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4. 조선
  • 4) 조선 후기의 사회와 문화

4) 조선 후기의 사회와 문화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서 상호 유기적 연결을 가진 일련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후기의 정치는 탕평론 및 세도정치의 전개라는 특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물론 18세기 탕평론이 제시된 데에는 일정한 배경이 있었고, 영조대에 전개된 緩論蕩平의 입장과 정조대에 시행되었던 峻論蕩平은 각기 상이한 특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이 양자는 탕평론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상호 합치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현실정치를 이끈 통치이론이었다.

 한편 개항 이전 19세기의 정치사에서는 세도정치가 전개되고 있었다. 세도정치는 왕권강화론의 일부로 제시되었던 탕평론에 맞서 소수 집권가문의 정치적 권리를 정당화하려는 정치이론이었으며, 이는 탕평 정국의 출현 및 지속에 대한 집권 귀족층의 반작용에 의해서 추진된 것이었다.

 조선 후기 탕평론이 제시된 배경에는 사회·경제적으로 성장한 서민·하층민들의 정치적 지향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양반 중심의 정치질서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었고, 이러한 변화에 양반 지배층들도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했다. 또한 17세기 이래 지주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접근하던 일군의 학자들은 朱子의 토지론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箕子 箕田說·井田說 등에 주목한 바 있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기자의 저작으로 알려진 洪範 皇極說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동시에 조선 후기 양반 지배층 가운데 일부는 四書 중심의 주자학적 체계에 비판을 가하면서 六經 중심의 古學에 경도되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書經≫의 洪範篇이 재음미될 수 있었다. 그리고 국가권력의 주체를 천자 내지는 국왕으로 보려는 皇極蕩平論의 토양이 마련되어 갔다.

 탕평을 표방하는 정국운영론은 이미 숙종 말년부터 제기된 바 있었다. 그러나 이 탕평론은 영조 5년(1729) 이후에 이르러 실제 정치운영의 원리로 작용되었다. 換局政治의 극심한 폐해를 체험한 당시의 지배층 일부에서는 현실정치에서 최대의 현안이 붕당의 타파에 있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정치집단을 당시에는 온건한 주장을 펴는 정파라는 뜻에서 緩論이라고 호칭되었다. 반면에 사림의 정치원칙인 각 붕당의 義理 자체가 붕당 타파보다도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집단도 있었다. 이들은 완론에 대칭되는 준엄한 입장을 펴는 정파라 하여 峻論으로 지칭되고 있었다.

 요컨대 영조·정조의 탕평책이 시행되어 가던 기간에는 군주권이 강화되었고, 군주는 세상을 다스리는 바른 도리인 世道의 담당자요 책임자로 부각되었다. 여기에서 군주는 모든 의리를 군주 자신에게 집중시키며 타파붕당의 기치 아래 당론을 배격하고, 사족 지배층을 억압하며 對民 긍정적 정책들을 강화시켜 갔다. 그러나 탕평정국은 하나의 정치체제로 정립시키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상황과 관련하여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세도정치가 시행되었다. 세도정치가 시행된 배경으로는 탕평정국을 거치는 동안 진행된 붕당의 퇴조현상과 그리고 정조의 사후 왕권의 약화현상을 우선 주목할 수 있다. 순조와 헌종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군주의 국정 주도를 위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국왕은 국정 운영 전반에 있어서 그 관념상의 권위에 상응하는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군주권의 약화에 대응하여 전개된 세도정치기에는 중앙의 정치권력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등 특정한 소수 가문에 집중되었다.

 한편 지난 17세기 붕당정치기에 있어서 지배계층은 士論의 확보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의 근거를 삼았다. 그러나 19세기의 세도가문들은 정권의 장악과 유지의 중요한 기반을 국왕 또는 왕실의 권위에 두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왕실의 외척이 됨으로써 이 권위를 강화시켜 보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왕실의 권위가 강조되는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군주권이 강화되었던 상황이 19세기에 이르러 세도가문들에 의해서 변칙적 형태로 역이용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조선왕조의 지배체제가 밟아 온 변화의 귀결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세도가문들은 군주라는 중세적 정치체제의 전통적 권위 위에서 존립했고, 이로써 그들은 조선왕조의 지배체제에서 형식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세도가문들 사이에는 時僻이라는 당색의 차이보다 더욱 강한 동질성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 동질성은 중첩된 혼인관계를 통해서 강화되기도 했다.

 순조대에 이어서 전개된 헌종대의 세도정치는 대체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가문이라는 두 세력 사이에 어느 정도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철종대의 세도정치 또한 기존의 세도가문들 상호간의 협력에 의해서 지속되고 있었다. 세도정치 기간 중 유력가문을 중심으로 한 상호간의 협력관계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 내부에 있어서는 강한 동질성이 유지되고 있었다. 세도집단 내부에 존재하던 이와 같은 동질성은 대원군 집권기를 통해서도 철저히 불식되지는 못하였다.

 18∼19세기에 이르러 중앙정부의 각종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여러 문제들이 논의되었다. 조선왕조가 당면했던 17세기의 재정위기를 대동법의 시행을 통해서 어느 정도 대처해 나간 바 있었다. 그러나 전근대적 재정이 갖는 한계로 인해서 재정위기는 계속해서 발생했다. 18세기의 조선왕조에서도 국가재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군역제와 관련된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均役法 시행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영조 28년(1752)에 시행된 이 균역법은 양역의 폐단으로 말미암아 양인층의 피역 저항이 강화되어 가던 상황에서 양인층을 안정시키고 국가재정을 확보한다는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제정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국가의 재정체계가 租庸調체제로부터 田政·軍政·還穀이라는 三政體制로 전환되어 갔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사회변동의 여파에 따라서 부세제도가 총액제 수취방법으로 변동되어 갔고, 부세제도 자체의 문란상이 심화되었다. 이에 대한 民의 저항이 강화되자 삼정의 문란을 개혁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개되었다. 삼정문란을 개혁하기 위한 노력은 조선왕조 국가의 존립과 직결되는 문제로 중요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사회에서 전개되었던 각종의 변통론 즉 개혁안들은 사회구조의 근본적 개혁의 방향을 지향하는 대변통론을 취하기보다는 기존의 체제 내에서 수취방법을 개선하려는 소변통론의 방향으로 지향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 후기 사회가 추구하고 있던 개혁의 한계점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삼정문란에 관한 문제제기는 군정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전정이나 환곡 분야에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삼정 가운데 전통적으로 중요시되어 오던 분야는 전정이었다. 전정은 조선 후기 당시 토지에 부과되는 각종 잡다한 항목의 조세를 관리하는 문제를 뜻했다. 당시의 토지세는 國納·船給·邑徵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국납은 결당 4두씩 부과되던 전세를 비롯하여 대동미, 삼수미, 결작 등의 경상세를 말한다. 선급은 국납에 따르는 각종의 부가세를 뜻하며, 읍징은 해당 고을의 잡다한 용도에 쓰이는 부가세를 일컬었다. 이 가운데 각종의 부가세가 수십 종류에 이르렀고, 부가세의 종류와 세액이 증가하여 전정의 문란은 가속화되어 갔다. 또한 양전이 철저히 시행되지 못함에 따라서 토지에 대한 수세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고, 전결세와 수취과정에서도 각종 폐단이 자행되고 있었다.

 한편, 환곡제의 운영에 있어서도 많은 문제가 야기되었다. 원래 환곡은 진휼책의 하나로 춘궁기인 봄철에 관청에서 농민들에게 곡식을 대여했다가 가을철에 元穀과 이자인 耗穀을 붙여서 거두어들이는 방식이었다. 이때 모곡은 원곡의 10%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환곡의 진휼 기능이 국가재정을 보충하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또한 당시 정부의 기관들은 이른바 經費自辦의 원칙에 따라 각 관청에서 소요되는 경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이 상황에서 중앙과 지방의 각 기관에서는 다투어 모곡을 확보하려 했고 이를 중요한 재정 수입원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각종의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의 중엽에 이르러서 환곡은 삼정 가운데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정부에 대한 민의 저항이 강화되어 갔다.

 또한 국가재정 운영 방식의 변화와 삼정의 문란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현상은 都結의 출현에 관한 문제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총액제에 의한 재정 운영이 일반화되고 있었다. 총액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이전의 부세운영은 토지와 인민에 대한 국가의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파악이 전제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면·리 단위로 부세 단위가 상향조정되었고 국가 공권력이 미치는 범위도 면·리로 축소되었다. 그후 공동납의 관행은 점차 넓어져 갔다. 즉 人丁稅는 공노비의 庚申摠(영조 16년, 1740) 및 양역의 庚午摠(영조 26년, 1750)에 의해서 정총제로 전환되었고, 전세는 비총제로, 환곡은 환총제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등 모든 부세가 공동납 형태로 징수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재정은 총액제로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18∼19세기의 조선의 대외관계는 17세기에 재편된 동아시아적 질서를 기초로 하여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기가 드러내고 있는 특성은 대륙에서의 明淸交替, 일본에서의 德川幕府의 등장, 그리고 동아시아에 대해 구미 여러 나라들이 중상주의적 접근을 강화해 오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조선의 대외관계는 대청관계, 대일관계 및 서양과의 관계가 검토되어야 한다.

 병자호란 이후 청과 조선 사이에는 군사적으로는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청은 조선에 대해서 상호간에 설정된 군신관계의 틀 안에서 청 중심의 천하 질서에 편입되기를 요구했고, 助兵 등의 정치적 요구를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청은 숙종 38년(1712) 白頭山에 定界碑를 건립하게 되었다. 요컨대 조청관계는 조선왕조의 대외관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국제관계를 새롭게 정립시켜 나가던 과정에서 청으로부터의 독자성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조선과 일본의 관계도 17세기 이래 새롭게 전개되었다. 조선은 건국 이래로 일본에 대해서 羈縻와 對等의 외교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주도의 독자적인 통교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 시도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여지없이 파괴되었지만, 인접한 양국간의 관계는 정상화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조선은 임진왜란을 극복한 이후 광해군 원년(1609) 일본과 己酉約條를 체결했고, 이로써 일본과의 통교 무역에 관한 틀이 재정비되어 갔다. 이 기유약조는 조선이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일본과 맺었던 약조들을 집약한 것이었다.

 한편 17세기 이래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조선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어 갔다. 그래서 조선연해에서는 중상주의적 서양 선박들이 출현했고, 서양인 표착자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현상은 18세기에 이르러 더욱 빈번해졌다. 그리고 19세기 중엽 이후 서양의 식민주의적 세력들이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강화시켜 나간 여파로 이양선으로 불리던 서양 선박들이 조선연해에 출몰하고 있었다. 또한 서학 즉 천주교 신앙의 성행과 관련하여 서양인 선교사들이 조선에 직접 입국하여 비밀리에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이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체포와 탄압으로 인해서 조선은 서양의 존재를 더욱 확실히 인식했다. 이 일련의 사실들은 조선과 서양이 새로운 국제 관계를 수립해야 할 필요성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중국 및 일본과 맺고 있던 전통적인 국제관계만을 고수하고자 했고, 변화해 가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지 못했다. 그러면서 조선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병인양요(1866)나 신미양요(1871)의 경우처럼 프랑스 및 미국과 같은 구미열강과 충돌하게 되었다. 조선을 향한 제국주의적 침략은 점차 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그 동안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조선 후기 경제사 이해의 기본 방향은 대체로 한국의 중세사회가 이 시기에 이르러 민족의 내재적 역량에 의해 해체과정을 밟아 왔다는 것이다. 즉 조선 후기의 변동을 가능하게 한 움직임은 임기응변적으로 제도를 개편하고, 정치체제를 재정비하려고 했던 위로부터의 노력이 아니라, 산업활동의 진전에 따른 경제변동이 봉건적 신분제 사회를 분해시켰다는 것이다. 보다 주목되는 것은 산업활동의 진전이 아래에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이 시기의 민중은 스스로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 후기 산업활동의 진전은 농업·수공업·광업·상업 등 모든 산업분야에서 일어났다. 농민들은 황폐한 농토를 개간하고 수리시설을 복구했으며,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영농방법을 개선하고, 보다 많은 소득을 얻기 위해 새로운 작물을 재배하여 상품화하기도 하였다. 이와 아울러 생산체계에 있어서도 보다 넓은 농지를 경작하는 광작이 보급되고, 임노동자를 고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서민형지주가 나타났는가 하면, 지주·전호의 관계에 있어서도 賭租制가 유행하여, 이를 토대로 佃戶權이 성장해갔다. 수공업에서는 본래 부역제를 토대로 하여 운영되던 관영수공업이 쇠퇴하고, 그리하여 장인의 등록제가 폐지되면서 독자적으로 자유롭게 생산하는 민영수공업이 성장하여 갔다. 제조업에서의 생산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 원료 생산이 촉진되어 광업도 활성화되었다. 특히 대청무역에서 은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私採 또는 潛採에 의한 은광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조선 후기에 새로운 모습을 보인 경제계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시장권의 확대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농업·수공업·광업 등에서의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고, 그 잉여 생산물의 유통이 불가피해지면서 상업활동도 예전과 달리 자못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 널리 확산된 부세 및 소작료의 금납화는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을 보다 촉진시켰다. 더구나 조선 후기에는 인구의 자연 증가 및 농민의 계층분화가 심화되어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고 그들이 상업 인구 또는 소비 인구가 되면서 상품의 유통이 더욱 활발해졌다.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금속화폐, 즉 銅錢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그리하여 누구나 동전을 갖고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이러한 속에서 전국 각지에 장시와 浦口가 개설되고, 이들을 연계하는 원격지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시장권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에서뿐만 아니라 수공업·광업·어업·염업 등에서도 생산력이 돋보였다. 우선 京工匠을 근간으로 하는 관영수공업이 17세기 중엽에 이르면 급속하게 붕괴되어 갔고, 이에 대신하여 私匠들의 민영수공업이 전면에 등장하여 널리 발달하고 있었다. 사장의 수공업장은 당시 일반적으로 ‘店’이라 불렸는데, 유기 수공업장은 鍮店, 철기 수공업장은 鐵店이라 하였다. 점에는 점주 또는 물주라고 불리는 고용주가 있었고, 그 고용주는 일정한 노동자를 고용하여 물건을 생산하였다. 한편 상업자본이 축적되면서 일부 점에서는 상업자본이 생산과정에 침투하여 이른바 先貸制를 발생시키기도 하였다.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그 원료의 공급을 위해 광업도 발달하였는데, 17세기에는 監官制에 의한 은광업이 번창하다가, 18세기에는 別將制에 의한 군수광업이 성장하였다. 별장제하에서는 서울의 富商大賈들이 별장으로 파견되어 채광하고, 호조에 일정한 稅銀을 납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18세기 말에는 은광업도 점차 쇠퇴해갔다. 결국 광산 개발을 활성화하기 위해 정부는 設店收稅制를 실시하여 사채를 허용하였다.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어업의 발전도 촉진되었다. 봉건 지배층의 가혹한 어민 수탈이 어업의 발달을 크게 저해하기는 하였으나, 18세기 이후에 이르면, 어구가 다양하게 개발되고 어법이 크게 발달하면서 어물의 생산이 급증하였다. 특히 어구가 대형화하고 어업의 경영규모가 확대되면서 대규모 어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漁箭이나 防簾에서 두드러졌다. 수산물의 어획뿐 아니라 이 시기에는 수산물 양식과 수산물 제조업도 나름대로 발달하였다. 김이 많이 양식되었고, 조기·명태·청어의 가공이 이루어지면서, 그 유통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어물의 관리를 위해서는 소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조선 후기에는 제염기술이 일정하게 발달하였다.

 조선 후기 지방 곳곳에는 농촌 시장으로서 장시가 발달하고 있었는데, 그 토대로서 운송교통이 이 시기에 이르러 크게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사회에서 생산력이 증대되고, 그 잉여생산물이 처분되면서 자본의 집적이 가능했다고 하면, 그것을 매개하는 기본적 역할은 운송체계가 담당하였다고 하겠다.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장시와 장시, 장시와 포구, 포구와 포구가 연계되면서 전국이 하나의 상권으로 형성되어 갔다. 이러한 속에서 물화의 유통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내륙에서는 馬匹에 의한 육운이, 연해안 또는 수로에서는 선박에 의한 수운이 그 일을 담당하였다. 지방에서 상업도시가 성장한 곳은 서울의 배후 도시로 성장한 개성과 수원, 서울의 공간 확대에 따라 상품유통의 거점으로 변화된 송파장·누원점, 평양·대구·전주 등 감영 소재지, 포구로서 시장권의 기지였던 원산포·마산포·강경포, 그리고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던 동래와 의주 등지였다.

 국내상업의 발달과 때를 같이 하여 대외무역도 점차 활발해졌다. 17세기 중엽부터 淸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공적 무역인 開市와 사적 무역인 後市가 이루어졌다. 청에서 들여오는 물품은 비단·약재·문방구 등이었고, 수출하는 물품은 은·종이·무명·인삼 등이었다. 한편 17세기 이후로 일본과의 관계가 점차 정상화되면서 倭館開市를 통한 대일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우리 나라에서 인삼·쌀·무명 등을 팔고, 또 청에서 수입한 물품들을 넘겨 주는 중계무역을 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일본으로부터는 은·구리·물소뿔·후추 등을 수입하였다. 이러한 국제무역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상인들은 의주의 灣商과 동래의 萊商이었으며, 개성의 松商은 양자를 중계하며 큰 이득을 남기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은 화폐라는 교환수단에 의해 보다 촉구되었다. 종래의 교환수단은 쌀이나 포목이었고, 물물교환이 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17세기 말 명목화폐인 동전이 전국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숙종 4년(1678) 조선정부가 동전의 유통을 결정한 이래 십수 년이 지나지 않아 동전은 가장 우월한 가치척도·교환수단·지불수단으로 정착함으로써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동전의 보급은 상호 인과적으로 상품생산과 교환관계를 촉진시켜 상품화폐경제가 더욱 발달하였다. 일반 사회에서의 거래는 물론 각종의 고용가도 대부분 동전으로 지불되었고, 국가재정도 일부 화폐화되었다. 특히 화폐지대가 발생하고, 또한 각종 조세에서의 동전 수취가 매년 수백만 냥에 이를 정도로 농민층을 강제로 화폐경제에 편입시켰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농민의 몰락을 재촉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조선 후기 사회는 격동의 사회였다. 근대사회로의 전환 기점으로 이해되기도 할 만큼 재래의 체제·질서·사상들이 여러 부면에서 이완·해체되고 새로운 질서·사상들이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응하는 정부나 기존세력의 자세와 조치는 극히 보수적이고 임기적이었다. 새로운 변화·변동을 수용하고 활용하기보다는 대체로 지난날의 질서를 되세우고 유지하려는 데 급급했던 것이다. 일부에서 이 같은 변화를 수용하고 활용하는 경우가 보이기도 하였으나, 그것 역시≪경국대전≫체제로의 복귀를 위한 노력에 다름이 없었다. 19세기 중엽을 점철하였던 크고 작은 민란, 곧 민중의 거센 저항들은 바로 이런 이유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신분제 이완과 사회신분의 변동·변화는 여러 요인에서 비롯되고 촉진되었지만, 그 주된 단초는 양반인구의 증가에 있었다고 하겠다. 양반인구의 증가가 국역체계의 문란을 가져왔고 이는 나아가 양반서얼의 통청이나 중간신분층과 서민층의 신분상승을 가증시켜서 사회신분의 변동·변화와 함께 본격적으로 신분제의 이완을 전개시킨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양반인구의 증가는 지배계층으로서의 권위와 희소가치를 점차 하락시켜 갔을 뿐 아니라, 軍籍收布制가 일반화되었던 16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국역체계의 파탄을 야기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군역의 수포화에 따른 양반층의 군역기피 현상이 끝내 양반인구의 면역으로 귀착되자, 이미 통청에 노력하고 있던 양반서얼들은 물론, 이들의 국역까지 떠맡게 된 평민들도 국역에서 벗어나기 위한 신분상승을 기도하게 된 것이다.

 양반서얼들은 우선 18세기 초에 모두가 국역에서 벗어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서얼 자신은 業儒·業武로, 그 자손은 幼學으로 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얼 자신은 비록 양반의 직역을 얻지 못하였으나, 그 모두가 군역부담에서 벗어나기는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양반인구는 다시 한번 대폭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당시 양반 자녀의 절반 이상이 서얼이었다는 지적에서 보면, 이러한 조치로 양반이 된 인구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평민들의 면역을 위한 신분상승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걸쳐 세차게 전개되었다. 평민들은 조선 초기부터 경제적 곤궁으로 인하여 가능한 한 군역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여 왔었다. 漏籍하거나 승려가 되거나 私賤이 되는 것이 그 주된 방법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국방력 강화와 재정 확보, 향촌의 안정 등을 도모하기 위하여 오가작통제와 호패법 등이 강력하게 시행되자, 평민들은 보다 적극적인 면역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때마침 전개된 농업경영의 발전과 상·공업의 발달에 힘입어 양반·중인으로의 신분상승으로 연결되었다. 부를 축적한 일부 평민들은 헐역의 契房이나 私募屬으로 들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유학·교생·원생을 모록하고 空名帖을 수매하여 양반의 지위로 나아가는 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신분상승이 개별적이었기 때문에 그 수를 측정하기가 어려우나, 19세기 호적대장에 등재된 유학의 반수 이상이 모칭 유학으로 추정될 만큼 그 수가 많았다. 이리하여 유학을 중심으로 한 양반인구의 수는 이미 19세기 중엽에 호적상 주민구성의 50% 이상을 점유할 정도로 증가되고 있었다. 경제력의 상실로 인하여 양반에서 잔반·평민으로, 또 평민에서 고공·노비로 각기 신분이 하락하는 인구도 적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하층민이 신분을 향상시키고, 또 이들을 포함하는 양반인구가 하층민보다도 더욱 높은 자연증가를 이루어 온 결과였다.

 그런데 18세기 초부터 중간신분층과 평민층에서 신분을 상승한 새 양반들이 중앙과 향촌에 진출·등장하게 되자, 양반계층에서는 또다시 분화를 보이게 되었다. 조정에 진출한 중간신분층 출신의 양반들은 그 수가 적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大家에 포함·수용되어 분화의 여지조차 보이지 않았으나, 향촌에 등장한 다수의 새 양반들은 기존의 사족양반들의 심한 차대 속에 갈등을 빚어내며 양반계층의 분화를 이끌어 냈다. 이른바 ‘儒鄕分岐’는 그 대표적 현상이었다. 그리하여 18세기 중엽을 전후로 하여 이들 재향사족은 점차 향청을 떠나 서원과 향교를 근거로 결집하게 되고, 향청은 수령에 의하여 그들이 차대하던 서얼·평민출신의 양반과 일부 잔류 향반들로 메워지게 되었다. 이른바 유향분기가 전개된 것이다. 전통사족 양반과 신분을 상승시킨 양반과의 차별화가 이제는 향청을 떠나 서원·향교로 결집한 전자(儒)와 새로이 향청을 근거로 결집한 후자(鄕)간의 차별화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조선 후기 향촌사회의 양반은 이로부터 ‘儒’와 ‘鄕’으로 분화되는 대세를 이루었다. 舊鄕과 新鄕, 元儒와 別儒, 士族과 鄕族·鄕品 등은 모두 이러한 두 부류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부류는 그 출신에서부터 갈등을 빚고도 있었지만, 현실적 기능에서도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구향(儒)이 계속 서원과 향약 등을 바탕으로 향론을 주도하고 교화를 담당하면서 향촌사회의 운영권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데 대하여, 신향(鄕) 또한 향청을 근거로 부세를 관장하고 수령을 보좌하면서 자신들의 권익과 지위를 한층 증대하고 상승시키려고 부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간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그것은 이른바 ‘鄕戰’의 이름으로 나타났다.

 향전은 구향과 신향간의 향촌운영의 주도권 다툼이었지만, 수령과 향임·향리로 직결되는 행정체계를 추구하던 당시의 정부나 수령의 입장에서 볼 때는 수령 및 정부에 대한 구향의 저항으로도 비쳐질 수 있는 다툼이었다. 따라서 향전이 거듭되면 될수록 구향은 불리한 국면으로 몰리게 마련이었고, 그것은 곧장 구향의 지위와 영향력의 약화로 이어져 갔다. 이리하여 19세기 중엽을 전후로 해서는 신향 및 향리가 수령과의 제휴 아래 향촌사회를 관장·주도하는 새로운 체제가 널리 성립되었다. 그렇다고 구향의 존재나 세력이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러한 추세에서도 그들의 세력을 보다 효과적으로 결집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면서 전통적 질서를 유지·고수하고자 노력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중앙에서는 이미 양반서얼도 淸顯職에 오르고, 종묘제사에서 獻酌의 반열에도 서게 되는데, 향촌에서는 아직도 사족양반들의 반대로 儒案에 오르지 못하여 향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재향사족들이 위와 같은 변화에 대응하여 마련하고 추진했던 자위 내지 입지강화 방책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동성촌의 형성·확대, 문중조직의 결성·활성화, 下契와의 제휴·통합 등은 대개가 공통적으로 보인 주요 현상으로서 주목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18·19세기 향촌사회에서는 부계친족을 중심으로 한 集姓村, 곧 동성마을이 형성·확산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문중의 결속을 다지는 화수계나 문중계 같은 족계가 또한 성행하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입향조나 계파시조를 비롯한 조상의 선영을 수호하기 위한 규약과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재실·문중사당 등을 건립·운영하였고, 또 문중의 지위를 선양하기 위해서 사우·서원을 건립하고 족보(파보)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동성마을과 문중의 결속을 기반으로 한 재향사족 양반들의 ‘신향·향리-수령’ 지배체제에 대한 무언의 반격이 전개된 것이다.

 한편 재향사족들은 동성마을의 형성과 함께 농민들의 촌락조직인 향도류의 조직(下契)을 사족들의 동계조직(上契)과 통합하여 갔다. 이는 기층농민을 수령권의 통제로부터 방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전개된 촌락의 성장, 부세의 공동납제 확대, 교환경제체제의 발달 등은 농민의 의식을 성장시키면서 농민들로 하여금 ‘두레’의 강화와 다양한 촌계들을 조직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점차 동계를 대신하여 촌락의 운영을 주도하여 가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17·18세기에 전개된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농민층의 분화에 짝하여 더욱 촉진되어 갔다.

 조선 후기 사회의 변동은 노비신분층에서도 일어나서 18세기에 이르면 노비의 존재양태가 조선 전기와는 반대의 양상으로 뒤바뀌게 되었다. 대부분의 노비가 상전이나 소속관청의 경제적 기반과는 관계 없이 외거하면서 身貢만을 납부했던 유형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독자적인 자기경영을 가지면서 보다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이제 노비들은 신분상으로만 노비일 뿐, 현실적으로는 평민과 다름없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노비 소유주는 노비의 노동력을 직접 이용하는 것보다는 농민층 분화에서 창출된 無土不農의 농민, 즉 雇工층을 활용하는 것이 더욱 유리하였고, 또 노비의 입장에서도 노동생산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노동력을 징발당하기 보다는 자기경리를 계속 유지하여 그 잉여의 일부를 신역의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한층 유리하였다.

 노비 존재양태의 이 같은 변화는 우선 정부의 노비정책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17세기 중엽에 이미 공노비의 선상·입역을 폐지하고 고립제를 채택했던 정부는 18세기 중·말엽에 걸쳐 각종 속량책의 확대와 함께 노비추쇄의 중지, 비총법의 실시, 노의 신공 반감과 비의 신공 혁파 등 공노비의 부담과 구속을 경감·완화하는 조치를 계속 취하여 갔고, 나아가 순조 원년(1801)에는 내시노비를 혁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奴良妻의 소생을 從母從良하는 법을 제정·실시하여 노비인구의 감소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는 노비의 존재 의미가 완전히 변질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위와 같은 노비 존재양태의 변화는 노비들의 경제력 향상과 신분상승 운동을 촉진하는 계기도 되었다. 자유로운 자기경영을 갖게 된 노비들이 때마침 전개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힘입어 그들의 경제력을 한층 신장시켜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納粟·軍功·代口 등의 합법적 면천을 하여 갔고, 나아가 중인·양반으로까지도 상승하여 갔다. 그러나 경제력이 미치지 못했던 노비들은 광산·도시·서북지방과 같은 고용노동이 풍부한 곳으로 도망·은루하여 신분을 상승시키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노비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노비제의 붕괴·해체가 이루어져 갔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사회변동·변화에서 신분제의 해체를 뜻하는 가장 극명한 현상이었다고 하겠다.

 조선 후기 봉건적 사회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물론 한편에서는 사회변동에 직면하여 현실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보장받으려는 움직임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서 조선 후기의 사회는 하나의 전환기적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문화면에서 그러하였다. 지금까지 지배질서의 축으로서 조선왕조의 세계관이었던 성리학은, 이 시기의 역사적 상황의 변화에 신축성 있게 대응하지 못하면서 배타적 가치관으로 변질되어 갔고, 그것은 중세적 봉건질서의 모순을 보다 심화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속에서 모순 구조를 타파하려는 양명학, 실학사상, 그리고 감결사상 등이 나타나 사회개혁운동의 정신적 기저가 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조선왕조적 질서의 무너짐으로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중세적·봉건적 체제의 무너짐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사회·경제적 변동 속에서 그 변화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새로이 나타난 양명학·실학·서학 등으로부터 세찬 도전을 받기에 이른 성리학은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나름대로 사상의 혁신을 시도하였다. 이 시기 성리학계에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학파의 정립과 이론의 활발한 분화, 人物性同異論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쟁점의 제기라 하겠다. 경학에 대한 연구는 급기야 인물성 논쟁을 야기시켰다. 즉 四七論辯을 한층 더 깊이 천착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발동되어 나오는 원천을 성품으로 인식하여 사람의 성품과 사물의 성품이 같은지 다른지를 밝히는 인물성동이론의 논쟁을 전개시켰다.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강하게 제시된 華夷論이 이후 사회의 지배이념으로 정립되면서 의리론으로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배타적·보수적 체제를 강화시키는 데 크게 구실하였다. 성리학체계를 묵수하고 기존질서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19세기에 이르러 서양문화의 도전을 받으면서 더욱 강렬해졌는데, 그 움직임은 인간의 주체적 인식을 강조한 心主理論의 제기, 자연계의 형성과 운동의 변화는 모두 氣의 작용이라는 唯氣論과 理의 절대성을 내세운 唯理論의 대두로 나타났다.

 성리학계가 동요하면서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제기되었다. 그것은 1차적으로 성리학계 내부에서 일어났으니, 尹鑴·朴世堂·李瀷·丁若鏞·金正喜 등에 의한 탈주자학적 경학의 연구가 그것이었다. 보다 적극적인 움직임은 양명학의 연구로 나타났다. 이어서 18세기 초의 鄭齊斗는 맹자의 이론을 바탕으로 율곡의 理氣一元論을 계승하여 양명학적 심학관을 구체화하고 체계화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주자와 대립된 입장에서 心卽理說을 제시하고 일체의 학문이 良知를 파악하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학설은 鄭厚一·李匡明·李匡師 등으로 이어져 소론계 강화학파를 이루었다.

 양명학이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주목되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성리학의 궤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하여 성리학적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선 것이 천주교의 수용이었다. 당초 西學이란 이름 아래 학문적 호기심에서 연구되던 천주교가 종교신앙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성리학계는 더 이상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천주교는 가부장적 권위와 나아가서 유교적인 의례의식을 거부했으므로, 그것은 유교사회 자체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또 부패하고 무기력한 양반 중심의 지배체제를 비판하는 이데올로기로서 구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 탄압을 가했다. 이에 천주교는 중인·서민·부녀자층이 중심이 되어 비밀조직을 통해 확산되었으니 지하교회로의 발전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사상계의 갈등 속에서 기존의 민간신앙이 민중세계에 그 기반을 확장시키고 있었던 것도 이 시기에 보여지는 주목되는 현상이었다. 불교계 내부에서도 교계의 재건을 위해 진력하였으니 먼저 승려들은 염불과 함께 참선과 교학을 하는 三學의 수행을 일반화시켰다. 休靜에 의해 비롯된 선교합일의 수행관으로 인하여 종합수도원인 叢林에는 강원·선원·염불원이 갖추어졌다. 나아가 履歷이라는 승가교육과정이 확립되었다. 교학에 대하여 큰 비중을 둠에 따라서 講經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고승들의 문집간행도 성행하였다.

 조선 후기 민간에서 널리 신봉된 것은 도참신앙·무속신앙이었다. 사회가 변동하고 기존의 가치질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비기·도참 등 예언사상이 유행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도참서는≪鄭鑑錄≫이었다. 이 책은 그동안의 감결류와 비기를 집성한 것으로서, 참위설·풍수지리·도교사상이 혼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예언사상은 사회의 모순과 지배층의 비리가 특히 심해지는 19세기 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 정부를 비방하면서 민중의 동요를 자극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사상계뿐 아니라 학문과 기술에 있어서도 새로운 발전이 있었다. 현실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개혁이 추진되어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갔다. 우리 문화의 정리, 즉 학술의 진흥은 당시 사회가 지향하는 문화적 지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문화의 정리작업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흐트러진 문물의 재정비였다. 그러나 보다 주목된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정리작업이 견실하게 추구되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서·법전류·윤리서가 정리되어 편찬되었다. 서적의 편찬이 활발해지면서 인쇄문화가 발달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리하여 금속활자 외에 목활자, 목판에 의한 인쇄가 활기를 띠었고, 상업적 출판도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조선 후기 학술활동에 있어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정조가 奎章閣을 설치하고 운영한 일이다. 왕실도서관으로서 국왕의 정책자문까지 맡았던 규장각에서는 서적의 수집과 편찬 등의 일을 주도적으로 하였다.

 학술의 진흥과 짝하여 나타난 이 시기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實學의 발달이었다. 실학은 단순한 학문활동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갖가지 모순에 직면하여 그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개혁사상이었다. 그러므로 그 사상이나 개혁의 논리는 종래의 성리학과 같을 수가 없었다. 그 사상은 전통적 사회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려는 일련의 진보적 사상이요 학문이었다. 실학자들의 관심은 우선 농촌경제·농업경영에 두어졌다. 당시 농촌경제의 안정 여부는 사회의 안위와 국가의 존폐에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실학자들은 토지소유의 편중으로 말미암아 농민들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고 토지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실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개혁방안에는 차이가 있었다. 柳馨遠은 均田論을, 李瀷은 限田論을, 丁若鏞은 閭田論을 내세웠다. 그리고 徐有榘는 국영농장의 경영을 내용으로 하는 屯田論을 제시하였다. 한편 도회지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일부 실학자들은 상공업을 진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왕조는 당초 농업을 중히 여기고 상공업을 末業이라고 하여 천시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삶의 개척의지가 강렬해지고, 그러한 속에서 생산력이 높아지고, 한편 농촌을 떠난 농민의 일부가 도시로 밀려들면서 도시의 상권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상공업의 진흥, 기술의 개발이 국가나 국민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나타났으니, 柳壽垣·洪大容·朴趾源·朴齊家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상공업의 진흥과 아울러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도입해야 나라가 부강하게 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사회모순의 시정과 민생의 안정, 나라의 부강을 나름대로 시도한 진보적 지식인들은 그들의 구상이 민족의식·문화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국학의 진흥에도 관심이 지대하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언어·강토·역사·문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다. 자아의식, 민족적 자각은 국토의 자연환경, 자원의 분포, 인구와 취락, 자연보호 등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우리의 영토연구로 승화되었다. 그리하여 각종의 지리지·지도·읍지 등이 간행되었다. 즉 鄭尙驥의≪동국지도≫, 金正浩의≪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는 정밀성과 아울러 실용성에서도 돋보였다. 지리지연구에서는 李重煥·崔漢綺·김정호 등의 노력이 이바지한 바가 컸다. 이 시기에 특이한 것은 邑誌의 편찬으로서, 이는 조선 후기 지리학의 최대 성과라 하겠다. 읍지에는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공간성에 대한 관심이 지리학이라면, 시간성에 대한 관심이 역사학이다.

 국사학의 체계화와 더불어 각 시대에 대한 인식도 심화되어 단군조선·고구려·발해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학술이 진흥하고 국학이 발달하면서 百科全書學이 수립되었다. 이는 흐트러진 제도를 정비하려는 개혁의지의 소산이었는데, 처음에는 이수광·이익·안정복·이덕무·이규경 등 개인 차원의 노력이 중심이었으나, 영·정조대에 이르러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백과전서가 편찬되었으니, 그 결실이≪동국문헌비고≫·≪만기요람≫등이다. 조선 후기에서는 서양의 과학기술이 전해져 이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졌다. 천리경을 비롯한 서양의 천문기기가 도입되었고, 서양의 역법을 익혀 시헌력이 채택되었다. 천문·역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주관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져 地球球形論과 地球回轉說이 제시되었다. 그밖에도 지리학·수학·의학 등에서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나타난 새로운 경향의 특징은 한마디로 서양 과학기술의 영향을 받아 세계관의 변화를 보여주었다는 데에 있다. 즉 중국 중심의 세계 인식에서 세계적 차원으로 과학적 안목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에는 홍대용·정약용·최한기 등의 역할이 컸다.

 의식의 확대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도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었다. 조선 후기 문학계의 변화에서 주목할 양상은 국문학의 성장이었다. 한문이라는 문자상의 제약 때문에 문학적 욕구의 구현이 어려웠던 서민층에게 국문학의 성장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그 결과로서 辭說時調가 유행하였고, 다채로운 양상의 가사가 창작되었다. 작품의 배경은 공상적인 세계보다는 현실의 서민세계가 중심이었고, 작품의 주인공들도 영웅 중심에서 서민적 인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한편 전국 각지에 도시적 생활공간이 늘어나면서 판소리와 같은 놀이패가 발달하기도 하였다. 판소리는 광대들이 한 편의 이야기를 가창과 연극으로 연출하여서 읽는 소설보다 훨씬 흥미를 돋우었는데,<춘향전>·<심청가>·<흥보가>등은 매우 인기 있는 판소리 작품이었다.

 미술에 있어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먼저 회화부문에서는 산수화와 풍속화가 발달하였는데, 鄭敾은 우리 나라의 자연을 그려내는 데에 알맞은 구도와 화법을 창안해 냈으니 이른바 眞景山水畵라는 화법이다. 풍속화에서는 金弘道와 申潤福이 각기 농촌과 도시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한편 조선 후기 회화에 있어서 주목되는 현상의 또 하나는 民畵의 유행이었다. 대개 무명작가에 의해 그려진 민화는 격조가 뒤떨어지지만, 파격적인 구성과 화려한 색채가 특징적이었다. 서예에 있어서는 다양한 서체가 연구되는 속에서 금석학에 바탕을 둔 서도가 널리 행해졌다. 특히 김정희는 청대의 서예 이론과 서법을 수용·종합하여 특유의 秋史體를 개발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왕실을 중심으로 미려한 필체의 宮體가 발달하면서 한글서체가 새로운 차원을 선보였다.

 조각에 있어서는 그리 뛰어난 변화를 볼 수 없었지만, 왜란·호란으로 사찰이 크게 훼손되면서 이를 복구하려는 佛事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불교미술이 나름대로 꽃을 피웠다. 그러한 속에서 불상의 조각이 다수 이루어졌는데 현존하는 불상은 대개 이때에 조성된 것이었다. 조선 후기 예술계에서 특히 주목되는 분야는 공예부문이었다. 삶의 질적 변화에 부응하여 가구와 장식품도 그 격에 맞는 작품이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 공예품인 도자기는 청화백자가 유행하였다. 경기도 광주 분원요에서 주로 생산된 청화백자는 그 종류도 다양했지만, 문양·기법 등에서 작품성이 매우 뛰어났다. 건축에 있어서는 기존의 건축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는데, 향교·서원·사찰의 건축이 널리 유행하였다. 특이한 것은 邑城의 건축인데, 수원의 華城이 대표적이다.

 한편 음악의 경우는 아악을 중심으로 한 궁중음악이 쇠퇴한 반면에 민간음악이 서민사회의 풍류문화 보급과 관련하여 새로운 양상으로 성장하였다. 즉 가객과 풍류객들이 대두하면서 가곡·가사·시조 등과 같은 풍류음악이 유행하였고, 광대들에 의해 판소리와 같은 공연예술이 발달하였다. 음악과 함께 춤도 발달하였으니, 특히 민중의 생활환경을 토대로 한 민속무가 나름대로 발달하여 민중의 소박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민속무에는 풍물굿·탈춤·강강술래·승무 등이 있었다. 그리고 연극에서는 판소리와 더불어 민속극으로서 가면극·꼭두각시놀음·탈춤들이 서민사회에서 인기가 대단하였다.

 조선 후기의 사회는 18세기 이후 기존의 신분제가 이완되어 나갔고, 민중사회의 성장이 확인된다. 17세기 장기간에 걸친 기근과 전염병의 피해가 주기적으로 반복됨에 따라 국가에서도 각종의 사회제도 개혁을 뜻하는 변통론들이 제기되어 변화를 촉진시키고 있었다. 그와 같은 변화는 대략 18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집중적으로 나타난 共同納의 관행을 통해서 확인된다. 이 공동납의 관행 아래에서는 면리 단위로 조세를 부담할 호구수의 총액 즉 戶摠과 口摠이 정해졌고, 이에 근거하여 각종의 조세가 개개인이 아닌 각 면리에 공동으로 부과되었다. 이 새로운 부세징수 방식으로 말미암아 부세의 기준인 호구총수가 정해진 이후에는 호적 기재상의 직역 표시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18세기 전반 이후 신분별 호구 비율의 급격한 변동은 바로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사회에 있어서 사족지배체제는 상당 기간 지속되었고, 재지사족들은 士族勢를 이루면서 양반 신분을 새롭게 획득한 사람들과 자신을 엄격히 구별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은 종법제도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제사상속권을 강화하고, 양반층을 중심으로 한 동성촌락인 班村을 출현시켰으며, 촌락사회에서는 宗家型 地主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반상제적 체제로의 전환과정에서 상민들의 성장이 계속되었고, 그 당연한 결과로 양반 사족에 대한 상민층의 저항이 점차 심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향약이나 향안이 변질되어 나가는 시점에 이르게 되자, 양반층은 상민층에 대한 계속적 지배를 위해서 새로운 공동대응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여기에서 18세기를 전후해서 사족들은 일종의 자구책으로 族契, 門契를 강화하거나, 서원·祠宇를 장악하고 유력 성씨들이 반촌을 형성하여 상민 촌락 곧 民村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어 갔다.

 이처럼 양반층이 상민들에 대한 지배와 통제 방안을 여러 방향에서 모색해야 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상한들의 성장을 나타내 주고 있다. 상한들 가운데 일부는 18세기 중반을 경과하면서 부민층으로의 성장을 계속했다. 이들 부민들은 신향층을 형성하기도 했고, 수령과 결탁하여 守令-鄕吏 수탈구조를 이루며 부세행정의 말단 기구에 참여해서 영향력을 키워갔다. 이와 같이 민인들이 향권에 접근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이들은 사족세가 약한 지역에서는 향권을 두고 구향층과 대립하여 향권을 장악하거나 이를 분점하기도 했다. 이처럼 신향을 형성하게 된 상층 상한들 이외에도 서민지주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경제력의 향상을 기반으로 하여 향촌에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 가고 있었다.

 한편 일반 상한들도 경제적 활동이나 신앙활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결속을 강화시켜 나갔는데 香徒와 淫祀나 村契·두레와 같은 조직이 그것이다. 그리고 分洞으로 인해서도 민중조직이 활성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촌계나 두레 등 촌락사회를 기반으로 한 조직이 강화됨과 동시에 촌락사회로부터 이탈되어 간 下賤民들도 민중결사를 시도했다. 流亡한 농민들 가운데 도성이나 읍성 주위에 거주하던 이들은 생계유지나 자위의 수단으로 향도계를 조직하여 잡역을 담당했다.

 한편 당시 향촌사회에서는 향회의 역할이 주목된다. 18세기에 들어와서 향회가 부세행정에 있어서 수령의 자문기관으로 성격이 전환되었고, 그 구성에 있어서도 ‘大小民齊會’의 형식으로 반상 구분없이 참여하는 향회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 향회에서 새롭게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계층으로 ‘饒戶富民’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농민층 이외에도 상인이나 광산업자 등 다양한 출신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賣鄕 등의 방법을 통해서 향권에 접근해 갔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향회의 기능이 부세 자문기구적 성격보다는 민의를 집결하고 읍정을 주관하는 기능으로 발전되어 갔다. 또한 당시 공동납의 관행이 강화되어 가던 과정에서 과외의 수취나 부정기적 재정수요가 발생했을 때 그 부담이 요호부민층으로 집중되었고, 그들의 부담은 결국 일반 농민층으로 전가되었다. 여기에서 관과 요호부민의 대립과, 관에 기생하는 吏鄕層과 농민의 대립이라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향회가 농민항쟁의 조직기반으로 활용되었고, 요호부민층이 항쟁의 선두에 설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졌다. 그런데 사족, 이향이나 요호부민이 아닌 일반 민인들도 19세기 중엽 이후에 이르러서는 민중의 이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던 기존의 향회와는 별도로 민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민중조직의 출현은 민중세력의 성장을 나타내는 현상이며, 이 조직들을 기반으로 하여 민중저항운동이 준비되고 실천되어 갔다.

 이상과 같이 후기사회에서는 민중조직이 발전하고 민중사상이 성행하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조건은 조선 후기 민중운동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함께 주목해야 할 요소이다. 민중사상이란 정통적 성리학의 지배이념에 대해 회의하거나 이를 거부하려는 사상이다. 성리학이 당시 지배층의 이념이었다면 민중사상은 민중이 창출했거나 실천하고 있었던 이념으로서, 제도의 개편이나 사회변혁을 추구하던 이념이었고 민중계의 이익을 반영하는 사상이었다. 이 민중사상은 불교나 鑑訣思想과 같은 전통적 종교신앙과 관련되는 사상이거나, 서학·동학 등 신종교운동의 틀 안에 드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민중사상은 성리학에 대한 사상적 도전이었으며,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거부하거나 조선왕조의 멸망과 교체를 주장하는 사상으로서 조선 후기의 사회변동에 일정한 영향을 끼쳐갔다.

 이러한 민중사상을 전파하거나 실천했던 인물들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존재는 현실의 정치집단으로부터 배제된 저항적 지식인으로서 地師나 儒醫, 學長 등에 종사하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민중사상의 전파가 중에는 巫覡이나 승려들도 있었다. 한편, 18세기 말엽 이래 서학이 수용되고 19세기 중엽 이후 이양선의 출몰이 빈번해졌다. 이에 일부 민중저항운동자 가운데에서는 이와 같은 시대적 조건을 활용하여 저항운동을 전개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당국은 민중사상을 異端邪說로 규정하고 斥邪衛正의 기치를 들어서 이를 박멸하고자 했다. 그러나 민중저항운동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정치적 및 사회경제적 현상에 관한 근본적 대책이 없이 민중사상에 대한 규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18세기 민중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유민에 대한 검토가 우선적으로 요청된다. 유민 발생의 근본적 원인은 지주제의 전개에 따른 농민층의 분해와 부세수취 과정에서 드러나는 苛斂性에서 찾아진다. 이로 인해서 농민층은 유망을 강요당했다. 이들 유민들 가운데 일부는 서울을 비롯한 도시로 진입하여 임노동자층을 형성하기도 하고 또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상업이나 광업·수공업 분야에 편입되기도 했다. 그들 중 일부는 국가의 수탈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산간의 화전지대나 국경지역 또는 島嶼地方으로 유망해 갔다. 이 유민 가운데 일부는 국가의 부세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승려가 되거나 明火賊으로 轉化되기도 했다

 명화적들은 주로 양반이나 土豪家를 습격하거나 포악한 관리들의 만행을 응징하기도 하며, 관부를 습격하여 물화와 군기를 탈취하거나, 지방에서 중앙으로 보내는 각종 상납물을 약탈했는가 하면, 또한 그들은 유통로를 장악하여 상인들의 재화를 약탈했다. 이러한 명화적의 활동은 당시 지배층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주었다. 이 시기 중세 체제 내에서 전개되던 명화적의 활동은 19세기에 이르러 중세체제를 거부하는 민란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위치하였고, 조선 후기 민중운동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

 18세기를 전후하여서는 劇賊의 발호가 심화되기도 했다. 극적은 다수의 도적들이 집단적으로 출몰하여 약탈행위를 일삼던 무리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특정 지역에 웅거하면서, 극적 상호간에 일종의 연락망을 갖기도 했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각처의 토호들과도 연계되었다. 이들은 명화적과 유사한 존재였으나, 그 조직이나 상호 연계성 또는 농민층과의 결합도 및 장기간에 걸친 활동 등에 있어서 명화적들과는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유민이 점증하고 극적의 활동이 강화되던 상황에서 영조 4년 戊申亂이 발생했다. 1720년대는 조선왕조 정치체제의 내적 모순과 지배층간의 갈등이 극단적으로 노출되던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붕당세력이 약화되고 집권층의 재편이 진행되면서 무신란을 주도하게 된 戊申黨이 영조 즉위 직후에 형성되었다. 무신당은 당론상으로 볼 때 少論 峻論系와 濁南 및 小北系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일부 재지사족층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당대 名族의 후예였지만, 숙종 연간의 甲戌換局(숙종 20년 ; 1694) 이후 정권에서 배제되고 경제적으로도 급속히 몰락해 가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무신당에서는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는 反正을 통해서 중앙정계로 진출하고자 했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로는 李麟佐와 鄭希亮을 들 수 있다. 무신란의 당초 의도는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거병하면 여주, 이천에서 이에 호응하고, 주도층 자신들이 京中을 교란시키면 평안병사가 勤王을 구실로 상경하여 도성을 평정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반군들은 경기 및 충청도 일부 지역의 민심이 정부당국으로부터 이반되어 가던 상황에서 청주를 근거지로 확보한 후 그 세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이들은 慶尙下道에서 안음·거창·합천·삼가·함양 등을 장악했다. 전라도에서도 부안과 변산의 토호는 녹림당세력을 동원해서 부안 및 전주를 장악했다. 그러나 영남과 호남에서의 거병이 계획대로 추진되지는 못했다. 경상도에서는 안동과 상주의 점거가 실패로 돌아갔고 전라도에서도 나주세력의 호응을 얻을 수 없는 데다가 평안병사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청주의 반군세력과 변산의 녹림당은 서로 합세했지만, 경상하도의 반군들은 반군의 주력과 차단되어 있었다.

 무신란은 그 계획 단계에서 몰락한 사족 및 재지사림 혹은 토호나 鄕品, 장교 등의 관여가 확인된다. 그러나 무신란의 전개과정에서 녹림당의 세력이나 일반 민인들의 광범위한 참여가 이루어졌고, 그들의 참여 동기를 감안할 때, 이는 민중운동의 하나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무신란이 政變 차원이 아니라 兵亂 차원에서 전개된 배경으로는 먼저 재지사족이나 토호 등의 현실비판 의식 및 정치참여 의지를 들 수 있다. 그러므로 많은 민인들이 당론 내지는 국왕 선택에 따른 권력투쟁과는 무관했지만, 병란의 성공을 통해서 부세수탈을 면해보려던 현실적 요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9세기의 민중운동에서는 殘班과 下民이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 무신란은 민중운동 발전과정에서 거치게 되는 필연적 통과점으로 과도기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세기는 중세사회의 해체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과정이었고, 조선사회 내부의 모순으로 인한 제반 갈등이 심화되던 때였다. 이 시기의 농민들은 이미 18세기 민중운동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19세기는 ‘민란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민중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이 민중운동들은 조직과 진행과정, 지향과 이념의 측면에서 다양한 편차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때의 민중운동은 저항의 주체나 투쟁공간, 운동의 지향점이나 투쟁형태 등에 따라서 몇 갈래로 나뉘어 진다. 향촌사회 기층민의 계속적인 유망과 함께 抗租, 抗稅와 같은 투쟁도 18세기에 이어서 계속해서 전개되었다. 擊錚, 呈訴나 官前號哭, 白活, 等訴와 같이 관을 상대로 하는 민중운동, 그리고 掛書, 亂言, 횃불시위, 山呼 등 민인들이 구사해 오던 전통적인 저항의 형태도 함께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민중운동을 대표하는 것은 民亂과 變亂을 들 수 있다. 민란 혹은 民擾라 할 때는 향촌사회에 뿌리를 두고 그 속에서 생산활동을 하며 생활하던 사람들이 국가권력에 의한 부세수탈이나 수령과 이서배의 수탈에 대항하여 通文을 돌리거나 呈訴를 거쳐 봉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민란은 봉기지역이 고을 단위에 머물고 있으며, 투쟁의 목적도 탐관오리의 규탄이나 부세수취의 부당성에 대한 경제투쟁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이 민란적 성격의 농민항쟁은 보통 향회에 의해서 주도되었으며, 군현 단위의 향권을 장악하거나 중앙정부의 회유가 있으면 곧 진정되었다.

 “民擾가 越境하면 叛亂이라 칭해진다”라는 말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변란은 고을의 경계를 벗어나는 행위였다. 이러한 변란 혹은 병란은 稱兵騷亂, 賊變, 逆謀 등으로 불리기도 했던 정치투쟁이었다. 한편 농민을 주체로 한 대규모의 변란으로서 고을 단위의 국지성을 벗어나 중앙권력의 타도와 사회개혁을 주장하며, 비교적 장기간 지속되는 무장투쟁의 경우는 農民戰爭으로 규정된다. 농민전쟁은 농민운동 내지 민중운동에 있어서 가장 고양된 형태로 평가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전반기의 민중운동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平安道農民戰爭’으로 불리는 ‘洪景來亂’을 들 수 있다. 이 난은 조선 후기 평안도지방이 가지고 있던 사회경제적 특성 및 이 지역에서 누차에 걸쳐 일어났던 농민봉기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발생했다. 즉, 이 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평안도의 지역적 특성에 주목해야 한다. 중앙정부의 차별을 강요받고 있던 평안도는 사족층의 형성이 어려웠다. 그러므로 향인층이 향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대청무역이나 수공업, 광업 등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세력들이 신향층을 이루면서 향촌질서를 재편하고자 했다. 이들 신향층의 신분 상승 욕구는 부민층에 대한 수령의 수탈행위로 타격을 받게 되었고, 수령권과 부민층의 대립이라는 갈등구조를 발생시켰다. 이러한 구도 안에서 평안도에서의 민중저항운동이 양성되고 있었다.

 이 난은 수령권의 부세수탈과 그 수령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중앙권력에 대한 저항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 지역의 부민층 등에 의해 수년 간에 결쳐서 준비되었던 이 난은 순조 11년(1811) 12월에 평안도 가산 다복동을 근거로 하여 시작되었다. 이 난에서는 홍경래가 都元帥로, 金士用이 副元帥로 활동했고, 禹君則·金昌始가 謀士의 직책을 맡았고, 李禧著를 비롯한 이 지역의 저항적 지식인과 신향층 등이 대거 참여했다. 난의 발발 직후 홍경래가 지휘하던 남진군은 가산과 박천을 함락시켰고, 김사용의 북진군은 곽산, 정주를 함락시키는 등 반란 후 10여 일 만에 청천강 이북 7읍을 석권했으나 松林里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부터 이들은 定州城에 웅거하여 저항을 계속했다. 이들의 봉기는 이듬해 4월까지 지속되었으나, 정주성의 함락으로 이 난은 실패로 돌아갔다.

 홍경래난은 평정된 이후에도 농민들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으며, 그들의 저항운동에 힘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삼정의 문란을 비롯하여 중세사회의 해체현상이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었던 당시에 “홍경래가 죽지 않았다”는 설이 떠돌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농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반란을 지향하던 심성을 나타내 준다. 그리하여 홍경래난이 평정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농민의 저항운동은 다시금 일어났고,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대규모의 농민항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철종 13년(1862)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발생한 ‘1862년 농민항쟁’으로 불리는 투쟁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농민항쟁은 철종 13년 2월 경상도 단성에서 처음으로 발생했다. 단성농민항쟁은 곧 인근 지역인 진주로 확대되었고, 이 사건을 도화선으로 삼아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그 해 추수기까지 대략 80여 개의 군현에서 민중봉기가 발생했다. 봉기가 발생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서 야기된 부세문제가 항쟁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농민항쟁에 참가하는 계층은 대개가 신분적으로 常漢이고 小貧農의 처지에 있는 일반 농민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외에도 소빈농에 준하는 유민, 雇工이나 노비층의 참여도 확인된다. 물론 일반상인이나 수공업자의 참여도 있었지만 이들이 항쟁의 주류를 이루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람들을 조직하고 봉기를 주도한 지도부는 주로 일부 몰락양반이나 농촌 지식인으로 구성되었다.

 1862년 농민항쟁은 조세제도의 철폐 및 시정의 요구를 통한, 경제적 측면에서 반봉건을 주창한 것이었다. 그들은 삼정제도에 대해 저항하며 새로운 부세체제를 요구하는 반봉건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수령, 관속, 읍권 담당자들에 대해 공격하고 농민 스스로가 읍권을 장악하던 과정에서 현존하던 봉건적 통치체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 정치의식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농민들의 의식은 점차 고양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농민들에게 다양한 계급모순 외에 민족모순이 중첩적으로 부가되자 그들의 의식과 항쟁의 외연은 확대되어 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래로부터의 변혁과 저항의 주체로 결집되어 갔다. 개항 이후 도처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은 바로 이 같은 1862년 농민항쟁을 그 계기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변란은 19세기 전반기의 변란이나 여타 민란과는 일정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즉, 변란 주도층의 지역적 구성범위가 확대되었고, 변란의 투쟁목표는 왕조의 타도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변란 주도층이 이념적 무기로 가지고 있던 감결신앙에서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주체적 의지에 관한 인식이나 구체적 전망이 제시되지 못했다. 또한 변란 지도부는 생산현장이나 향촌사회를 오랫동안 떠나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을 묶어낼 수 있는 조직기반에도 문제가 있었다. 또한 변란 지도층이 가지고 있던 반외세의 이념을 민인들에게 본격적으로 확산하는 데에도 난관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변란을 통해서 확보된 지역간의 연계성이나 反王朝的 의지 및 反外勢의 이념은 19세기 후반기 동학농민전쟁과 같은 대규모의 민중항쟁을 가능케 해준 역사적 체험이 되었다.

 이러한 거국적인 농민항쟁과 농업에서부터 상공업으로의 경제적 비중의 증가, 여기에 편승한 새로운 세력으로서의 중인층의 성장과 전통적인 농촌사회 구조의 해체 그리고 도시(邑治)의 발달과 도시 주민의 시민적 존재로서의 전화 등은 결국 중세사회로서의 양반사회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李樹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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