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5. 근현대
  • 3) 해방정국과 현대사의 전개
  • (1) 해방과 분단과 혼돈

(1) 해방과 분단과 혼돈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여 해방을 맞았다. 그 해방에 대하여 타율성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연합국의 승리에 따라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광복이라고 말한다. 연합군의 승리는 한국 독립군의 승리이므로 당연히 광복이었는데 그것을 미국과 소련이 가로채어 군정을 강행했다는 것이다. 그 논리라면 광복을 강탈당한 것이다. 그렇게 미국과 소련이 군사 점령했으나 이 땅의 사람들은 그들을 해방군으로 인식하고 38선의 남과 북에 미군과 소련군의 주둔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분담 진주 정도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1948년 8월까지 3년간 군정을 실시하였다.

 해방 조선에 대하여 지리적으로 근접한 소련의 점령을 우려한 미국이 38선 분할 점령을 제안하였고 자치능력을 확인할 때까지 신탁통치안을 제안하였다. 거기서 자치능력이란 것은 한반도가 미국의 영향권이 아닌 소련이나 중국의 세력권에 흡수되지 않고 독립할 능력을 말한다. 그것은 일본 패전과 더불어 소련의 태평양 진출을 염려한 나머지의 우려였다. 신탁통치안은487)신탁통치는 1945년 5월 유엔이 만들어지면서 국제연맹 당시의 위임통치를 개편한 국제관리안이었다. 그러므로 유엔 창설 전에는 신탁통치라는 용어는 없이 국제관리라는 용어만 사용하였다. 미국이 1942년에 구상하여 1943년 카이로회담부터 1945년 포츠담회담에 이르기까지 국제적으로 합의한 전후 한반도에 대한 방침이었다. 그것을 19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구체화시켰다. 내용은 조선에 임시정부를 설립한다. 임시정부가 독립을 준비할 때까지 5년간 미·영·중·소의 4개국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그의 절차를 협의하기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리하여 1946년 5월과 1947년 3월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었으나 무위로 끝나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고 말았다.

 그러한 국제관리안은 해외 독립운동자에게 먼저 전달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에서는 1943년 5월에 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여 전후 국제관리설을 규탄하고 계속하여 외교활동으로 완전 독립을 쟁취하려고 노력했다. 연안의 독립동맹도 국제관리설을 규탄하였다. 국제관리설이 제기된 것을 알지 못한 국내에서는 해방과 더불어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건국준비위원회를 설치하고 9월 6일에는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지방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하였다.488)그에 앞서 9월 3일에는 중경에서 한국임시정부가 환국 후에 과도정부를 수립한다는 ‘당면정책’을 발표하였다. 인민공화국의 수립 발표는 그의 대비책으로 이해하는 주장도 있다. 그해 11월 23일 한국임시정부의 환국을 전후하여 혼탁한 정국 속에 무수한 정당이 탄생하였는데 한국민주당·한국독립당·국민당·조선인민당·조선공산당이 대표적이었다.

 북한에서는 이미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으므로 해방과 더불어 소련의 군정 계획 아래 해방 정국이 전개되었다. 처음에 여러 이름의 건국준비위원회가 지방별로 결성되었는데 11월 19일에 5도행정국, 1946년 2월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1947년 2월에는 전국 선거를 통해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설치되어 사실상의 중앙 통치가 실시되었다. 이것을 군정으로 보면, 남쪽과 달리 간접통치 방식이 실시된 것이다.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소식이 전해지자, 1943년부터 염려하던 신탁통치안만 눈에 잡혀 즉각 전민족의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조선공산당도 반탁노선을 취하였다. 그러한 민족적 분위기를 이용하여 한국임시정부에서는 國字 1·2호로 미군 군정을 폐쇄하고 임시정부가 행정권을 인수한다고 선포하였다. 1946년 1월 1일 ‘김구-하지회담’에서 반탁운동을 허용한다는 조건에서 수습되기는 했지만, 그후 양자의 대립은 풀리지 않았다. 한편 조선공산당은 1946년 1월 3일의 서울운동장 시민대회를 찬탁대회로 전환시키면서 모스크바 3상회의를 지지하고 나서, 정국은 찬탁과 반탁의 논의가 좌우 대립구도로 이행하였다. 2월 14일 이승만·김구·김규식을 영수로 한 우익은 민주의원을, 박헌영·여운형을 영수로 한 좌익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면서 대립구도가 분명하게 부각되었다. 그것이 미소 냉전 기류와 유착하면서 해방정국에서 광복도 해방도 상실한 혼돈을 연출하고 만 것이다. 1946년에 김규식·여운형에 의한 좌우합작위원회가 열려 ‘좌우합작 7원칙’까지 합의하였으나 극우 극좌의 이승만과 박헌영이 거부하여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분단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한반도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어 총선거가 가능한 남한에서 단독 선거가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1948년 8월 15일에 남쪽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이어 9월 9일 북쪽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 분단정부 수립을 저지하려고 김구·김규식이 남북협상을 추진하여 1948년 4월 19일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가 열렸으나 소득을 얻지 못하였다. 당장에 소득은 얻지 못하였으나 그의 통일의지는 역사의 소중한 유산으로 남아 오늘날 남북통일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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