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4. 과학기술 -한국 과학기술사의 시기별 특징-
  • 2) 근대과학시대
  • (1) 근대 과학기술의 수준-실학 시기

(1) 근대 과학기술의 수준-실학 시기

 이 시기 세계사의 최대 과제는 17세기 전후 서양에서 이미 시작되고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던 ‘과학혁명’·‘산업혁명’을 따라가는 일이었다. 한국은 중국에 비해서는 압도적으로 불리한 환경에 있었고, 일본에 비하자면 비교도 할 수 없는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는 대로 17세기 이후 19세기까지의 3세기를 살았다. 결국 중국보다 늦을 수밖에 없었고, 일본에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우선 지리적 조건 때문에도 서양 진출의 과정에서 조선은 거의 서양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 조선인 스스로 그럴 필요성을 깨달을 형편도 아니었다. 일본과 중국에는 선교사들이 열심히 들어와 활약하기 시작한 것이 16세기부터의 일이다. 원래 서양 사람들이 동아시아로 진출하게 된 것은 그들에게 그럴 수 있는 기술적 수단, 즉 항해술과 그와 함께 선박 기술, 그리고 무기 기술 등이 주어진 다음부터의 일이었다. 육로로보다는 바다를 통해 인도 등에서 얻을 수 있는 향신료 등을 쉽게 얻을 수 있음을 알게된 서양 사람들은 16세기부터 적극적으로 바다 길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지중해 도시국가들 보다는 당연히 대서양 국가 가운데에도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나갈 수 있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그 앞장을 서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소위 ‘지구상의 대 발견’은 포르투갈 항해가들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에 이르게 했고, 스페인 항해가들은 이탈리아의 컬럼부스의 지휘 아래 1492년 대서양을 횡단하여 아메리카에 이르게 했다. 이렇게 바다 길을 개척해 가기 시작한 서양인들은 다투어 동으로 동으로 진출했고, 1500년대 초에는 이미 포르투갈인들이 중국 남부에 도착하고 이어 1543년에는 일본에도 표류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에는 전혀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따금 장사할 계기가 있을까하여 조선의 해안을 기웃거린 서양 장사꾼들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 아무도 적극적으로 진출하려 시도한 일이 없다. 이 점에서 중국이나 일본과는 전혀 달랐다. 결국 중국에는 1500년대 초부터 이미 서양인들이 자리잡고 활동하기 시작했고, 조금 뒤인 1543년 처음으로 일본 서남쪽 카고시마(鹿兒島)에 표류해 온 포르투갈 선박을 시작으로 일본에 도달한 서양인들은 그후 일본과도 지속적 접촉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과는 그런 지속적 접촉이 시작된 일이 없다. 단편적인 서양인 출입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1653년 표류해 왔다가 1666년 탈출한 하멜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힐 수 있을 정도다.

 이런 극히 제한된 상황 속에서 서양을 배우는 노력이 일부 학자들 사이에 일어나 몇몇 실학자들 가운데에는 중국에서 발행된 책을 통해 서양 과학기술의 진수를 대강 짐작해 국내에 소개한 사람들도 생겨났다. 李瀷의≪星湖僿說≫에도 약간의 서양 과학 내용이 담겨 있으며, 洪大容은 서양 천문학 지식을 받아들여 그 위에 지구의 자전을 추가하여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후에도 이런 경향은 지속되어 대표적 실학자 丁若鏞 역시 상당한 정도의 서양과학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이런 경향의 고조된 모습으로는 단연 19세기 중반에 활약한 崔漢綺를 들어야 할 것이다.

 이 시기의 한국과학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역시 서구과학기술 수용에서 직접적인 접촉이 전혀 없었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서양 선교사와 상인들이 직접 들어와 활약하던 동남아 나라들이나 중국·일본과는 아주 달리 조선에는 서양의 직접적 영향이 전혀 미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익에서 최한기까지 개국 이전의 한국과학사는 간접적이고 극히 부분적인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서양의 선교사와 상인이 바로 조선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그들의 주요 관심사가 중국이었고, 지리상으로 조선은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은 다른 두 나라와 달리 해외에 교포의 진출이 거의 없었다는 점도 17세기 이후 서양 문명과의 접촉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특히 통일신라 때 많은 신라인이 중국에 진출하여 신라 거류지가 생겼음은 알려져 있지만, 그후 그와 비숫한 한국인의 해외진출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하면 중국인은 수많은 사람들이 동남아 각 지역에 뻗어나가 살고 있었고, 일본인 역시 상당수가 동남아와 필리핀에 퍼져 있었다. 또 17세기에서 18세기 동안 동아시아 바다에서 해상활동을 하고 해적질하는 사람들 역시 중국인과 일본인들이었다.

 이들을 통해 서양 사람들은 그들이 직접 중국이나 일본에 오기 전부터 일본과 중국에 대해 소상한 정보를 얻고 있었고, 일단 그들이 직접 중국과 일본에 도착할 때에는 대개 동남아에 거주하는 중국인이나 일본인 교포가 통역 노릇을 해 주었다. 그러나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서양 배들이 표류해 왔을 경우 조선에서는 그들 서양인들과 통화조차 할 수가 전혀 없었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조선에 처음 도달하는 서양 사람들은 중국어 통역을 데리고 와서 조선인 중국어 통역과 대화하게 하여 의사를 소통하고 있었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단절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이런 상태는 조선의 서양 문명에 대한 인지도를 극히 낮은 상태에 머물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극히 일부의 실학자들이 중국을 통해 알려진 서양 과학과 서양 문물의 내용에 조금씩 익숙해지고는 있었으나 그 정도가 아주 낮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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