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5. 근현대
  • 1) 근대적 사회변동과 자주 개혁의 시련
  • (5) 대한제국의 성립과 독립협회, 시민운동의 대두

(5) 대한제국의 성립과 독립협회, 시민운동의 대두

 열국의 침략으로부터 탈출해 보려는 조선왕조의 몸부림은 아관파천에서 벗어나 경운궁으로427)慶運宮은 헤이그특사사건 때문에 1907년 7월에 광무황제가 일제에 의해 퇴위당하고 융희황제가 즉위한 곳인데 그것을 왕위를 선양한 궁전이라 미화하여 중국에서 선위한 궁전의 이름으로 불리는 德壽宮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환궁하자 곧 대한제국의 성립으로 나타났다. ‘朝鮮’에서 ‘韓’으로 고친 국호는 고‘조선’이 위만의 침략을 받아 망할뻔 하다가 準王이 남분하여 金馬(益山)에서 馬‘韓’을 일으켜 중흥했다는 마한(삼한)정통설과428)馬韓正統說은 숙종 때 洪汝河의≪東國通鑑提綱≫에서 주장한 후 실학자들이 그의 주장을 이었고, 구한말 대부분의 역사서가 마한정통설을 수용하고 있었다. 마한정통설과 다른 고대사 인식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을 정통으로 보는 三朝鮮說이 있고, 단군·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夫餘正統說이 있다. 같은 중흥의 역사 재현을 바라는 기원을 담은 것이다. 삼한정통설이 맞든 말든 중요한 것은 그렇게 ‘자주독립’과 ‘중흥’의 기원을 담은 국호라는 점이다.429)趙東杰, 앞의 책(1998), 300쪽.

 대한제국의 성립과 더불어 독립국가의 황제가 하느님에게 고하는 圜丘壇을 설치하고430)圜丘壇 축조는 1895년 7월 12일 왕명으로 결정하여 10월 15일 원구단에서 황제존칭 봉위식을 거행하기로 예정한 바가 있었으나 일·영·러·미국공사가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것을 1897년 대한제국을 성립시키면서 달성한 것이다.<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였다. 그리고 1898년에는 量地衙門을 설치하고 전국에 걸쳐 토지조사를 실시하는 등, 각종 개혁을 단행하였다. 서울의 정리사업으로 도시모습이 일신해졌고 개항장일망정 새로운 도시가 탄생하고 있었다. 전기·교통·통신시설을 비롯하여 산업·교육·언론·의료·군사·경찰·사법제도의 개선이 외국인을 놀라게 할 정도로 달라지고 있었다.431)정연태,<光武年間 西洋人의 高宗觀>(≪韓國史硏究≫115, 한국사연구회, 2001), 163∼165쪽. 양지아문은 1901년 토지에 대한 권리증을 발부하는 地契衙門으로 개편하였다. 이러한 광무 초년의 각종 정부사업을 광무개혁사업이라 한다.432)地契衙門은 1904년에 탁지부 量地局으로 개편되었다. 1898년부터 量地衙門에서 실시한 토지조사대장을<光武量案>이라 하는데 현재 서울대학교의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한편 1896년 친목단체로 출발한 獨立協會가≪독립신문≫을 발행하면서 시민운동 단체로 발전하여 각종 개혁운동을 전개했는데 1898년 만민공동회를 통한 의회설립운동이 특별히 주목을 받았다. 1898년에는 李鍾一을 중심으로 대한제국 民力會도 탄생했고, 여권운동도 대두하여 ‘여권통문’을 선포하고433)≪皇城新聞≫, 1898년 9월 8일자.
≪뎨국신문≫, 1898년 9월 13일자.
≪독립신문≫, 1898년 9월 13일자.
최초의 여권단체로 贊襄會를 결성하고 최초의 민립여학교인 順成여학교를 설립하였다.434)朴容玉,≪한국 여성근대화의 역사적 맥락≫(지식산업사, 2001), 343∼348쪽. 독립협회에 대항하여 결성한 皇國協會도 일어났는데 보부상 조직이라고 한다면435)趙宰坤,<皇國協會의 정치경제적 활동>(≪한국근대사회와 보부상≫, 혜안, 2001), 174쪽. 이익단체의 성격이 강했던 것 같다. 그러나 1898년 독립협회가 上議院 설립운동을 전개한데 반하여 황국협회가 民議院 설립운동을 전개한 것은436)趙宰坤,<하원(민선의원) 설립운동>(위의 책), 181쪽. 황국협회의 반동화에도 불구하고 대의정치의 저변을 확대시키면서 시민운동의 대중화를 도모한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러한 시민운동을 광무개혁운동이라 한다. 시민운동의 과제가 그때나 지금이나 출세 수단이 아닌 순수성과 대중화가 과제라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이와 같이 광무개혁운동은 독립협회·민력회·찬양회·황국협회 등의 시민(브루죠아)조직을 통해 나타났다. 특히 여권운동도 일반 시민운동과 같은 시기에 대두한 것은 주목할 점이다. 이때≪독립신문≫에 이어≪皇城新聞≫과≪뎨국신문≫이 간행되어437)이때의 신문 발행을 보면 다음과 같았다.
漢城旬報 1883. 10. 31(순간, 통리아문 博文局) 갑신정변으로 폐간
漢城週報 1886. 1. 25(주간, 통리아문 박문국) 1888. 7. 7 폐간
독립신문 1896. 4. 7(격일간 후에 일간, 徐載弼) 1899. 12. 4 폐간
협셩회회보 1898. 1. 1(주간, 배재학당 協成會) 동년 4. 9일 매일신문으로 고쳐 최초의 일간지, 1899. 4. 4 폐간
京城新聞 1898. 3. 2-대한황셩신문 1898. 4. 6-皇城新聞 1898. 9. 5-漢城新聞 1910. 8. 30∼9. 14
뎨국신문 1898. 8. 10(일간, 李鍾一) 1910년
時事叢報 1899. 1. 22(洪中燮) 1899. 8. 17 폐간
商務總報 1899. 4. 14(商務公社, 皇國協會系) 매일신문 시설 이용.
시민운동을 한결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와 같이 19세기 말에 대두한 시민운동이 20세기 초두에 개혁당·협동회·진명회·공진회·보안회·헌정연구회·국민교육회 등으로 발전해 갔는데 1904년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강화됨에 따라 시민운동이 구국운동으로 통합 발전해 갔다.

 시민운동이 광무개혁운동으로 전개될 때 어느 것도 대중성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광무개혁사업과 광무개혁운동이 전개되기 전에 동학농민전쟁을 담당했던 농민의 향방을 추적해 보면, 영학당·남학당·동학당·북대·남대 등의 이름으로 활약하다가 1900년부터 활빈당으로 개편되어 갔는데 그것을 모두 하나로 묶어 ‘광무농민운동’이라 이름하고 있다.438)趙東杰,<光武農民運動과 申乭石 의병>(≪한국근현대사연구≫19, 한국근현대사학회, 2001), 102쪽. 농민운동이라고 해도 소상인이나 계절 노동자도 참가하고 있었으므로 농민운동이 사회운동으로 발전해 가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1904년에 이르러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응하여 그들은 의병으로 전환되어 갔으므로 사회운동으로 전환할 겨를이 없었다. 따라서 1897년부터 1904년까지의 역사는 정부의 광무개혁사업과 시민운동인 광무개혁운동과 민중적인 광무농민운동으로 구조화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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