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2. 문학
  • 3) 미의식

3) 미의식

 한국문학의 특질은 우선 시가의 율격에서 잘 나타난다.507)이제부터 펴는 시가 율격에 관한 논의는 조동일,≪한국민요의 전통과 시가율격≫(지식산업사, 1996)에 근거를 둔다. 한국의 시가는 정형시라도 한 음보를 이루는 음절수가 변할 수 있고, 음보 형성에 모음의 고저·장단·강약 같은 것들이 고려되지 않으며, 韻은 발달되어 있지 않다. 고저를 갖춘 한시, 장단을 갖춘 희랍어나 라틴어시, 강약을 갖춘 영어나 독일시에 비하면 단조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그런 요건을 갖추지 않은 단순 율격을 사용하는 다른 나라 프랑스나 일본의 시와는 달리, 음절수가 가변적이기 때문에 변화의 여유를 누린다.

 대표적인 정형시 시조를 보면, 네 음보 또는 토막씩 세 줄로 이루어져 있고, 마지막 줄 첫 토막은 예사 토막보다 짧고, 둘째 토막은 예사 토막보다 길어야 한다는 규칙만 있다. 각 토막이 몇 음절로 이루어지는가는 작품에 따라 달라, 작품마다 특이한 율격을 갖출 수 있는 진폭이 인정된다. 다른 여러 시형에서도 공통된 규칙은 최소한으로 한정하고, 변이의 영역을 보장하며, 그 범위를 확대해서 자유시에 근접하는 시형이 일찍부터 다양하게 나타났다. 시조에서 요구하는 그 정도의 제약을 불편하게 여겨, 한 줄을 이루는 토막 수가 정해져 있지 않은 사설시조를 만들어냈다. 판소리에서는 작품 전체에 일관된 율격이 없고, 여러 가지 율격과 그 변이형들을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활용했다.

 율격이 규칙에 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변형을 갖추도록 하는 것은 그래야 멋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멋은 변형을 선호하는 미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직선으로 뻗기만 했거나 규칙적으로 모가 난 도형은 좋아하지 않고, 천연스럽게 휘어지고 자연스럽게 이지러진 곡선이라야 멋이 있다고 한다. 멋은 미술의 선이나 음악의 가락에서 선명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문학 표현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멋과는 거리가 멀 듯한 한문학에서도, 격식이나 꾸밈새를 나무라고, 천진스러운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고 했다.

 작품을 전개하면서 애써 다듬어 기교를 자랑하는 풍조를 멀리하고, 일상생활에서 하는 자연스러운 말을 그대로 살리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다. 유식한 문구를 상스러운 수작과 함께 쓰면서, 겉 다르고 속 다른 복합구조를 만들어 풍자의 효과를 높이는 것이 최상의 표현방법이다. 문학의 가치를 평가하는 서열의 상하 양극단에 해당하는 최고 지식인의 소설과 하층의 탈춤에 그런 특징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일이다.

 문학하는 행위를 놀이로 여기고,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이 누구나 같은 자격으로 어울려 함께 춤추는 마당놀이에 회귀하고자 하는 의지가 뚜렷하다. 그래서 하층 민중의 탈춤을 재평가하려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상 혁신의 주역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크게 깨달은 바를 널리 알려 깊은 감명을 주려고 했다. 元曉는 광대 스승에게서 배운 바가지 춤을 추고 사방 돌아다니면서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들을 일깨웠다. 李滉은 곡조에 맞추어 부르고 춤을 추면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노래를 짓는다고 했다. 崔濟愚는 새로운 사상으로 세상을 변혁하기 위해서 칼을 들고 춤추면서 칼 노래를 지어 불렀다.

 흥겨운 놀이면서 심각한 고민을 나타내는 문학의 양면성을 하나가 되게 합치는 것을 바람직한 창조로 여겨 왔다. 심각한 고민에 근거를 둔 정서를 ‘한’이라고 일컫고, 한국문학이 특징으로 드는 견해는 ‘신명’ 나는 놀이를 즐기는 다른 일면을 무시한 편향성이 있다. 신명은 감흥이 고조된 상태이다. 문학이나 예술을 하면서 한도 풀고 신명도 푼다. 한에 신명이 섞이기도 하고, 신명에 한이 끼어 들어 구별하기 어렵다. 예술 창작 행위가 최고 경지에 이르면, 한이 신명이고 신명이 한이어서, 둘이 하나로 합쳐진다.

 한을 신명으로 풀면 심각한 시련이나 고난을 넘어선다. 그렇게 해서 비극이 부정된다. 한국 전통극에 비극이 없고 희극만 있다. 연극의 영역을 넘어서더라도 비극적인 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며, 웃음을 통해서 깊은 진실을 깨닫는 데 이르려 한다. 깨달음의 높은 경지에 오른 고승들이 우스꽝스러운 거동을 하면서 숭고한 교리에 대한 헛된 집착을 타파하는 본보기를 보였다는 설화가 흔히 있다. 기발한 착상으로 논리를 넘어서는 禪詩를 불교문학의 가장 소중한 영역으로 여기는 것도 같은 원리에 근거를 둔다. 박지원은 자기는 글로 장난을 한다면서 사상 혁신의 최고 성과를 나타냈다. 蔡萬植이나 金裕貞이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었듯이, 근대문학에서도 사회의식이 고조된 작품은 웃음의 효과를 활용하는 데 더욱 적극성을 띠었다.

 한국의 서사문학 작품이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것도 이와 함께 고찰한 수 있는 특징이다.508)행복한 결말과 관련된 한국문학의 특질에 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있다.
서대석,<고전소설의 행복된 결말과 한국인의 의식>(≪관악어문연구≫3,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회, 1979).
김병국,<한국 고전문학과 행복한 세계관>(≪현상과 인식≫7-1, 한국인문사회과학원, 1983).
고대의 건국신화에서 마련된 ‘영웅의 일생’에서 영웅은 모든 고난을 투쟁으로 극복하고 승리자가 되는 것을 공식화된 결말로 삼았으며, 승리를 이룩하면 천상의 축복을 받을 따름이고, 지상과 천상, 사람과 신 사이의 대결이 다시 문제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뚜렷하게 드러난 일원론에 근거를 둔 현실주의가 계승되어, 소설의 주인공 또한 행복을 이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 점은 서로 상반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행복된 결말이 예정되어 있어 작품 전개가 안이해지기도 하고, 비극을 넘어서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므로 투지가 더욱 고조되기도 한다.

<趙東一>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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