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5. 근현대
  • 1) 근대적 사회변동과 자주 개혁의 시련
  • (1) 근대의 초기적 특징

(1) 근대의 초기적 특징

 근대의 특징은 인간주의 사상의 확산과 생활화 및 제도화에 있다. 그를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발견이 선행되어야 하고 인간의 발견은 자기 발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 후기에 실학과 더불어 자국어와 자국사연구가 일어난 것도 자기발견의 단면이었다. 자기를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발견하면 자기가 소속한 나라와 겨레에 대한 의식이 고양되면서 비인간적인 중세 신분제에 대하여 비판과 개혁 논리를 찾게 된다. 거기에서 평등사상이 대두하고 평등사상에 기초한 서민문화가 일어난다.395)조선 후기의 실학에 대하여 주목한 최초의 역사서는 1930년 崔南善의≪朝鮮歷史講話≫인데(육당전집편찬위원회,≪六堂崔南善全集1≫, 현암사, 1973, 52쪽), 실학을 사회개혁사상으로 진단한 것은 丁若鏞의≪與猶堂全書≫를 1934년부터 간행하면서 그에 관여한 安在鴻·白南雲 등에서 비롯되었다(趙東杰,≪現代韓國史學史≫, 나남출판, 1998, 203쪽 주133) 참조). 그러한 조선 후기의 실학연구, 사회변동, 민족의식의 고양, 서민문화의 발달 등의 근대적 지향은 세도정치기의 반동으로 말미암아 후퇴하거나 잠복했다가 세도정치가 물러간 후에 다시 부상하였다. 그것들은 이웃 중국대륙에서 阿片戰爭(1840), 태평천국의 난(1853), 영불연합군의 북경침략(1856∼1860) 등의 충격적 격변의 영향도 입어 새로운 얼굴로 부상하였다. 실학의 개혁론을 새 시대에 맞게 다듬어 내수자강론에 이어 동도서기론으로 꾸몄던가 하면, 그에 만족하지 않고 혁명적 변혁을 추구한 개화사상을 일으키기도 했다. 동도서기론은 조선 후기 개혁사상의 정직한 계승자였는데 개화사상은 구시대의 계승을 수구라고 공박하며 혁명적 변화를 추구했다. 그렇게 혁명적 변화를 추구한 개항전(1840∼60년대)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손꼽는 이는 최한기를 비롯하여396)權五榮,≪崔漢綺의 學問과 思想硏究≫(집문당, 1999), 53∼61쪽.
―――,<새로 발굴된 자료를 통해본 혜강의 기학>(≪혜강 최한기≫, 청계, 2000), 15쪽.
박규수·吳慶錫(1831∼1879)·劉鴻基(1831∼1884?) 등이다.397)愼鏞廈,<개화사상의 형성>(≪서세동점과 문호개방-한국사37≫, 국사편찬위원회, 2000), 92∼105쪽.

 근대사가 동트는 또 다른 특징은 조선 후기 이래의 사회변동과 서민문화의 정신 즉, 평등과 평화사상에 기초한 토착종교가 발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찾는다. 1860년에 경주에서 人乃天의 기치를 들고 東學이 발생하였다. 조선 후기부터 풍미한 평등과 평화를 갈망한 鄭鑑錄사상도 민중사상의 일단으로 주목해야 한다.398)高成勳,<정감록사상과 변란>(≪朝鮮後期 變亂硏究≫,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1993), 25∼34쪽. 그때 사회변동을 재촉한 1862년의 삼남민란도 중세 신분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근대적 성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삼남민란이 전통시대의 농민반란 수준에 머문 것이냐, 농민운동 수준에 이른 것이냐, 혹은 과도기의 농민전쟁으로 볼 것이냐는 견해가 엇갈려 있다.399)농민반란은 전통시대에 새로운 사회 건설의 이념 없이 말 그대로 반란을 일으킨 것을 말하고, 농민운동은 농민의 권익과 지위향상을 위한 이념을 가지고 그 이념을 목적으로 전개한 사회경제운동을 말한다. 운동 성격에 따라 개혁이나 혁명 등,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농민전쟁은 농민반란이 농민운동으로 발전해 갈 때 농민운동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과도기적 현상을 농민전쟁이라 한다. 농민전쟁으로 본다고 해도 근대사의 새벽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다음의 근대사적 특징은 대원군의 개혁정치(1864∼1873)이다. 특히 서원철폐와 호포제실시는 양반 봉건제에 대한 개혁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혹간 말하는 왕실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고육책이라고 하더라도 양반 봉건제에 대한 비판 없이 단행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근대사를 일으키는 개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비변사를 폐지하고 재야를 망라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던 것도 안동 김씨 중심의 노론 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대원군 집정기에 판서급 이상 취임자 139명 가운데 노론이 78명으로 56%에 이르고 안동 김씨가 10%에 이를 정도로 구조개혁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평가한 경우가 있는데,400)成大慶,<대원군의 내정개혁>(≪한국사 37≫, 국사편찬위원회, 2000), 159쪽. 인원 통계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요직을 누가 맡고 있었는가를 보아야 하고,401)핵심요직인 총융사·어영대장·금위대장·훈련대장은 김좌근·김문근·김병기·김병국 등의 안동 김씨가 전담하고 있던 것을 대원군 집권기에는 그들이 하나도 맡지 못하였다. 대원군 퇴각후에는 민씨들이 독점하였다. 또 구조개혁 같은 혁명 수준이 아니라 부분적 개혁 수준의 변화도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의 개혁이나 변동이 19세기 반동체제 속에서도 서서히 진행되다가 세계사적 격변기를 맞아 새롭게 변화하였다. 그 새로운 변화가 근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정치제도와 세계 인문과 지리를 소개한≪地球典要≫(1857) 등이 사상계를 바꾸고 있었던가 하면, 동학의 발생(1860), 삼남민란(1862), 대원군의 개혁정치(1864)와 아울러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에 대한 항쟁(1866) 등을 근대사의 시동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독자적으로 근대성을 본질로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므로 사건마다에 내함하고 있는 근대적 요소를 모아 그 총체적 변화에 주목하여 근대사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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