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5. 근현대
  • 2)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독립운동
  • (5) 일제 강점기의 생활

(5) 일제 강점기의 생활

 이때의 역사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역사적 교훈이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먼저 주의할 것은 한국근대사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근대사이므로 한국사의 맥락으로 본다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사를 보면서 일본근대사의 한 토막으로 보아서 안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역사 서술에서는 한국인을 주체로 한 표현이어야 한다. 특히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서술할 때 주어가 무엇인가를 주의해야 한다. 따라서 1910년부터 1945년의 역사에서 일제의 식민통치는 객체이고 한국독립운동이 주체인 것이다.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한(조선)민족이 어떻게 생활했던가의 역사인 것이다.

 생활상에 대하여 대체적인 상태를 보기로 한다. 해방 직전의 생활 유형을 보면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소수의 직업성 독립운동가 외에 ① 8할이 넘는 농민·어민·화전민·노동자 ② 영세 상인 ③ 식민지하에서도 천민으로 묶여 있던 머슴·백정·무당·점쟁이 등 ④ 신교육을 받은 언론인·교원·학생 또는 지식인 ⑤ 조선시대와 다름없이 생활하던 양반 유생이나 불교의 승려와 기독교·천도교·신흥종교 종교인 ⑥ 중소 지주와 중류 상공인과 지방관청(도·부·군·읍·면)의 하급관리 ⑦ 대지주와 식민지 신귀족과 조선총독부 관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①②③은 하층 백성이고, ④⑤⑥은 중류 생활자였고, ⑦은 상류의 생활자였다. 거기에서 하층민이 8할 5부에 이르고 중류생활자가 1할을 넘고 상류는 2부 정도로 2천4백만 인구에 30만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게 보면 식민지하의 민족문제라면 농민문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일제하의 농민은 8할이 소작농민으로 고율 소작료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러므로 소작쟁의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1930년대에 이르면 적색농민조합운동이 고조되었으므로 농민들이 사회주의운동의 영향을 받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조선 후기부터 성장하고 있던 농민의 권리가 1910년대 조선토지조사사업으로 봉쇄당하고 식민지하에서 소작농민으로 생활하는 동안 무엇 하나 개선된 것이 없었다. 농촌에는 예사로 점심이 없었다. 조반석죽도 이어가기 힘들었다. 해마다 봄이면 절량농가가 6할을 넘어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었다. 농민은 대한제국이 멸망하던 1910년의 그 초가삼간에서 그 옷을 입고 1945년의 해방을 맞았다. 양복을 입고 기차를 타고 자동차가 집 앞을 지나가도 그것은 하늘의 비행기처럼, 농민과는 관계가 없었다. 혹간 식민지발전론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것은 위의 ④⑤⑥의 중류 생활자 이상의 경우에 해당한다. 1930년의 문맹율이 77%로 2천만 명 인구 가운데 1천 5백만 명을 넘었다.483)≪朝鮮日報≫, 1934년 12월 22일, 社說.

 중류 생활자는 교육을 받은 신지식인이었다. 세끼의 밥을 먹으며 양복을 입고 시계를 차고 궐련을 피우며 개화장(지팡이)을 짚고 인력거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국학운동이나 사상운동을 일으킨 사람을 제외하면 대개 개량주의 성향을 나타내는 사람이 많았다. 개량주의자는 글이나 말끝마다 조선을 쳐들고 민족을 이야기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자기를 비하하는 패배주의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한글을 익혀 민족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은 지키며 살았다. 그래서 기회주의와 이중인격의 소유자로 살았던 사람이 많았다. 자치운동을 변론하는 특성도 이중인격의 자신의 변론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일제 식민통치가 직접통치로 강행되었기 때문에 특히 자치운동은 식민통치의 통로를 넓혀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이것은 인도 같은 간접 식민통치에서 자치운동이 민족운동의 주류를 형성했던 경우와 다른 한국독립운동의 특성이라는 점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중류 생활자라도 학생인 경우는 꿈을 아끼는 학생의 순수성, 신세대의 대변자, 민족지성의 대변자 등의 역사적 위치가 그들을 규제하여 자신의 가정조건에 불구하고 개량주의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이 민족역량을 성장시켰던 것은 물론이다.

 식민지 생활문제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여성문제였다. 이 시기 여성의 지위 변화는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일본의 전통에 영향을 받았던 탓이 컸다. 여자의 재산 상속권이나 호주 상속권이 없어진 것이 식민지 유산인 것이다. 그 대신 출가하면 남편의 성을 따를 수 있는 것을 여성의 권리를 얻었다고 자랑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도 여권 침해로 보아야 한다.484)구한말에 서양의 풍속을 따라 서울여자교육회를 일으켰던 이옥경이 원래의 성인 홍씨를 변성한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식민지하의 여성운동은 여권운동과 독립운동의 이중성격을 가지고 있다.

 끝으로 이야기할 것은 일제 식민통치의 역사를 볼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식민통치가 일본사 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것은 물론이지만, 한국사 발전에도 기여했는가의 문제이다. 흔히 식민지근대화의 여부이다. 인간가치는 저락하고 자주개혁은 후퇴하고 민주주의는 말살되어도 경제는 발달했다는 국부발전론을 제기하는 수가 있다. 식민통치가 아니고 한(조선)민족이 이끈 역사라면 불가능한 경제발전이었던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경제발전은 경제발전 자체를 목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발전을 목표한 것이라는 점을 안다면 국부발전론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하여 독립운동을 통해 근대화가 촉진된 것이 적지 않다. 해방 후 남북한에서 민주공화국이나 인민공화국을 표방한 원천이 어디에 있었던가. 남북에서 실시한 농지(토지)개혁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신분제를 타파하고 남녀평등을 규정한 법률의 연원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민족의 말과 글을 지키며 맞춤법통일안을 만든 것이 누구의 노력으로 이룬 것인가. 모두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의 결실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결실이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학교를 세우고 철도를 부설한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민족동화나 경제수탈을 위한 것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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