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3. 종교와 사상
  • 5) 한국 종교사의 전개
  • (4) 조선시대

(4) 조선시대

 조선왕조는 유교, 특히 성리학을 지도이념으로 표방하면서 성립되었다. 따라서 유교의 일차적 목표는 유교에 입각한 국가체제의 정비와 비유교적 요소의 청산이었다. 전자를 대표하는 것이≪國朝五禮儀≫와≪經國大典≫이라면, 후자를 대표하는 것이 鄭道傳(?∼1390)이 불교의 이론을 비판한≪佛氏雜辨≫이다.

 나아가 16세기 사림세력이 부상하면서 유교는 새로운 전개를 보인다. 체제 정비에서 이론적·학문적 연구로 중심이 옮겨진다. 李滉(1501∼1570)과 李珥(1536∼1584)를 비롯한 탁월한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었고, 인간의 心性 등에 관한 학문적 논쟁이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성리학의 정통을 자처하는 학파들이 성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질서 회복을 위한 실천적 방도로서 禮學의 연구가 활성화되었다. 특히 예학의 연구는 성리학적 질서나 가치관이 민간에까지 보편화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조선왕조의 성리학은 우주론 보다 심성론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독자성이 있으며, 성리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론에 치우친 나머지 형식성과 교조적 배타성만 키워나갔고, 그 결과 현실과는 자꾸 멀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는 임진왜란·병자호란 같은 국가적 위기를 겪으면서 더욱더 문제가 되어갔다.

 이에 따라 유교 전통 내에서 자체 반성이 일어났다. 실학이 그것으로, 실학은 현실적 문제의 역사와 현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실학의 전통은 후일 개화사상으로 이어졌다.

 한편 조선왕조에서 불교는 정책적으로 탄압의 대상이었다. 이에 따라 불교의 과제는 교·선의 융합이 아니라, 지배사상인 유교와의 조화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유교에 대한 소극적 자기 변명에 그치고 말았다. 따라서 불교는 성리학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 즉 祈福的 부분이나 사후 세계의 문제에 파고들어 자신의 생존을 도모했다. 조선 후기가 되면서 사찰 내 山神閣 건립,534)金炯佑,≪韓國寺刹의 山神信仰≫(국립문화재연구소, 1996), 17∼24쪽. 망자의 구원을 위한 甘露幀의 제작 유행이 이루어지는 것은535)姜友邦,<甘露幀의 樣式變遷과 圖像解釋>(≪甘露幀≫, 예경, 1995), 342∼343쪽.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또 도교는 조선왕조로 오면서 의례를 통해 除災招福하려는 科儀道敎에서 엄격한 자기 수련을 통해 신선이 되고자 하는 修練道敎로 변화한다. 그러나 수련도교는 개인의 완성을 추구하는 것일 뿐,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

 민속종교의 경우,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향촌사회를 결속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리학적 질서가 향촌사회까지 확산되면서 지역사회 통합 기능을 상실하고(예컨대 洞祭가 儒敎式으로 바뀜), 개인의 길흉화복 조절용으로 의미가 한정되었다.

 이렇듯 체제교학으로서 성리학의 한계가 露呈되고, 다른 종교전통들의 사회적 의미와 기능이 퇴색해 가는 가운데, 18세기에 西學이란 이름으로 천주교가 전래된다. 천주교의 전래는 조선왕조에게 있어 커다란 충격이었다. 多神信仰에 익숙한 상황에서 유일신을 강조한 것도 그렇지만,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두 개의 축인 신분질서와 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했다. 더구나 천주교는 종교에 그치지 않고, 그 배후에 제국주의 열강이 버티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유지되는 한, 타협이란 불가능했다. 이에 조선왕조는 가혹한 탄압으로 천주교에 맞섰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성리학의 강화를 통해 체제를 수호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니, 위정척사 사상이 그것이다.

 천주교의 전래는 기층사회에도 충격을 주었다.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는 민중 계층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조선조의 멸망과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예견하는≪정감록≫과 같은 비결사상이 민간에 널리 유포되게 되었다. 그런데 천주교의 전래는 위기의식을 더욱 고조시켰다. 1860년 동학을 효시로 민족종교들이 나타나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편 한말에는 개신교가 유입되어 활발하게 선교운동을 전개했다. 개신교는 전도사업의 일환으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병행했다. 그 결과 비교적 단기간에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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