소금은 陸鹽이 없고 海鹽 위주이며, 제염방식은 海水直煮法에서 無堤鹽田式으로, 다시 有堤鹽田式으로 발달해 갔으며, 이 시기에는 아직 세 가지 제염방식이 함께 행하여졌다. 소금의 생산은 鹽干이 신역으로 官鹽을 제조하는 것이 원칙이나 염분의 私占, 염간의 도망 등으로 그 폐단이 적지 않았다.

 수산업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어획물의 종류가 풍부하였고 연안어업이 개발되었다.≪新增東國輿地勝覽≫의 어획물에는 어류·패류·갑각류·수산동물·해조류 등이 있다. 漁法으로는 어망·漁梁·釣漁 등이 있는 바, 어망이 널리 사용되었고, 어량은 서해안 중심으로 행해졌으며, 조어에는 외줄낚시와 주낙이 있었다. 수산양식업으로 양어가 있었으며, 해조류 양식 중 김양식이 조선 초기에 이루어졌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수산제조품으로는 乾製品이나 젓갈류가 있었다. 어장은 원래 私占을 금하고 司宰監에 속하게 하였으나 어장의 사점이 일반화되어 갔다.

 국가재정의 수입원은 租稅·力役·貢物 등이었다. 그리고 세조 때에 일종의 세출일람표라 할 수 있는 橫看의 제도가 마련되고 세입일람표라 할 수 있는 貢案이 재조정된 것은, 국가재정제도에 있어서 일대 전기가 마련된 것이었다.

 조세의 수취는 건국 초에 과전법의 조세규정에 의하였으나 세종 때에 새로운 전세제도인 貢法으로 개혁되었다. 과전법의 조세규정은 1/10 수조율과 損實踏驗法 등이 중요 내용이었다. 공법은 손실답험의 폐단과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따른 전세제도의 개혁으로 田分6등법, 年分9등법, 1/20稅, 常耕의 正田과 時耕에 한하여 수세하는 續田과의 구분, 災傷田 10결 連伏에 의한 감면규정 그리고 田結制의 재조정 등이 중요 내용이었다. 손실답험법이 休閑法에 알맞는 조세규정이라면 공법은 連作法에 적합한 조세규정으로 조정된 것이다.

 역역은 徭役과 國役으로 구분되었다. 요역은 국가에서 필요에 따라 개별 민호의 노동력을 무상으로서 정기·부정기적으로 징발하는 제도이다. 요역의 기준은 태조 원년의 計丁法에 의한 3등호제이었는데 정종 원년에 人丁과 田地의 기준을 함께 한 計丁計田折衷法으로 개정되고, 세종 17년에 計田法에 의한 5등호제로 재개정되었다.≪경국대전≫에 요역은 出丁기준이 ‘田八結 出一夫’로 되어 있고, 동원 기간은 1년에 6일로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 그 기준은 지켜지지 않았다.

 국역은 항구적인 역이며 身役 혹은 職役이라 할 수 있고, 그 신분에 따라 良役과 賤役의 구별이 있었다. 따라서 역의 내용도 軍役, 혹은 吏校, 혹은 干尺, 혹은 노비身貢 등 다양하였다. 국역 부담에 있어서 당번의 의무를 지는 자는 戶首라 하고, 호수가 당번의무를 수행하는 데 소요되는 경비를 뒷바라지 하는 자를 奉足이라 했다. 국역 부담의 단위인 戶는 대개 3丁 1戶로 삼는 것이 통례이었다. 세조 때에 봉족제는 保法으로 개편되었는바, 보법에서는 봉족을 保人이라 부르며 2丁을 1保로 삼고, 이제까지의 戶 기준 대신에 丁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경국대전≫에 보인의 호수에 대한 재정적 부담인 保布는 매월 면포 1필로 규제하였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貢物은 민호가 토산의 현물을 공납하는 것으로서, 각 주현에 배정되면 다시 민호에 배정되었다. 공물은 민호에게 현물로 부과하는 것이 원칙이나, 혹은 민정을 동원하여 조달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현물의 대가로 미·포 등을 부과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민호에 나누어 배정되지 않고 관아에서 직접 마련하여 납부하는 官備貢物도 있었다. 그리고 매년 바치는 常貢 이외에 필요에 따라 징수하는 別貢이 있었다. 공물의 分定은 실제 지방관의 임의에 맡겨지고 향리가 그 실무를 맡았으며, 공물의 종류도 잡다한 까닭에 그 분정에 있어 공평하기가 어려웠다. 공물의 수납과정에서 防納과 點退는 큰 폐단이었다. 방납은 공물청납업자가 공물납부자의 물품을 대신 바치고 그 대가를 납공자로부터 배 이상으로 징수하는 일을 말하며, 점퇴는 공물납부자의 물품을 검사할 때에 규격미달의 구실로 그 물품을 도로 무르는 것을 말한다. 방납은 관료·양반·승려 등 공물청납업자가 모리를 일삼던 일이며, 점퇴는 공물 수납의 실무자인 吏胥의 농간이었다. 이러한 공물 수납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후일 공물의 田稅化인 大同法이 실시된 것이다.

 공물 이외 토산의 현물을 공납하는 進上이 있었다. 공물은 납세의 일종으로 각 주현 단위로 매년 1차 상납하는 것이나, 진상은 본래 납세의 의무라기보다 국왕에 대한 外官의 禮獻으로 궁중에 쓰일 물품을 각 도 단위로 감사와 병사·수사가 월 1차 상납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상도 공물과 같이 의무적인 것이어서, 각 도 단위라 하지만 역시 주현에 나누어 배정되어 민호의 부담이 되는 점에서 공물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공물과 진상제도는 국가와 관부 또는 왕실용으로 책정된 것이지만 실제 지방의 민호에서 징수하여 왕실과 관부에 상납하는 과정에서 공물 또는 진상을 바치고 남은 餘分을 갖고 외관들은 그것을 各司 관원과 재경관인·친척들에게 증여했으며 그 여분은 담당 吏胥들에 의해 또한 그들 이서 사이에 나누어 가졌다.

 교통기관으로 驛과 院이 있었다. 역에는 驛子를 배치하여 공문의 전달, 공무여행, 관물수송 등에 역마를 제공하였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전국 41개 驛道에 537개 역이 설치되어 察訪·驛丞이 관장하며, 역마 이용자에게 중앙에서는 尙瑞院이, 지방에서는 감사와 병사·수사가 마필 수가 새겨진 馬牌를 발급하였다. 원은 공무 여행자와 행려자의 숙식을 위해 반관반민적인 형태로 운영하는 여관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전국 1,310개소의 원이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에 공사 여행자의 숙식은 대개 客舍나 민간업자에 의해 대행되었으며, 중기에는 원은 없어지고 원터에 주점·주막이 발달하였다.

 漕運은 水運과 海運으로 각지의 漕倉에 수납된 세곡을 서울로 수송하는 것이었다.≪경국대전≫에는 9개 조창제로서 각각 조창의 收稅구역이 배정되어 있었으나 평안·함경 양도의 세곡은 조운하지 않고 고장에 그대로 두었다. 조운은 주로 관선에 의해 행해졌으나 명종 때 이래 사선의 貸船制가 행해졌다.

 烽燧는 중요한 통신기관으로 산봉우리의 봉수대를 연결하여 변경의 긴급한 상황을 서울 南山(木覓山)에 전달하는 군사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전국의 주요 봉수망은 5개 간선으로 되어 있고 5炬法으로 변경의 상황이 중앙에 보고되었으며, 대체로 변경의 상황이 12시간이면 서울에 전달될 수 있었다.

 고려말의 정치·사회적 혼란과 北虜·南倭의 침입이 계속되는 가운데 새 사회를 지향하는 사대부정권이 수립되었다. 특히 그들은 전통적인 불교와 도교 및 淫祀 등 잡다한 토속신앙과 관습을 유교적인 의례로 개혁하는 한편 양반 중심의 엄격한 신분제도와, 명분과 인륜을 강조하는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즉 유·불 교체를 비롯하여 신분계층과 향촌구조, 가족제도와 혼·상·제례 등의 변화가 수반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생의 안정과 권농정책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의식주 생활이 크게 향상되고 인구와 농지 또한 획기적으로 증가되었다.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인적 자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호적제도를 정비하고 정기적인 인구조사가 실시되어야 했다. 조선왕조는 고려말의 전제개혁에 이어 개국 초부터 奴婢辨正事業과 함께 호구 파악에 정력을 쏟았다. 호구시책 가운데 호적법의 제정과 호구 成籍의 勵行 및 이의 실시를 돕는 호패법·인보법의 실시와 노비변정사업, 군액확보책, 流移民 방지책 등은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

 법제적인 호의 등급은 그 호의 丁數·가산 또는 가옥 間架數의 다과에 따라 대·중·소의 3등급으로 나누는 것이 고려말 이래의 통례였다. 고려말의 計丁法에 따라 정해진 3등호제는 개국 초의 計丁·計田 절충법을 거쳐 계전법으로 바뀌면서 호의 등급도 大·中·小·殘·殘殘의 5등호제가 되었다. 한편 자연호의 경우는 신분과 빈부의 차이에 따라 수십 명에 이르는 대가족이 있는가 하면 불과 서너 명의 소가족도 있었는데, 일반 서민들의 경우는 호당구수가 평균 4∼5명인 소가족이었다. 호적 정리와 함께 五家作統法이라는 切隣의 공동책임제와 호패라는 신분증명의 패용을 아울러 실시하게 한 것도 호구의 파악을 위한 제도였다. 초기의 호구 파악 노력은 마침내 세조 7년(1461)에 이르러 종전과는 다른 차원의 전국적인 호구조사가 실시되어 호 70만, 구 400만이라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이를 근거로 세종조∼성종조에 이르는 기간의 전국의 실제 호구수, 즉 자연호는 대략 100만에서 150만 내외이고 인구수는 600∼700만 내외가 되며, 국역을 지는 남정수는 100만 내외가 되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조선 초기 인구의 지역적 이동은 크게 흉황·전란으로 인한 유이민과 국가정책에 의한 북방사민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말 이래 왜구의 침입으로 삼남의 연해지방이 많은 피해를 입어 인구의 유출이 많았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계와 중부 내륙지방은 인구의 유입으로 충실한 편이었다. 그러나 세종조부터 왜구가 종식되고 정치·사회적인 안정과 함께 주민 안집책과 권농책 등으로 삼남지방에는 인구의 유입이 많은 대신, 강원도와 서북지방은 주민의 유망으로 점차 피폐해 갔다. 이에 조선 개국과 더불어 추진된 북방개척과 徙民入居 정책이 세종·세조·성종조에 걸쳐 활발히 추진되었다. 이러한 전국적인 인구이동 외에도 수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됨에 따라 수도권의 인구이동이 있었는가 하면, 중앙에서는 집권세력의 교체에 따른 신흥세력의 上京從仕와 실각세력의 낙향이 수반되었으며, 지방에서는 사족과 이족의 분화에 따라 종래의 읍치지역에서 향촌지역으로 인구가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인구이동의 결과 초기에는 비교적 충실했던 서북지방은 인구의 감소와 함께 전결수가 감소하였고, 반대로 삼남지방은 유이민의 유입과 활발한 개간으로 인해 전결수가 증가하여 여말에 100만 결 미만이었던 것이 세종조에는 160여 만 결로 격증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의 신분제도는 고려 말·조선 초에 걸쳐 이루어진 사회·경제적 변화와 성리학적 신분관념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새 왕조의 개국과 함께 직면한 신분 재편성의 문제는 지배신분의 이원화와 양인신분의 확대로 해결의 방향을 잡게 되었다. 즉 지배층인 양반의 배타적·신분적 우위의 확보, 중인신분의 창출과 고정화, 국역을 부담할 양인층의 확대 및 노비신분의 확정을 시급히 시행하여야 했다.

 조선시대의 사회신분은 학자에 따라 달리 분류될 수도 있겠으나 대체로 법제적인 구분과 사회 통념상의 구분이 있다. 먼저 법제적으로는 크게 良·賤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양인은 과거 응시자격과 관료로의 진출이 허용된 자유민으로서 조세·국역 등의 의무를 지녔으며, 천인은 부자유민으로서 개인이나 국가기관에 예속되어 賤役을 담당하였다. 양인은 직업·가문·거주지 등에 따라 양반·중인·상민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나 사회 통념상으로는 士族이란 지배계급이 고려시대부터 피지배층인 일반 양인(상민)과 구분되어 있었고, 그 사족은 조선 초기에는 양반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대체로 15세기에는 양반(사족)·상민·천인의 세 계층으로, 16세기 이후에는 중인층의 형성으로 양반·중인·상민·천인의 네 계층으로 대별된다. 그런데 조선시대 신분사 연구에 있어 많은 의견이 대립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법적제도에는 양천의 규정만 보이는 데 비해 실제적으로는 良身分에서 양반·중인·양인이 별도로 파생되어 나간 적지 않은 사례를 당시의 사료나 사회관습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15세기는 사회의 신분층이 크게 개편되어 간 시기로, 양인층의 확대와 함께 지배층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었다. 양인층의 확대책으로는 노비의 변정, 승려의 환속, 身良役賤層의 설정, 新白丁의 양인화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집권사대부들은 향리·서리·기술관·서얼 등이 관료로 진출하는 길을 크게 제약하였는데, 그 가운데 향리의 과거 응시자격의 제한, 원악향리의 처벌, 군현 개편에 따른 향리의 대폭적인 이동, 그리고 限品敍用制 등을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조선시대 신분의 완성시기와 종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먼저 신분의 완성시기에 관한 견해로는 15세기설·16세기설·17세기설이 있고, 그 종류에 대해서는 4종·3종·2종설 등이 있다.

 양반은 원래 문반과 무반을 아울러 부르는 명칭이었는데, 뒤에 지배계층인 사족을 의미하는 말로 변하였다.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지주가 대부분이었으며, 과거·음서·군공 등을 통하여 국가의 고급관직을 독점하였다. 또 양반은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그들의 특권을 보장받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양반은 이른바 士·農·工·商 가운데 사족에 해당되는 최상급의 사회신분으로서, 경제적으로는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이었다. 또 유학을 업으로 하고 아무 제한 없이 관료로 승진할 수 있는 신분으로서, 실제로 중요한 관직과 제반 특권은 모두 이들이 독점하였으며 名敎와 禮法을 준수하는 사회의 지도적 계급으로서의 정신적 의무만을 지녔던 것이다. 그들은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직 현직 또는 예비관료 내지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닦던 신분이었다.

 중인은 기술관 및 향리·서리·토관·군교·역리 등 경·외의 아전직과 양반에서 격하된 서얼 등을 일컫는다. 중인에는 양반과 상민 사이의 중간 신분계층이라는 넓은 의미의 중인과, 기술관만을 지칭하는 좁은 의미의 중인이 있었다. 이 가운데 넓은 의미의 중인은 15세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조선 중기에 이르러 하나의 독립된 신분층을 이루었다.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있는 중간신분으로서의 중·외 관청의 서리와 향리 및 기술관은 직역을 세습하고 신분 내에서 혼인하였으며 관청에 근접한 곳에서 거주하였다. 그들의 성향은 기회주의적이고 이해타산적이거나 모나지 않고 세련된 처세 등의 측면에서 서로 유사한 점을 많이 공유하며 양반층에서 도태된 서얼층과 함께 중인층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중인층은 양반지배 체제하에서 양반들로부터 멸시와 하대를 받았으나 대개 전문적인 기술이나 행정의 실무를 세습적으로 담당하였으므로 실속이 있었고 나름대로 행세할 수 있었다. 특히 中·外 官衙의 행정실무를 관장했던 서리층은 비록 역사의 표면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官衙와 官員 사이를 연결하면서 실제 권력구조면에서나 권력의 행사면에 있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더구나 빈번한 政變과 士禍, 거기에 수반된 양반관료의 잦은 교체에도 행정상의 공백과 혼란이 야기되지 않고 왕조의 기본 운영체제가 유지된 것은 이들의 吏屬이 관아의 실무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胥吏는 “양반관료의 乳母”라는 俗語가 유행하였다. 또한 “江流(守令)石不轉(鄕吏)”이라 표현하듯이 郡縣 향리층은 고려 초기 이래 지방행정 실무를 세습하면서 격변기마다 그 시대적 전환기를 잘 포착하여 다음 시대의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해 나간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상민은 평민·양인이라고도 부르며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공장·상인을 말한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출세에 법적 제한을 받지 않았지만,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관료로서의 진출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상민은 보통 농·공·상업에 종사하는 생산계급으로서 납세·공부·군역·요역 등을 주로 담당하는 계층이다. 특히 병역은 양인을 주체로 하며 실제 입번하는 군정과 그 비용을 부담하는 奉足(保)과의 연대로 단위를 이룬다. 당시에는 피지배층 가운데 양인·천인의 신분상 구별이 있어 천인은 천역을, 양인은 양역을 담당하되, 양인으로서 천역을 담당하는 수도 있어 이것을 신량역천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천인에는 노비와 함께 白丁·廣大·社堂·巫覡·娼妓·樂工 등이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이들은 모두가 천인은 아니었으며 사회적으로 천시되었을 뿐이다. 즉 노비와 그 노비에서 파생된 창기·의녀·악공 등은 명실상부한 천인이었으나 백정·광대·사당·무격은 원래 천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의 직업이 사회적으로 천시되면서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까지 천시되어 조선 중기 이후에는 천인화된 것으로 보인다. 천인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노비였다. 노비에는 국가에 속해 있는 공노비와 개인에게 속해 있는 사노비가 있었다. 이러한 공·사노비는 또한 立役奴婢와 納貢奴婢로 구분되기도 한다. 전자는 관부의 노역이나 주인집의 잡역에 종사해야 하며, 후자는 관부나 주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생활을 영위하면서 일정한 신공을 바칠 의무가 있었다. 이들은 각각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불리기도 하였다. 특히 사노비는 주인에 의하여 세전됨으로써 재물처럼 취급되어 매매·상속·증여되기도 하였다. 부모 중 어느 한쪽만이 노비인 경우에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노비가 양인과 결혼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나, 양반들의 노비 증식책에 따라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양반사회는 노비제도를 기반으로 운영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분의 귀천과 역의 귀천이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국가기관이나 사가에 있어서나 노비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다. 국가기관의 온갖 천역에 公賤이 동원되듯이, 私賤은 주인 내외의 분신과 같은 존재로서 온갖 생산활동과 사환 및 잡역에 종사하였고 외거노비는 주인의 전지를 경작하거나 일정한 신공을 바쳤다. 자식 없는 노비의 재산은 그 주인에게 귀속되며 노비가 개간한 토지는 그 주인의 소유가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노비제도는 사회·경제적 조직에 있어서 실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계급적 질서를 유지하고 禮俗과 風敎를 진작시키는 데도 필수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조선시대의 신분은 아주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양반이 반역죄를 저질러 노비가 되거나, 몰락하여 중인이나 상민이 되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중인과 상민이나 노비가 과거나 군공 등을 통하여 양반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분간의 이동이 그리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는 신분제가 재편성되는 과정에 있었으므로 중기 이후보다는 신분이동이 어느 정도 개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는 고려적인 불교의식과 토속적인 음사 및 비종법적 가족제도가≪朱子家禮≫와≪小學≫교육을 기반으로 하여 점차 성리학적 유교사회로 바뀌어 갔는데, 이러한 변화는 17세기를 분기점으로 후기사회로 넘어가는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즉 夫妻兩邊的 방계가족의 형태, 동성결혼과 異姓收(侍)養, 男歸女家婚과 자녀균분 상속제, 부처 또는 부자의 異財, 가계상속에 있어서의 ‘兄亡弟及’, 자식이 없는 경우 불입양 및 자녀 윤회봉사와 같은 전통적인 유제를 이어받은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주자학적 禮制와 종법적 가족제도에 입각하여 종래의 유제를 부계친족 중심의 가부장적 가족제도, 동성불혼과 이성불양, 親迎禮와 장자봉사제, 자녀차등상속제와 같은 가족제도로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상·제례와 장법도 대체로 15세기 전반까지는 전통적인 불교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고 소수의 사대부 가정에 한해≪주자가례≫가 수용되다가 성종조 이후에 가서 점차 유교적인 상례와 제사 절차에 따르게 되었다. 특히 남귀여가혼·자녀 균분상속제·자녀 윤회봉사를 특징으로 하는 조선 초기의 가족 및 상속제도는 그것이 서로 인과관계를 가지면서 성씨, 본관의식과 족보 편찬에도 영향을 미쳤다. 남귀여가혼은 결과적으로 딸(사위)과 그 소생(외손)을 아들 또는 친손과 동일시하면서 부처·부모·자녀·내외손을 각기 대등한 위치에서 간주하려는 쌍계적[兩側的] 친족체계를 낳게 하였다. 그러한 혼인풍속과 가족제도는 다시 자녀 균분상속제를 낳게 하였으며, 그 균분제는 다시 부모의 제사를 균분받은 자녀들로 하여금 돌아가면서 봉사하는 관행을 낳게 하였다. 그리고 딸이 있으면 아들이 없다 하더라도 입양하지 않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습은 다시 자녀와 그 내·외손들을 한 마을에 모여 살게 하는 居住相을 낳게 하였다. 한편 각자의 혈통과 재산은 부모 양쪽을 비롯한 내·외 조상으로부터 이어받게 되고 그 양변의 혈통과 재산의 유래를 소급, 추적하는 데서 世系圖·八高祖圖·族圖 등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양반사회에 있어서 혈통의 유래와 승음·응시·출사 및 재산의 傳係와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으며, 당시 성과 본관에 대한 의식과 그 姓貫 자료인 족보의 편찬체제와도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조선 초기의 의식주 생활은 유교적인 합리주의와 사대부의 검약정신에 영향을 받아 보다 실용적인 방향으로 향상되어 갔다. 목면 재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종래의 마포·저포와 함께 국민 衣料의 주종으로 자리잡게 되고, 중국으로부터 각종 예복과 견직물이 유입되면서 옷감도 다양해져서 의생활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한편 고려 말 이래 새 선진농법의 적용으로 새로운 품종이 개량되고 시비법 및 재배법이 개발됨으로써 주곡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곡류·채소류·과일류가 생산되고 풍부한 어패류 등으로 식품이 다양해졌다. 또한 온돌이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공·사의 건물은 춥고 더운 계절에 맞추어 따뜻한 방과 서늘한 마루를 갖춤으로써 보다 쾌적한 주거환경을 마련할 수 있었다. 특히 세종 때부터 화재 예방책으로 초가 대신 기와를 권장하자, 중외 관아·누정·창고 및 사대부·토호들의 가옥은 기와집으로 바뀌어 갔으나 일반주민의 주택은 거의 초가였다.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유교적인 민본주의와 농본정책을 표방하여 여러 가지 교화사업과 농민생활의 안정책을 실시하였다. 양반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회신분 질서의 유지와 농민의 생활안정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반 지주들의 토지겸병을 억제하고 농민이 토지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농번기에는 농민들이 잡역에 동원되지 못하게 하고 각종 재해와 질병에 걸렸을 때는 조세와 요역을 감면해 주는 등 여러 가지 진휼과 의료·구제시책을 실시하였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지배층은 고려 말기의 시련과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로서의 자체 정립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국토와 그 주민에 대한 새로운 파악을 통하여 국가체제와 통치방식을 새로운 형태로 정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새로운 敎學으로서의 性理學을 유일한 지배이념으로 정립하고, 새로운 통치준거로서의 여러 법전을 정비하며, 일상의 언어에 맞는 한글을 창제하였다. 조선 초기에 정립된 문화형태의 성격을 규정하는 요인은 대개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국가체제를 뒷받침하는 사회경제적 기본계층이 새로이 정립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즉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所耕田’이라는 자기 이름으로 된 소유 겸 경작지를 자기 혈연가족으로 경영하면서 국가를 직접 상대하는 양인 자영농을 중심으로 하는 자영농층이 보편적으로 정립되었다. 국가는 이 계층에게 기본 국역인 군역을 부과하는 한편, 이 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부세제를 운용하였다. 그 구체적인 형태가 計田法的 수취제도라는 것으로 구현되었다.

 근착하고 있는 현실의 자영농민층은 일상의 생산활동에서부터 외적을 물리치는 일에까지 결코 무시하지 못할 實在로서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랜 기간 동안 자기 성장을 수행함으로써 이 시기 지배층에게 통치의 대상으로서의 객관적 실체를 더 크게 일신시키기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이전의 일방적인 지배방식보다도 상대적으로 그들을 교화해가면서 통치하는 방식으로 지배체제를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른바 위민정치나 훈민정책이 강조된 사실이 그 같은 현상을 적실히 말해 준다.

 조선 초기 문화형태의 성격을 규정한 또 다른 요인으로서는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교학의 확산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이전의 불교라든가 전통유교에 비하여 보다 理智的인 새로운 계층적 존재론과 인식론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으며, 정통론·명분론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옹유하고 있었다. 성리학적 인식론은 객관적 사물의 실재를 긍정하면서 좀더 그 이치를 탐구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 초기 문화의 성격은 양인 자영농층의 보편적 성장과 그것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성리학적 가치지향의 국가체제의 확립, 즉 농민층의 객관적 실체가 사회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것의 실재를 새로이 인식하고 그것을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의 지배질서 속에 다시 편성함으로써 국가체제를 확립한다는 두 가지 측면의 통일적 작용에 의하여 규정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통치문화는 우선 지배체제를 객관적 준거에 따라 개선하여 정립한다는 형태로 구현되었다. 그 중에서도 전국의 토지와 호구를 중심으로 하는 國勢의 파악은 가장 급선무였다. 이에 일찍부터 호적과 군적을 작성하고 양전을 거듭하는 한편, 그 전체를 종합한 각 지역의 地理志를 여러 차례 편찬케 하였다. 그래서 작성된≪八道地理志≫라든지 그것의 종합형태인≪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각 군현단위로 名號와 연혁 및 역대의 領屬관계, 소금·철·양마 등 특수 산물의 유무, 토지의 肥瘠과 기후 및 민속, 호구수와 전결수 및 토산물의 종류, 조세·歲貢과 그 轉輸의 방법, 영·진의 위치와 군사·전함의 수, 부속도서의 정세, 煙臺·烽燧, 왕릉 및 선현의 묘, 土姓과 지역 출신 명현 등의 10여 항목에 걸쳐 실로 주밀한 파악이 이루어졌다.

 국가 수취제도의 정비도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였다. 즉 세종대에는 田制詳定所라는 특별기구를 설치하여 국왕이 친히 독려하면서 새로운 양전·수세법을 강구하도록 함으로써 결국에는 貢法田稅制를 정립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과정에서 전국 관민들에게 새 법의 편의 여부를 물어보도록 해서 여론을 청취한 일도 있었다. 이제 국가의 전세제도와 같은 큰 제도의 변천을 논의할 때에는 어느덧 농민층까지 그 논의의 대상으로 참여시킬 정도로 역사는 진전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제도의 정비과정에서 여러 가지 척도를 考正하고 통일하게 된 것도 이 시기 문화의 중요한 성과였다. 그래서 이제 도량형제도의 기본을 이룩할 수 있었으며, 토지의 양전이라든가 의례·음악의 音律을 조종하는 데에도 일정한 객관적 기준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통치제도의 정비는 국가재정의 지출면에서도 이루어졌다. 가령 이전까지는 중앙의 각 기관에서 供用하는 물품의 일정한 지출규정이 없었던 까닭에 많고 적은 것이 일정하지 않았으나, 이 시기에 와서 호조의 계청에 따라 비로소 ‘式例’를 정해두고 그 규정에 의해 집행하기에 이르렀다. 또 요컨대 임금의 所用도 유한하여 임의로 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다. 徵斂에 법도가 없고 용도 또한 무절제하였던 이전까지의 현실을 비판하고 오랜 세월을 두고 가다듬은 결과, 성종대에는 이른바 ‘式例橫看’이라고 하는 기본적인 재정지출규정을 정비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공납을 비롯한 수취제도의 개선이 상당 부분 이루어졌을 것이다. 즉 이전에는 지배층의 자의에 의존해 오던 재정수납이 이 시기에 와서는 객관적 준거를 가진 제도적인 것으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조선 초기의 통치문화는 이전에 비하여 교화적인 측면을 매우 강조하는 편이었다. 인간은 天賦의 理를 타고났으므로 비록 온전하지는 못할 망정 자율성과 주체성을 지녔다. 이러한 인간을 상명하복의 통치질서 속에 안착시키자면 무엇보다도 그들을 가르쳐 깨우치고 길들여야 하는 것이 필연의 과제로 부각되었다. 이 시기 교화의 기본 지향은 명분과 정통성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도덕규범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세종대 忠·孝·烈에 관한 기본덕목을 널리 가르치기 위하여≪三綱行實圖≫를 펴낸 것은 교화의 구체적인 실례이다.

 여기에서 충·효·열의 덕목을 최고의 윤리규범으로 거듭 주장하는 한편, 그것을 범하는 경우는 綱常罪라는 가장 무거운 죄목으로 다스렸다. 그리고 이른바 嫡·庶의 차대가 이 시기에 와서 처음으로 제도화된 사실도 명분론의 하나인 정통론과 관련된 것이었다. 각 군현마다 향교를 세우고 ‘守令七事’에 학교교육의 흥기를 규정함으로써, 성리학적 도덕규범을 중심으로 하는 王化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 장려하였다. 이 시기에는 개인으로부터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모든 국가체제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명분과 직역에 따른 계층적 사회규범과 성리학적 도덕관념이 일원적 체계로 점차 자리잡아 갔다. 가령 主·奴의 관계를 君·臣의 관계와 동일하게 명분론적 규범으로 설명하게 된 것도 이 시기에 와서의 일이었다.

 이 시기에는 국가의 기본의례를 새로이 정비하기 위하여 儀禮詳定所를 설치하고 5禮를 강구·편찬케 하였는데, 그 순차에 있어서 송나라의 예제를 따른 것은 역시 성리학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가령 5례 가운데 가장 중히 여기던 吉禮를 두고 말할지라도, 모든 祭儀에는 공경과 정성을 다하되, 명분에 맞지 않는 과람한 경의를 표하거나 혹은 아첨함으로써 복을 빌어오던 형태는 國家祀典에서 완전히 혁파되었다.

 성리학적 명분론은 華·夷관계의 명분 또한 강조하였다. 이에 중국에 대한 事大의 예를 다하는 한편, 오랜 국가의례로 지켜오던 제천행사를 천자국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혁파하였다. 그래서 국가의례의 정리에서도 명분론을 스스로 지켜서 자국을 제후국으로 자처하였다. 성리학적 세계관의 발현이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이룩된 큰 업적으로는 訓民正音의 창제를 들 수 있다. 그것은 자국의 백성들이 날마다 쓰는 국어를 기준으로 바로 거기에 맞는 글자를 만든 것이었다. 국어에 맞는 글자가 창제됨으로서 이후 자국의 말과 글 자체의 발전은 물론, 이른바 기층문화가 자체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트이게 되었다. 그래서 보편적 농민층을 기본으로 하는 절대다수의 국가 구성원이 비로소 자신의 의사를 문자로도 표현할 수 있는 문화생활권 안으로 들어설 수 있게 되었으며, 이로써 이른바 동족문화라는 것의 성립이라든지 그 변증법적 발전이 일어날 수 있는 독자적 바탕이 마련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성리학은 전통유교보다도 훨씬 더 배타적인 교의를 지닌 지배이념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지배층은 고려시대까지 국가적으로 숭상해오던 불교라든가 도교를 이제 이단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국가적 숭상은 결정적으로 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祖上神·家廟 외에 다른 잡다한 祀神행위는 이를 淫祀로 금단하였다. 지방에서의 祀典의 정비는 중앙의 축소판으로 각 고을마다 1廟(文廟), 3壇(사직·성황·여단)을 두었다.

 먼저 불교에 대해서는 태종과 세종대에 대대적인 정리를 단행하였다. 종래 전국적으로 불교를 보호·관리해 온 僧錄司는 이 때 아예 혁파되었다. 불교종단도 禪·敎 양종으로 통합되었으며 그 소속 사원도 크게 축소되었다. 또한 불교사원에 절급해오고 있던 收租地를 극히 일부만 남긴 채 축소하고 그 노비는 아예 혁파하였다. 그리고 度牒제도는 승려가 되는 길을 극히 제한하였고 僧科도 점차 축소되어 16세기 후기에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승려의 도성출입도 금지되어 갔다. 오히려 국가에 어려운 역사가 있을 때마다 다수의 승도를 동원하여 복역시키는 일이 자주 벌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불교는 이제 민간신앙으로서의 명맥만을 유지하면서 현실의 고난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백성들의 도피처로 불교가 선호되었던 것이다. 한편 도교 관련 여러 국가기관도 점차 혁파되고 오직 昭格署만이 남아 의례적인 齋醮를 행하게 되었는데, 그나마 사림정치가 성숙함에 따라 소격서마저 점차 없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 과학과 기술은 자주적 성향이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특히 세종 때에 전개된 과학과 기술은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서 集積된 한국과학을 결산하는 것이었다. 중국과학뿐만 아니라, 문명의 교류에서 얻어진 모든 지역의 과학문명을 하나로 용융시키는 도가니와도 같았다. 과학·기술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수준 높은 학문·문화·예술적 성과가 짧은 동안에 이루어진 적은 한국의 역사에서 일찍이 없었다. 그것은 조선식의 창조적인 과학·기술전통의 구축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서방세계는 물론, 아랍세계와 중국의 과학기술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태종 3년(1403)에 왕은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癸未靑銅活字의 주조를 강행하였다. 이 사업은 세종에 의해 훌륭하게 계승됨으로써 조선식 활판 인쇄기술은 크게 발전하고 완성되었다.

 이러한 발전적 업적은 우리 나라 과학의 황금시대로 불리는 세종 때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雨量計의 발명도 그 하나이다. 세종 23년(1441)에서 24년에 걸쳐서 測雨器와 水標라고 명명된 강우량의 측정기가 발명되어 강우량의 수량적 측정법이 완성되었다. 또한 새로이 천문대도 설립되었다. 大簡儀臺라고 불린 景福宮의 천문대에는 簡儀·水運渾天儀와 渾象·圭表·丁方案(方位指示表)·각종 해시계 등이 설치되고, 自擊漏라고 불리는 自動報時 물시계와 屋漏라고 불리는 天象時計 등의 장치가 부설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군사기술에서도 조선의 특색이 강하게 나타났다. 조선식 火砲와 龜船의 출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화포는 중국의 영향에 의하여 고려말부터 실용화되었는데, 세종 때에 이르러 중국 양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조선식으로 규격화되어 화포의 전반적 改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화포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하여 그 다음 왕대에 나타난 火車는 동시에 다수의 로켓을 발사하는 일종의 장갑차였다. 한편 귀선은 고려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서 격심했던 왜구의 침입으로 속을 썩인 조선정부가 그 白兵戰術에 대비하여 만든 것이며, 고려의 突擊戰艦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만들어 낸 조선 특유의 전함이다. 그것은 15세기 초에 건조되었는데, 그것이 교묘한 전술에 의하여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한 것은 16세기 말의 임진왜란 때였다.

 농업기술도 세종 때에 큰 발전을 보았다. 그 때까지의 한국 농업기술은 주로 중국 농서를 교본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은 농서와 실제의 農法, 그리고 한반도의 남부와 북부 사이에 차질을 가져왔다. 그 차질을 해소하는 길은, 조선의 농법을 더욱 앞선 기술에 의해서 개량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쓰여진 것이 세종 11년에 완성된≪農事直說≫이다. 그것은 각 지방의 농법을 널리 조사하여 그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발전된 기술을 요약한 것이다.

 醫學 분야에서는 한국 醫藥學의 체계화와 동양의학의 집대성이 특히 주목된다. 고려말에 시작된 한국산 의약에 의한 독자적 처방의 체계화는 조선에 이르러 더욱 확대되었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 걸쳐서≪鄕藥濟生集成方≫과≪鄕藥本草≫가 편찬되어, 한국산 의약에 관한 의학적·本草學的 지식이 정리되었다. 이것들을 하나로 요약하고 의약학적 연구를 더해서 체계를 세운 것이 세종 15년(1433)에 완성된≪鄕藥集成方≫이다. 이것은 의·약학 분야에서 기존의 중국 의존에 대한 탈피로서 획기적인 일보 전진이었다. 이들 연구와 병행하여 이루어진 것이≪醫方類聚≫의 편찬이다. 세조 원년(1455)에 완성된 이 의학대백과사전은 우리 나라와 중국의 의서 153종을 집대성한 것으로 15세기 최대 의서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으나,≪의방유취≫는 조선의 개성이 별로 나타나 있지 않다.

 조선 초기의 문학은 고려의 것을 계승하며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세종 때 훈민정음, 즉 한글의 창제는 단순한 문학적 차원만이 아니라 우리 문자생활에 일대 혁명을 예고했다. 한문학은 성리학을 이념적 바탕으로 삼고 있던 조선왕조의 건국 주역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조선 초기의 그것은 불교사상과 도교사상을 배척하고 성리학 유일의 논리를 내세웠다. 그들은 불교사상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면서 문학은 ‘載道之器’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文以載道論’은 이후 權近의≪入學圖說≫등에 의해 확고한 이론적 체계가 갖추어지면서 조선 초기 한문학의 주류로 떠올랐다. 또한 성종 때 徐居正 등은 중국의≪文選≫에 대응하여≪東文選≫을 발간함으로써 조선 초기 詞章派 문학의 기틀을 잡았다. 국문 시가문학은 樂章·景幾體歌·歌辭·時調로 이루어졌다. 악장·경기체가·가사는 敎述詩이며, 노래로 부르는 시이고 음악이면서 문학이다. 이들은 악장에서 경기체가로, 경기체가에서 가사로 올수록 음악으로서의 구실은 줄어들고 문학으로서의 기능이 확대되었다. 우리말 노래인 악장은 조선왕조의 창업과 더불어 등장했는데, 나라에서 거행하는 공식적 행사에 소용되는 노래이다. 그러나 악장은 목적하는 바나 나타내는 내용은 아주 뚜렷하지만, 독자적 형식을 형성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악장과 경기체가는 한시에서 국문시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이다가 시조와 가사가 점차 국문학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조선 초기의 문자생활은 한자로 행해졌다. 나라의 공적인 기록이나 문서, 즉 역대의 실록이나 각종 법령, 關文이나 牒呈 등은 모두 한자로 쓰여졌던 것이다. 이 가운데 실무와 관련된 법령이나 공문, 외교문서 등은 한자와 함께 이두[吏讀]가 쓰였다. 이처럼 이두를 포함하여 한자로 행하던 문자생활은 공적이 아닌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학자들의 문집은 한문으로 이루어졌으나, 일상생활과 관련된 각종 소원문서와 재산매매나 증여의 文記 등은 이두로 작성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자생활은 일반백성들의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세종 25년(1433)에 훈민정음, 곧 한글이 창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글은 한자에 의한 문자생활을 대신하지는 못하였다. 공적인 문자생활은 여전히 한자로만 행해졌다. 공적이 아닌 문자생활에 국한하여 한글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한자나 한문을 공부하기 위해서거나 백성의 교화나 종교의 홍보를 위한 문헌의 간행에, 아녀자들의 주고받는 편지에 한글이 사용되었다. 한글이 창제됨으로써 한자와 한글에 의한 우리 나라 문자생활의 이중구조는 조선시대 전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한글은 공적인 문자생활에 등장하지 못하였으나, 창제 이후 꾸준히 보급되어 사용의 영역을 확대하여 나갔다.

 조선 초기에는 건국과 함께 새 문화창조의 기운으로 음악·미술 등 예술분야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조선 초기 음악은 예악사상에 의한 雅樂부흥의 노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세종 때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조선 초기의 음악문화를 특징짓는 아악부흥은 새 왕조가 성리학의 지배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예악사상을 중요시한 결과로 이루어졌던 것이며, 그 음악적 업적은≪樂學軌範≫에 정리되었다.

 조선 초기의 회화는 고려시대 회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또 중국의 화풍을 수용하여 다양한 한국적 화풍을 형성하였으며, 조선 중기는 물론 일본 室町시대의 수묵화에까지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동아시아 회화사에 획기적으로 기여하였다. 이 때에는 山水畵를 비롯하여 人物畵·翎毛畵·花鳥畵·草蟲畵 등 다방면의 회화가 발전하였다. 이의 제작에는 왕실·사대부 출신의 화가들과 화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영향력이 컸던 것은 安堅의 화풍이었다. 특히<夢遊桃源圖>는 안견의 대표작으로, 전체적인 구도와 구성은 말할 것도 없고 세부의 묘사에 이르기까지 그의 탁월한 창의성과 지혜, 고도로 숙달되고 세련된 표현력과 묘사력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은 안견의 그림, 안평대군 등의 시와 글씨가 어우러져 ‘詩·書·畵’ 三絶의 경지를 이루고 있어 일종의 종합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서예는 원의 새로운 서풍을 받아들인 고려말의 전통을 이으면서 발전하여 갔다. 고려말에 유입된 원나라 趙孟頫의 松雪體가 널리 확산되어 조선 제일의 서체로 자리잡았으며, 우리 나라 전래의 서풍에 큰 영향을 끼쳤던 王羲之體의 전통이 조선 초기에도 변함없이 존숭되어 서예의 기반을 이루었다. 이 밖에 고려말 서풍이 조선초로 이어져 金石과 寫經에 그 영향을 다분히 나타내었다. 아울러 훈민정음 반포 초기의 한글서체는 점차 쓰기에 편리한 筆寫體로 변화하였다.

 도자기 공예기술에서 高麗靑磁는 조선에 이르러 특징있는 粉靑沙器를 거쳐 白磁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고려의 자기와는 형식과 성질이 다른 조선백자로 변모한 것이다. 분청사기는 백토 扮裝으로, 백자는 백토로 이루어지므로 표면이 백색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청화백자는 세종 때에 중국에서 처음으로 수입되어 15세기 중엽부터는 조선에서도 만들 수 있게 된 사기인데, 그 기형과 청화문양의 주제는 중국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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