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4. 조선
  • 3)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3)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15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사회경제적 변화에 조응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건국을 주도하여 정권을 독점해 왔던 훈구세력이 양반관료제의 모순을 야기하고 있었고, 이에 수반하여 과전법의 붕괴, 지주제의 발달, 상품의 유통과 貢納制의 모순 심화, 軍役制度의 붕괴, 국제교역의 발달 및 마찰 등 새로운 사회경제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타고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이 사림파였다. 사림파는 재지중소지주에서 성장을 거듭하여 점차 훈구파를 대신할 정치세력으로 자리잡아 갔으며, 그들은 훈구파 지배하에서 야기된 각종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고 유교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道學政治의 이념을 바탕으로 향촌질서를 재편하는 한편 書院의 건립, 性理學의 보급, 경제개혁 등 다양하고 구체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볼 때, 15∼16세기에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치사회적 갈등구도 속에서 후자가 전자의 대체세력으로 등장하여 마침내 사림정치를 실현하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훈구세력에 의한 양반관료제의 모순이 누적되어 가는 가운데 과전법이 붕괴되고 지주제가 발달하였다. 과전법의 붕괴로 국가기관 절수지나 私處 절수지 모두에게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모습이 점차 쇠퇴하여 갔고, 16세기로 접어들면서 소유권적 토지지배 형태가 확립되었다.

 과전법의 붕괴와 함께 사족 관인층을 중심으로 하는 지주들은 상속·혼인이나 개간·매득 등을 통하여 농장을 확대하였다. 또 농장의 확대가 일반적인 추세였지만, 전세·요역·공물·군역을 바침으로써 국가를 지탱하였던 양민 자영농층의 개별 경영이 이 시기의 기준적인 영농형태였다. 그러나 16세기로 내려오면서 생산력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양민 자영농층의 몰락으로 소농민경영의 분화가 가속화하여 병작영농이 점차 보편적인 영농관행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처럼 16세기의 조선에서는 사족의 地主化와 대다수 하층민의 無産化라는 사회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한편 상업에서는 점차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장시의 발달로 이어졌다. 16세기가 되면 장시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충청·경상·경기도 등지로 확산되어 갔으며, 특히 임진왜란을 겪은 후부터는 장시의 수적 증가와 더불어 出市 횟수도 잦아지는 등 더욱 성행하는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 중에서 상인으로 전환하는 인구도 늘어났다. 장시의 성립으로 인한 유통경제의 발달로 화폐경제도 크게 변화하였는데, 이 시기의 주된 화폐는 면포였다.

 이에 따라 연산군 때를 거치면서 횡간이 무시되고 加定·引納 등이 일어났으며, 불산공물의 분정은 구조적으로 방납을 조장하고 공물부담 규정의 모호성은 부담의 극심한 不均현상을 초래하였다. 특히 방납은 당시 권세가들의 비호하에 행해져 농민들에게 엄청난 해독을 끼쳤으므로 세조 때부터 그 폐단에 대한 시정이 논의되었다. 그런데 방납은 유통경제의 발달을 전제로 하였으므로, 방납에 대한 근본적 개혁은 유통경제의 발달을 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했다. 즉 공물의 대가로 미곡이나 포를 거두어들이는 형태의 운영이 그것이었는데, 결국 이는 大同法으로 귀결되었다.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 신분제와 兵農一致制에 입각한 군역제도 역시 붕괴되고 점차 收布化로 나아갔다. 신분제 외에 병농일치제 그리고 奉足制를 기반으로 한 조선 초기의 군역제는 균등한 군역 부과와 군액의 증가를 목적으로 했던 保法이 人丁만을 고려하는 군역제도로 전환되면서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正軍과 保人 중 토지가 없는 빈한한 농민들은 피역을 위해 유리·도망하였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一族과 切隣에게 대신 부담을 지우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군역의 苦役化는 代立을 불러왔다. 자신의 정상적인 영농을 위해서 혹은 가혹한 役使를 피하기 위해서, 나아가 원거리 番上 근무의 고통과 경비를 덜기 위해서 농민들의 대립이 성행하였고, 거기에 대립을 통해 이익을 꾀하려는 諸司官屬들의 侵虐까지 작용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代立價가 폭등하면서 정부의 개입을 불러오게 되었다. 정부는 대립가를 公定하는 조치와 함께 차츰 軍籍收布法으로 방향을 바꾸어갔다. 이러한 납포제는 신분제와 병농일치제에 입각한 군역제와는 다른, 상비군으로서의 급료병제 성립의 전제가 되었다. 한편 지방에 留防하는 군인들에게도 兵使·水使 등의 지휘관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방군수포를 강요하고 있었다. 방군수포의 보편화는 지방군을 지극히 허술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조선 초기 국방체제의 근간인 진관체제의 허설화를 가져왔다.

 국내에서의 경제변동은 국제교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15세기의 공무역체제가 점차 해이해지면서 16세기에 이르면 使臣 또는 使行員들에 의하여 私貿易이 이루어지고 직물류나 보석류 등의 사치품이 수입되기 시작하였다. 사무역의 주도세력은 왕실·戚臣·權貴 등의 특권세력과 富商大賈들이었으며, 사무역은 척신정치의 물적 기반을 제공하고 국내 상업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무역은 進上과 回賜라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구리·금은 등이 수입되고 쌀·직물류·약재 등이 수출되었다. 16세기 이후에는 사무역이 크게 발달하면서 국내 상업 발달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조선정부의 재정궁핍으로 일본인에 대한 통제책이 강화되고 양국간의 통교가 어려워지면서 三浦倭亂·乙卯倭變과 같은 왜변을 초래하였다.

 신흥사족 혹은 재지사족이라고도 하는 士林은 祖先傳來의 田地 및 노비의 매득·개간·겸병 등의 수단을 통해 중소지주로서 안정된 생활을 누렸고, 祖業繼承과 子女均分相續制를 이용하여 사족 공동의 이익을 지켜 나갈 수 있었다. 나아가 이들은 향안을 작성하고 향회 또는 留鄕所를 조직하여, 재경관인으로 이루어진 京在所와의 연결을 꾀함으로써 향촌사회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재지사족들은 그들 상호간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하층민을 통제하기 위해 鄕規·鄕約·洞契 등을 조직하여 향촌사회를 운영해 나갔다.

 金宗直과 그의 문인인 金宏弼·鄭汝昌의 교육활동에 의해 영남·기호지역 사림들의 인간적·학문적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성종 16년(1485) 이후 훈구세력에 대응되는 정치세력, 즉 사림파로서 모습을 갖추어 갔다.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은 훈구세력과의 갈등과 충돌을 예고하였다. 성종대 중반 이후 훈구세력 기용의 부당성과 昭陵復位 주장 등 과감한 언론을 행사한 이들은 연산군의 즉위 이후 그 세력의 한계가 노출되면서 훈구파로부터 탄압을 받는 사건, 즉 戊午士禍가 발생하였다. 무오사화는 세조의 집권을 부정하고, 이에 반대한 인물들을 推獎한 金馹孫의 史草가 빌미가 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세조대 이래 정치·사회·경제적 여러 특권을 향유하고 비리를 저질러오던 훈구파를 사림파가 견제하려 한 데서 발생하였다. 이로써 성종대 이래 중앙정계에 진출했던 사림파는 일대 타격을 받게 되었다. 연산군의 생모인 尹妃가 폐위·賜死된 사실로 발단이 된 甲子士禍는 궁중과 결탁한 朝臣과 府中의 조신간의 대립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무오사화에서 잔존한 사림파도 화를 입었다.

 이후 전개된 연산군의 亂政은 中宗反正으로 종식되었다. 반정을 통해 집권한 공신집단은 이후 政曹의 고위직을 장악하여 정국을 그들 중심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중종 9년 趙光祖가 정계에 진출한 이후 사림파는 중앙정계에 재진출하여 급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훈구대신 집권하에 빚어진 각종 정치적·사회적 비리를 척결하고 ‘至治’를 실현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이는 곧 훈구파는 물론 온건파 대신·국왕의 완강한 저항을 야기하였고, 그 결과 僞勳削除 사건을 계기로 사림파가 크게 희생되는 己卯士禍가 발생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南袞·沈貞·金安老 등으로 이어지는 훈구대신들이 다시 정국을 주도하였으나 중종 말기 이후 인종초까지 사림파가 차츰 등장하여 그들의 영향력이 점증하는 가운데 인종의 외척과 명종의 외척간의 갈등이 생겨나고 있었다. 명종의 즉위와 함께 외척 尹元衡과 권신 李芑는 자신들의 세력을 증강하기 위하여 乙巳士禍를 일으켰으며, 사림파는 다시 한 번 중앙정계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척신정치가 지속되는 동안 사림파는 서원설립을 통하여 자파세력의 저변확대를 위해 노력하였고, 이는 결국 선조대 사림정치가 성립되는 주요한 토대로 기능하게 되었다.

 사림은 교육활동을 통하여 학파를 형성함과 아울러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또 그들은 성리학적 정통성과 정치적 명분의 필요에서 鄭夢周→吉再→金叔滋→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학통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재지적 생활기반에서 상호관계를 맺으면서 학문세계나 현실정치 개혁에서도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학문이나 활동면에서 鄕黨的 색채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鄕飮酒禮·鄕射禮의 勵行, 향약·향규의 시행, 서원건립 등을 통해 보여준 행동유형과, 조광조 등 ‘己卯士林’들의 개혁정치에 투영된 현실인식 및 대응자세에서 이는 쉽사리 감지된다. 이러한 향당적 요소에 기초한 향촌질서의 확립은 성리학적 윤리질서와 통치질서의 기축이 되었다.

 사림파는 道學政治를, 새로운 정치질서의 수립을 통해 군주나 백성의 天命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상사회의 실현 즉 ‘지치’로 규정하였다. 이를 위해 사림파는 위민·애민에 정치의 목표를 두고 그 실천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들은 聖君으로서의 자질, 군주와 신하 상호간의 믿음, 言路의 개방과 군주의 納諫이 필수적임을 강조하였으며, 나아가 言官의 활동을 탄핵에 국한시키지 않고 국가정책의 수립과 같은 보다 차원 높은 수준으로까지 확대하고자 하였다.

 조광조가 등용된 중종 9년(1514)부터 사림파는 三司를 장악하였다. 그들은 특히 홍문관을 개혁정치의 이념과 방향을 정립하고 그 실천방안을 확정하는 産室로 활용하면서 본격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사림파의 언론활동은 전통적 명분의 회복과 인습·舊制의 革去 및 성리학적 윤리질서의 확립과 새 향촌질서의 수립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추진되었다. 그리고 개혁정치를 추진할 인적 기반의 확충을 위해 훈구파에 대한 대규모의 削勳과 賢良科를 실시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렸다. 그러나 훈신과 척신의 반발로 사화가 일어나 사림파의 다수가 처형되고 그들이 이룩한 성과도 혁파의 대상이 됨에 따라 실패로 돌아갔다.

 서원은 훈구파의 탄압을 받은 사림파가 을사사화 이후 향촌 지배체제 확립을 목적으로 건립하였는데, 여기에는 과거를 위주로 하는 官學이 쇠퇴한 데다 사림파의 내적 성장을 위한 그들의 私學 건립 의지도 아울러 작용하였다. 그리고 성리학이 점차 관념론적 理氣論을 지향하던 무렵의 사상적 분위기 역시 서원의 확대에 일조하였다. 최초의 서원은 중종대 周世鵬이 건립한 白雲洞書院이었고, 李滉에 의해 보급·정착되었다. 초기의 서원은 관학의 보조적 기능을 수행하는 정도의 기구로 인식되었지만, 이황에 의해 사림의 講學·藏修處로 그 성격이 분명하게 되면서 사림파의 향촌활동에서의 중요한 기반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선조대 이후 그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피봉사자도 사화기에 피화된 인물, 사림 각 학파의 영수,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확대되었다.

 선조대 이후 서원은 朋黨政治와 관련되면서 그 역할이 증대되어 갔고, 건립의 사정도 달라지게 되었다. 집권세력의 도학적 정통성 부여를 위한 자파계 인물의 재향처로서 또는 사림간의 상호결속을 위한 취회소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중반 이후 붕당정치가 전개되면서 향촌사림의 여론이 정치에 큰 역할을 끼치게 되고, 향촌사림 역시 중앙 정치세력과 연계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 함에 따라 서원은 그 중심적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16세기 사림파의 정계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그들은 소농민경영의 안정을 통한 자신들의 계급적 안정과 성장을 위한 권농정책을 다각도로 모색하였다. 이 시기에는 훈척세력이 소농민을 동원하여 추진한 低平·低濕地 개발이 활발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사림파에 의해 川防 즉 洑의 설치와 활용이 본격화되기도 하였다. 천방은 堤堰에 비하여 가용처를 더 많이 개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대규모의 관개가 가능하였으므로, 16세기 이후 우리 나라 수리관개의 대종을 차지하였다. 이 시기에는 각 군현단위로 사림파 인사들이 향권을 주도하면서 새로운 경지의 개발과 더불어 천방을 많이 축조해 나갔다. 특히 훈척세력이 다수의 노비와 토지를 소유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토지를 잃게 된 소농민층의 파산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자, 사림파 관료들에 의해 豪勢家의 대토지소유를 제한하자는 均田·限田論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도 사림파의 정치적 한계로 인해 실현되기는 어려웠다.

 賦稅의 대종을 이루는 공납은 연산군 때 加定된 이래 방납현상으로 인하여 큰 폐단이 되었다. 그러나 공납제의 기본적 폐단인 공납의 개정, 방납의 근절을 중종 때 사림파가 중앙정치 요로에 진출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에 의해 제기된 각 군현단위로 공납제를 詳定해야 한다는 개혁론은 대동법의 이론적 기초로서 기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후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은 한·중·일 3국을 뒤흔든 대전란으로서 동아시아사에 있어서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즉 중국에서는 명·청이, 일본에서는 豊臣·德川氏의 왕조 또는 정권교체를 가져왔는가 하면, 조선에서는 전 국토가 거의 전장화하여 왜적의 약탈과 살육으로 인한 피해는 물론, 이 전란으로 인한 조선왕조의 정치·사회·경제 및 사상면에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임진왜란의 원인론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으나,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조선시대는 물론이며, 일본의 유학자들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명분없는 전쟁’을 도발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일본학자들 사이에서도 임진왜란의 원인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인적인 공명심과 영웅심, 대명무역확대, 해외발전 또는 봉건영주들의 세력 약화를 위한 것 등을 들고 있다.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는 지배층의 편당, 정치기강의 해이, 수취체제의 문란과 군비의 허설화 등의 폐단으로 민심이 이반되고 있었다. 왜란 전 일본은 백여 년간 분열되어 혼란을 거듭하던 정국이 수습되고, 통일의 여세를 몰아 대외진출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반하여, 조선은 사림 집권 이후 국론이 분열되고 통치체제의 해이로 국방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1592년 왜란을 당하여 정부는 그 대책을 강구함에 있어서 별 해답을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 재지사족과 민중이 자발적으로 향토를 방위하는 길밖에 없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곧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이르렀다. 이에 국왕은 평양으로, 다시 의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무능함을 드러냈고, 이에 민중들은 격분하여 궁궐과 관청들을 불살라 버리기까지 하였다. 다행히 바다에서 李舜臣 등이 이끄는 수군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제해권을 장악하는가 하면, 또한 각지의 의병도 향토조건에 맞는 무기와 전술로서 큰 전과를 거두게 되어 점차 전세가 만회되고, 이와 아울러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오자 결국 일본은 화의를 추진하다가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전후 7년간 계속 되다시피 한 왜란은 17세기 전반 胡亂과 함께 초기에 확립된 양반관료체제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외적 작용으로서 15세기 말 이래 꾸준히 성장·발전해 온 내적 요인과 상승작용을 하였던 것이다. 미증유의 대국난을 끝내 극복할 수 있었던 여러 요인을 거론할 때 혹은 그 배경을 제해권을 장악한 해전의 승리에서, 혹은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활동에서, 혹은 明의 구원에서 찾기도 하지만, 그러한 요인들은 각기 떼어내어 개별적으로 공적을 돌리기보다는 그러한 요인들을 상호유기적인 관련하에서 종합적으로 고찰함이 바람직하다. 그 궁극적인 극복 요인은 무엇보다 조선왕조 기존의 양반지배체제 내지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체제가 크게 동요되지 않은 데다가 임진왜란 초기에 동요된 민심을 수습하고 당시 재조·재야세력이 민중을 효과적으로 조직, 동원하여 戰守 양면에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마을·고을 단위로 창의, 기병한 의병진이 도처에서 봉기할 수 있었던 것이며, 우리 수군이 해상에서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따라서 明의 원군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란을 겪은 뒤 조선에서는 그 뒷처리를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였다. 먼저 난중의 피폐된 산업을 일으키고 국가 재정기반을 튼튼히 함에 힘을 쓰는 한편, 성곽·무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방에 힘을 기울였다. 외교관계에 있어서도 명·청의 교체 현실을 직시하고 신축성 있는 중립외교를 폈다. 그러나 그동안 개혁을 추진하던 광해군과 북인정권이 서인에 의해 타도되고 인조와 서인정권이 수립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서인정권은 중립적 외교정책을 지양하고, 명에 대한 대의명분을 내세워 친명배금정책을 뚜렷이 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호란이 야기되었다. 막강한 여진족의 군사력 앞에 조선은 힘 없이 무너졌고 이에 조선은 이후부터는 명에 대신하여 청에 조공하는 관계를 가지게 되었으니, 조선과 청의 관계는 한때 마찰을 빚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경제적·문화적으로 돈독해졌다.

 정치적으로 16∼17세기는 사림세력의 성장과 그들에 의한 사림정치(또는 붕당정치)가 펼쳐진 시대이다. 15세기의 정치가 양반관료제로 출발했다면, 16∼17세기의 붕당정치는 양반관료제 위에 정파정치로서 붕당정치를 실현시킨 것으로 전자와 명확히 구분된다. 그리고 그것은 18세기의 탕평정치, 19세기의 세도정치 등과도 명확히 구분된다는 점에서 한 시대의 정치형태로 규정해도 좋다. 경제적으로도 이 시기에는 15세기에 확립된 수취제도와 부역제도가 질적 변화를 일으키고, 농업 발달을 토대로 상업·수공업이 발달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사상적으로는 성리학과 예학이 크게 발달하는 시대적 특징을 보였다. 임진왜란이 이런 흐름을 중절시키지 않았다는 것이 그간의 연구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그간의 학계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16∼17세기의 역사상은 18세기에 군주들이 사림의 붕당정치의 폐단을 해소하기 위해 탕평정책을 취하여 스스로 정국을 주도하는 체제를 만들면서 비로소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사림세력은 정치의 현장에서 붕당을 인정하는 정치적 특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그 형성 초기에 붕당의 존재를 인정하는 宋代의 歐陽修와 朱熹의 붕당론에 큰 관심을 보이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스스로 정치세력을 인정해야 할 필요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정치에서 붕당은 부정될 것이 아니라, 공도의 실현을 추구하는 붕당은 오히려 推獎되어야 삼대의 이상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정론으로 자리 잡아갔다.

 사림세력의 새로운 붕당관은 반대세력으로부터 심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신진기예의 사림들은 중앙 주요관서의 낭관직에서 자천제의 실현을 통해 대신세력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상호 결속을 강화해 대신 중심의 일방적 정사처리에 제동을 걸거나, 언관직에서 合啓의 집단적 활동을 통해 왕을 간쟁하고 훈척세력의 비리를 비판 또는 탄핵하였으며, 이 같은 것은 제도로 정착되었다. 언관들은 낭관들이 각 부서에서 당상관과 대립할 때 그들을 지원하여 주었고, 전조낭관이 삼사 관원의 인사를 주도하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더욱 밀접한 관계를 이루었다.

 사림세력은 명종 때까지는 척신세력과의 투쟁을 계속하다가 선조대에 비로소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훈척세력과의 투쟁에서는 상대를 소인의 무리(僞朋)로, 스스로를 군자의 당(眞朋)으로 규정하였지만, 같은 사림계가 거의 주도권을 쥔 정국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지가 새로운 문제로 제기되었다. 한쪽에서는 그것을 一朋의 상태로 규정하여 단합을 촉구하였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척신정치의 잔재를 철저히 청산하는 것 만이 앞날이 보장될 수 있다는 내부 비판론을 제기했다. 집권세력이 된 사림계는 이 쟁론 끝에 동인·서인으로 분당하는 사태를 맞았다. 이 자체 분열현상은 선조 일대에 학연을 중심으로 격렬하게 전개되어 남인·서인·대북·소북 등 많은 붕당의 출현을 가져왔으며, 임진왜란도 사림세력의 이러한 분열 속에서 맞았다. 붕당분열로 인한 정국의 혼미는 仁祖反正(1623)으로 서인과 남인 양대 붕당이 공존하는 체제가 확립되면서 비로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인조 이후의 붕당정치는 상대세력과의 공존을 토대로 한 공론정치의 실현을 중요한 명분으로 삼았다.

 17세기 붕당정치는 비변사 중심의 공존체제와 삼사언론의 활성화, 천거제의 시행 등으로 이루어졌다. 붕당정치기의 정사는 비변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인조∼현종년간에 비변사의 당상 이상의 관직은 서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남인이 소수로 참여하는 형태로 이끌어지다가 숙종 즉위 초에 남인이 대거 진출하여 반수를 차지하는 변화를 일으켰다. 비변사의 公事는 대개 유사당상 이상의 합의를 거쳐 왕에게 ‘備邊司啓’로 입계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요 관직에 대한 薦擧權, 붕당간의 이해조정 등이 이루어졌다.

 삼사의 언론은 대간 개인보다는 부서별, 또는 合啓의 형태로 입계되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언론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공론의 표방과 전체 구성원들의 의견 통일이 필요하였으며, 대간이 합계하면, 홍문관도 ‘常規의 道’로 이에 동조하는 것이 관례였다. 붕당정치기에 삼사는 공론정치를 표방하고 상호비판과 견제를 통해 권력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집중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사림의 붕당정치는 17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주도 붕당의 교체현상으로 換局이 빈발하는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숙종 즉위년(1674)에서 영조 4년(1728)사이 50년간 아홉 차례의 환국(갑인·경신·기사·갑술·경인·병신·신임·을사·정미)이 거듭한 것은 다른 시기의 정치집단의 교체에 비해 짧은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는 점 하나로서도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이후로는 국왕의 탕평책으로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시대성이 더욱 부각된다. 환국은 복수의 붕당이 균형을 깨고 주도 붕당과 견제 붕당을 바꾸는 형태로 발생하였다. 환국의 핵심은 붕당전체의 교체라기보다 붕당 내부에서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수 권력집단의 교체이기는 했지만, 국왕의 의지가 그 변동의 핵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이전에 보지 못하던 새로운 현상이었다. 숙종대는 실제로 국왕이 붕당정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국왕이 명실상부하게 주도하는 ‘탕평’의 정국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붕당정치 속에서 국왕은 독자적인 권력행사의 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주도 붕당이나 권력집단의 교체를 통해 왕권의 입지를 넓혀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환국은 단순히 붕당정치의 말폐라기보다는 18세기 탕평정치기에 발현된 여러 변화의 시발로 보아야한다는 견해는 설득력이 있다.

 조선 중기는 자연환경 조건이 대단히 나쁜 시기였다. 이는≪조선왕조실록≫의 천문 이상현상 및 자연재해에 관한 기록들을 분석한 최근의 연구성과에서 보고되고 있다. 서구학계는 17세기에 전 지구적으로 기온이 강하한 사실-소빙기(little ice age) 현상-이 있었다는 보고를 여러 방면으로부터 받았다.

 종래 16세기의 사회경제는 15세기의 농업경제 발달을 배경으로 상업이 발달하고 부역제도에도 변동을 가져온 것으로 보는, 발전론적인 해석이 강하였다. 16세기 전반기까지는 이러한 관점의 해석이 타당하다. 그런데 16세기 후반 이래 17세기 전반까지 약 1세기간은 자연재해보다는 척족정치와 왜란·호란으로 인한 내우외환에 영향을 받은 바가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공납제도에서의 대동법의 발상은 방납의 폐단을 저지하기 위한 데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17세기의 시행과정에서 그 필요성은 安民益國의 차원에서 강조되었다. 대동법의 성립은 요역의 물납세화, 전결세화 과정을 전국적 차원에서 추인하고 법제화하는 것이었다. 모든 공물의 전세화는 중간 작폐로서 방납의 폐단을 막아주는 것만으로도 백성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나아가 각종 요역의 부담도 이에 포함시킨 것은 새로운 차원의 기민 구제의 수단을 내장하는 것이었다. 직접적인 노동력 제공을 요하는 각종 요역을 雇立制로 전환할 수 있는 기반이 이에서 확보되었던 것이다.

 장기적인 재해와 그 속에서 일어난 여러 차례의 전란(왜란·호란)은 농민경지의 대규모적인 황폐화를 가져왔다. 임진왜란 후의 농경지의 황폐는 극심하여 광해군 3년(1611)의 경지 조사결과 54만 2천여 결로 이전의 170만 8천여 결에 비하면 극감한 상태였다. 인조대의 양전에서도 총 농지는 985,002결로 늘어났으나, 진전이 443,139결(45%)에 달하는 실정이었다. 거듭하는 자연재해가 복구를 쉽게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농경지는 숙종 46년(1720)의 경자양전에서 비로소 139만 5,333결로 정상적인 궤도에 올랐다.

 대동법 시행론자들은 부수 효과로서 상업·수공업의 발전을 기대하면서, 이를 촉진하는 방도로 금속화폐제도의 시행을 동시에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이 반대론에 밀려 시행시기가 늦추어지기는 했지만, 대동법 시행의 효과가 발휘되면서 동전의 주조도 저절로 후속되었다. 군수산업은 군영제도의 발달과 궤를 같이하고 필요한 병기류의 조달은 대동법하의 貢契를 통해 이루어졌다.

 16세기 중반 이후 심각한 상태에 빠졌던 사회경제는 17세기 말엽, 18세기 초엽에 이르러 회복의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비상대책으로 시행된 대동법·고립제·환곡운용·화폐제도 도입 등이 새로운 경제의 틀을 구성하였으며, 그간 명·청 교체의 국제질서의 대변동 가운데서 외교적으로 많은 수난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비단과 그 原絲 등의 중국상품을 일본에 중개하는 국제교역상의 이점도 이 시기의 상공업 발달에 한 몫을 하였다.

 조선왕조는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사림은 자신들을 주축으로 하는 향촌의 자치조직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관권과의 일정한 타협하에 자신들의 향촌지배권을 확보하는 자율책을 추구하게 된다. 그것은 때로 향약이나 鄕規·鄕案과 같이 一鄕을 망라하는 조직 형태로 구체화하기도 하고, 그보다는 좀더 하부체계로서 親隣·同志的 성격을 가지는 결사형태인 洞契조직으로 성립하기도 하였다. 사족의 향촌지배는 그 이전부터 그들이 마련하여 온 유향소·향약·향규·洞約·洞契 등의 자치조직을 통해 구현되었다. 유향소는 수령권과의 마찰이 불가피하여 몇 차례의 치폐과정을 겪기도 하였으나, 수령권과의 타협 위에서 재지세력이 부세운영에 관여할 수 있는 기구로서 기능을 수행해 왔다. 유향소는 성종 때 사림파에 의해 鄕射禮·鄕飮酒禮와 같은 주자적 이념을 실천하는 교화장소로서 주목되었고, 후일 서원이 발흥함으로써 사림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으나 적어도 17세기 중반까지는 사족의 향촌지배기구로서 활용되고 있었다.

 한편 군현단위의 향촌자치조직에는 향약과 향규가 있었다. 향약은 성리학의 수용과정에서 알려진 중국의 향촌제도로서 중종년간 조광조 등의 사림이 교화의 방안으로서 전국적인 보급운동을 벌였으나 기묘사화로 실패한 후, 지방사족에 의하여 구휼위주로 성격이 바뀌어 향촌별로 점차 시행을 보았다. 유향소와 향약·향규가 군현단위의 조직이었다면 보다 축소된 지역단위로서 동계가 있었다. 동계의 출발은 자연촌의 형성에서부터였겠지만, 16세기에 이르면 하나의 촌락 혹은 지연·혈연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몇 개의 촌락에 거주하는 사족 사이의 결사적 성향을 농후히 하게 된다. 동계의 구성원들은 이를 바탕으로 향안에 입록될 수 있었고, 향약·향규 등의 군현단위 자치조직에 참여, 사족의 향촌지배에 가담할 수 있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출현하는 서원은 사족의 향촌지배측면에서 볼 때 분명히 새로운 기구였다. 그것은 講學과 藏修를 표방하는 학교였기 때문에 유향소처럼 수령권을 침해할 수도 있다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따라서 그들이 개별적으로 추진해오던 향약이나 향음주례 등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장소로서 고려될 수 있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확실하게 드러난다는 사족의 향촌지배체제는 이상과 같이 여러 가지 향촌기구를 통해 향촌민 지배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여 온 사족세력의 부단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거기에는 물론 지방지배의 동반자로서 향리 대신 사족을 선택한 중앙정부의 입장이나, 성리학 이념의 정착이라든가 15세기 이후의 농법의 발달과 그에 수반한 경지의 확대에 따른 사족 경제력의 상승 등이 배경이 되었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사족의 향촌지배에 큰 전기를 마련한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임란은 조선조의 지배질서를 전면적으로 재편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으며, 향촌에서의 사족지배구조에도 마찬가지 영향을 미쳤다. 임란 후 재건된 향촌사회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해서는 논자에 따라 견해가 각기 다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난중의 의병활동을 기반으로 사족은 난후의 수습과정에서 진주지방의 里坊편성에서 보듯이 그들 중심으로 향촌사회를 재건하였으며, 이런 과정에서 황폐화된 토지의 개간과 유향소·향약·향규·동계·서원 등의 향촌조직이 복구되었다고 설명되고 있다.

 사족 중심의 향촌운영은 그러나 얼마가지 않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더 이상 추진되기 어려운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우선 국가의 對鄕村政策이 재지사족을 매개로 하던 간접적인 방식에서 소농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형태로 전환된 것과 관련된다. 먼저 경재소의 혁파로 향임의 선임권을 수령이 장악하게 됨으로써 유향소는 명칭마저 향청으로 바뀌어 수령의 보좌기구가 되어버렸다. 나아가 국가는 ‘五家統事目’과 里定法의 시행을 통해 부세행정실무를 면이임과 향리의 연결조직을 이용해 수령에게 귀속시킴으로써 사족의 부세운영권 참여를 무력화하여 小民에 대한 지배를 약화시켰다.

 이러한 외부의 견제와 함께 사족세력 내부에서도 분열이 심화되어 더 이상 결집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家禮의 보급에 따른 가족 및 상속제도의 변화는 異姓雜居의 同族村에서 同姓同本의 同姓村으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그에 따라 종래의 公有財産에 대한 이해갈등과 대립이 일어나면서 결국은 향촌사족이 분열되어 각자가 동성촌에 기반한 族的結束과 門中勢의 확산에 주력하게 되었다.

 향촌사족의 이런 분열에는 중앙정계의 붕당간 대립의 심화도 크게 작용하였다. 당론의 세습성은 향촌사족에까지 여파를 미쳐 향론의 분열을 조장했으며 여기에 향권장악을 둘러싼 대립까지 가세함으로써 사족 내부의 분열을 촉진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빈발하는 당색과 연결된 사족간의 鄕戰, 특히 서원제향자를 둘러싼 향전의 빈발이 그것의 단적인 예이다.

 이와 같이 사족의 향촌지배권이 약화되는 속에 사족 내부의 분열까지 겹치게 되면서 16세기 이후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는 후퇴하고, 새로이 드러나는 동성촌락을 중심으로 한 족적결속과 문중조직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향촌사회의 운영도 그런 방향으로 가게 된다.

 사림의 정치활동이 본격화하고 그 사림의 母集團인 사족에 의한 향촌지배가 본궤도에 오르면서, 그들의 활동을 뒷받침해 주는 이론적 근거였던 성리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 후반 이후 理氣心性說에 관한 깊은 연구와 함께, 특히 17세기에 들어가면 사림과 사족의 행동규범과 생활의례로서≪주자가례≫를 중심으로 한 예학이 크게 발달하고, 왕실의 典禮문제와 관련해 禮說논쟁이 주요 정치쟁점화하여 정권의 향배를 결정할 정도가 되며, 유교적 예속의 전파에 따른 宗法制의 보급과 정착으로 전통적인 가족제는 물론 향촌사회의 촌락구성마저 달라지는 변화가 오게 된다.

 예학에 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주자가례와 3례, 또 3례 중에서도≪예기≫와≪의례≫중 어느 것을 더 중시하고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학파와 당색에 따른 차이가 드러나면서, 마침내 인조대의 元宗추숭 논의나 현종 때의 服制 논쟁과 같은 왕실의 전례에 대한 예법의 적용문제로 비화, 정치세력간의 커다란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사림이 사회전반을 주도하며 주자가례에 의한 예학이 발달하여 종법제가 정착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시기는 17세기 이후였다. 그 결과 家廟가 널리 보급되어 사족집안의 가옥구조까지 달라졌으며 男歸女家婚에 대신하여 迎親禮가 본격화되고 立後制가 확립되는 등 종전의 兩系的 특성이 부계적 가족제로 변하게 되었다. 특히 주자가례의 勵行은 外孫奉祀·輪回奉祀 대신에 적장자에 의한 四代奉祀制의 실현을 보게 하였으며 그에 따라 자녀균분상속제 역시 적장자 상속으로 전환되었다. 이런 종법적 가족질서의 확립은 족보에도 영향을 미쳐 17세기 초까지는 외손까지 포함되는 子孫譜 형태에서 父系親만 수록하며, 기록도 先男後女로 하는 방식을 정착시켰다. 뿐만 아니라 촌락의 구성에서도 조선 전기까지 몇 세대의 내외손이 함께 거주하는 이성잡거의 동족촌락에서 부계친 중심의 동성촌락으로 바뀌는 변화까지 일으켰던 것이다.

 예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유교적 예속의 보급은 실상 성리학의 철학적 이론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기초로 한 위에서 전개되었다. 그런 만큼 성리학의 탐구는 주자학 이해의 입문이었던 것이다. 李彦迪이 理를, 서경덕이 氣의 이론을 궁구하면서 본 궤도에 오른 이기설은 이황·조식·김인후·奇大升·盧守愼·李珥·成渾 등의 저명한 유학자들에 의해 理氣心性說의 연구로 발전되었으며, 이것은 16세기가 끝나는 시점에서 퇴계와 율곡에 의해 정리되어 각기 主理·主氣라는 조선성리학의 양대 조류를 형성하였고 그 문인 및 계승자에 의해 학파로 성립하며 붕당정치하에서 각 정파의 정치이념이 되었다. 그러므로 각기 자기파의 학설의 보강을 위한 연구가 계속되면서 동시에 상대학파의 논리에 대한 비판으로 논쟁이 벌어지며, 또 달리 張顯光·許穆과 같이 주리·주기설을 절충하려는 이론도 제기되는 등 학계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자성리학 이외의 다른 학문, 예컨대 陽明學이나 불교·도교 등을 이단으로 배격하는 교조적인 성향이 강화되어, 尹鑴나 朴世堂과 같은 탈주자학적인 시도는 용납되지 못하였다.

 역사학에 있어서도 국가의 관료 중심적 역사편찬 대신에 주자의 정통론과 綱目論을 수용한 사림의 개인 단위 역사편찬이 이루어지는데, 史略型 역사서의 유행, 도표와 연표에 의한 서술, 箕子에 대한 관심, 강목형 사서의 출현, 역사 지리학 연구의 심화, 樂府體의 발전, 當代史를 다룬 야사형 사서의 편찬 등이 특징으로 지적된다.

 한편 불교와 도교는 주자학이 갖는 이단배척의 특징에다가 조선주자학이 점차 교조적 성향을 더해감으로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교는 현실에서 떨어진 은둔화의 경향 속에서도 山中僧團의 조직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山僧의 법통을 계승함으로써 명맥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불교의 존재를 크게 드러내었던 임진왜란시의 승군활동은 이런 법통과 승단조직을 밑받침으로 하여 일어날 수 있었다.

 사림의 사회 주도와 사족지배체제의 운영은 문학과 예술, 그리고 민속과 일상의 의식주생활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대체로 조선 전기적인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사림의 취향에 맞추어 변형되거나 새로운 모습을 보였으며 이를 18세기 이후의 후기 사회에 전달해 주고 있었다.

 우선 문학의 면에서는 자연 속에서 심성을 수양하는 사림의 삶과 대민교화의 내용을 담은 작품들이 많은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을 거친 후에 한편으로는≪홍길동전≫에서 보듯이 전쟁의 황폐에서 드러나는 현실의 모순을 고발하고 이상국가의 건설을 추구하는 사회소설이 나오는가 하면, 전쟁의 패배를 치유하고자 역설적으로 전쟁의 승리와 그것을 가져오게 한 민족영웅의 형상을 그린 軍談소설이 한때 유행했으며, 17세기 후반에 가면 현실적인 사회체제의 동요 속에서 이를 관념적으로 보상받고자 사대부의 出將入相과 가문창달의 실현을 기본 골격으로 하는≪구운몽≫등의 한글소설이 나와 18세기 이후 성행하는 고전소설의 선구를 이루었다. 반면 미술에서는 이 시기를 특징짓는 사대부들의 은둔사상이 크게 반영되어 漁村問答·濯足·觀瀑·釣魚 등이 화폭에 자주 등장하였다. 선비의 절의를 상징하는 대나무·매화가 많이 그려진 것이라든가 隱者的인 정취를 자아내는 墨法이 어느 시기보다도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사대부의 기본 교양이라고 할 書體에서 굳센 의지를 표현한다는 王羲之體가 부활하는 가운데, 거기에 토대해 자신의 독특한 필법을 가미했다는 石峰體가 널리 유행하고, 金生·李嵒을 비롯한 우리 나라 역대 명필들의 筆跡과 碑文을 摹刻·탁본하여 연습교재로 사용하기 위한 刻帖이 만들어지면서≪大東金石帖≫이 나왔던 것 역시 이 시기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조각의 양식은 유일하게 불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佛身에 비해 머리부분이 크며 기법도 떨어져 전반적인 불교쇠퇴상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도자기 공예에서는 분청자기가 소멸하고 굵은 모래받침의 회백자 제작이 성행하였는데, 관영사기공장으로는 경기도 광주의 分院이 중심지이다. 특히 鐵畵백자의 제작과 明器類에 보이는 다양한 남녀인물상·銅畵백자 및 乳白色의 백자 출현은 조선 후기 백자의 시작을 알려주는 이 시기 도자공예의 특징이었다.

 한편 조선 중기의 음악은 궁중 안에서의 祭享樂과 宴享樂이 앞 시대에 비해 규모면에서는 축소되지만 향악곡이 발달하고 관악곡으로 변질되는 새로운 변화를 보이며, 궁중 밖에서는 北殿·中大葉·數大葉같은 관현반주의 새로운 노래와 거문고 중심의 기악합주인 풍류음악이 생겨나 선비들의 애호를 받으면서 조선적인 고유색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종법제의 정착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에 따라 큰 변화를 겪은 분야는 민속과 사대부의 주거공간이었다. 민속의 경우 고려시대 이래의 巫俗 중심의 축제풍속이 점차 유교의례적 형식으로 전환되면서 새로운 이념인 주자학의 영향으로 關王廟와 서원·時祭 등에서 보듯이 친족집단의 조상숭배와 인물숭배 풍속이 등장하였다. 주거공간의 변화가 아마도 조선 중기 사족생활에서 가장 큰 변화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례에 의한 4대봉사제가 정착되면서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공간으로서 家廟가 班家에 자리잡게 된 것이 큰 특징이라 하겠으며, 內外와 長幼의 구별을 위해 안채·별당의 구성과 주인양반의 修身과 학문연마, 손님접대를 위한 사랑채, 그리고 사역과 隨行을 위한 노복 및 婢子의 거처인 행랑채·비자방 등이 별도로 배치되는 구조를 갖는 사대부 가옥의 형태가 자리잡게 되었으나 인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 민중의 가옥은 초가 3간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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