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4. 과학기술 -한국 과학기술사의 시기별 특징-
  • 2) 근대과학시대
  • (2) 근대과학기술의 수용-개화기

(2) 근대과학기술의 수용-개화기

 1876년의 개국과 함께 조선의 서양 과학기술 배우기는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자체적인 필요성을 성숙시킨 가운데 자력으로 개국했다기 보다는 중국과 일본의 간섭 속에서 등 떠밀리기로 나라 문을 열 수밖에 없었던 19세기 후반의 조선에는 아직 개국과 함께 서양으로부터 과학기술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하겠다는 각오를 가진 인사들이 거의 없었다. 그런 정신 자세가 훈련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지도층 인사들은 1876년 일본에 처음 문을 열 때까지도 여전히 쇄국을 통한 전통 수호를 고집했다.

 주변 정황을 어쩔 수 없어 1876년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어 개국을 시작은 했지만, 아직 서양을 받아들일 자세는 전혀 아니었다. 일본과의 수교는 보기 따라서는 단지 한참 동안 중단되었던 관계를 수복한 것 뿐이라고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를 통해 몇십 년에 한 번 꼴로 朝鮮通信使가 일본에 파견되었고, 초량에는 倭館이라는 일본 대마도의 무역본부가 설치되어 있어서 일본인들의 왕래가 그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12차례 파견되었고, 1811년의 마지막 통신사 이전의 경우에는 일본인들로부터 대단히 융숭한 대접도 받고 또 실제로 적지 않은 문화적 영향을 일본에 주었으며, 조선도 이런 교류를 통해 상당한 정보와 실리를 취한 것이 사실이다. 결국 개국 후 몇 차례 일본에 보낸 수신사들의 귀국 보고와 중국 실력자 李鴻章의 후원 등에 힘입어 1882년 처음으로 서양의 대표 국가인 미국과의 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이 조약을 시작으로 서양 나라들과의 관계가 맺어지기 시작했고, 당연히 서양으로부터 과학기술과 문물제도를 배워야겠다는 의식도 성큼 자라게 되었다.

 그러나 이웃 나라 일본과 중국에는 이미 몇 백년 동안 많은 서양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많은 서양인들이 그 땅에 머물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개국 이전의 조선에는 서양인이 자리잡고 활동한 일이 거의 없었다. 몇몇 가톨릭 신부들이 몰래 들어와 활약했지만, 종교 이외에 큰 영향을 주었다기는 어렵다. 게다가 아직 서양 과학기술을 직접 서양에서 배워야겠다는 열성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자연히 1880년대 시작된 서양 배우기는 이미 많은 西洋化를 이룩하고 있다고 여겨졌던 일본과 중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시도될 수밖에 없었다.

 1881년 중국 天津에 보낸 領選使行이나 이어 일본에 파견되었던 紳士遊覽團 등의 노력은 그런대로 초기의 조직적인 서양 배우기였지만, 서양에 직접 대표단을 파견해 서양을 배우려 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 보낸 간접적 노력이었다. 그리고 그에 이어서는 최초의 근대적 신문으로 알려진≪漢城旬報≫가 1883년 처음으로 발행되면서 그 기사 거의 전부를 서양 과학기술 문명을 소개하는 데 할애했다. 서양 문명의 국내 소개에 글을 통해 힘을 쏟기 시작한 것이었다.

 늦게나마 일부 열심히 과학 배우기가 시작되었던 셈이다. 하지만≪한성순보≫에서 시작하여≪독립신문≫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서양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너무나 주위 여건이 나빴다. 열강의 각축 장소가 바로 한반도였고, 조선인들이 스스로 깨달아 과학기술의 근대화를 이룩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돈도 시간도 너무나 부족한 가운데, 조선인의 근대과학기술과 서양 문명 배우기는 모두 간접적으로 일본이나 중국을 통하려는 태도에 머물고 말았다. 이미 당시 일본과 중국은 많은 유학생을 서양 각국에 보내 과학기술이나 그 밖의 사회 제도를 익혀가고 있었다. 이미 중국과 일본에는 수많은 서양 유학생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 활동한 1880년대까지 조선에는 서양에 유학가서 근대과학기술을 습득하고 돌아온 조선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서양은 그만두고 중국이나 일본에 가서 공부하고 귀국한 조선의 유학생도 아주 수가 적었고, 그나마 대개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고 중도에 귀국한 경우가 전부였다. 1880년대 초에는 중국과 일본에 유학한 조선 청소년들이 생겼으나, 이들은 대개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고 말았다. 예를 들면 1882년 여름의 임오군란 발생은 그 대표적인 핑계로 작용했는데, 이를 계기로 중국 천진에 파견되었던 조선의 영선사 기술 유학생 대부분이 철수하고 말았다. 또 1884년 말의 갑신정변은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던 청소년들을 거의 다 귀국시켜 여기 가담하게 했고,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갑신정변의 실패와 함께 희생당하고 말았다.

 서양에 유학하여 직접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워 온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에 가서 간접적으로 이를 익혀 온 인재도 한 명도 없는 채 조선왕조는 19세기를 마감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국내에 교육을 충실히 할 수 있게 외국으로부터 자격 있는 과학기술 교육자를 초빙해서 국내의 청소년을 교육시키는 여유조차 전혀 없었다. 1880년대 이후 근대적 학교는 계속 문을 열었지만, 과학기술 교육에는 더구나 효과가 없었다.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기까지 겨우 이 땅에서 이룩된 과학이라면 초등교육 수준의 과학 지식이 조금씩 대중화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뿐이다. 애국계몽운동의 핵심에 때로는 과학기술을 말하는 수도 있었지만, 그 운동에 참가한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들의 과학 수준이 바로 초등학교 이하에 머물 따름이었다.

 이런 낮은 수준의 과학기술에서 도약할 수 없었던 조건은 1900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겨우 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인물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많지도 않은 이들의 진로 역시 조국의 과학기술 수준 향상에 이바지하기 어려운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면 한국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자는 邊燧(1861∼1891)였다. 그는 미국 매릴랜드 농과대학을 졸업했으나, 졸업과 함께 귀국하지 못하고 모교에서 일감을 얻어 근무하다가 졸업 후 넉 달만에 캠퍼스역에서 지나가는 기차에 치여 사망했다. 갑신정변에 가담했던 개화파 한 사람으로서 당시 그는 귀국할 형편이 못되었다. 여기 비하면 한국 최초의 여자 미국 대학 졸업생인 박에스터(金點童, 1877∼1910)는 1900년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다음 즉시 귀국하여 최초의 서양 교육을 받은 여의사로 활약했다. 그러나 귀국 후 환자 진료 등에 골몰한 그녀는 10년만에 폐결핵으로 33살의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남자로서 미국에서 최초의 의학 교육을 받은 徐載弼(1866∼1951)의 경우는 약간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1893년 컬럼비아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최초의 서양의대 졸업생이 된 그는 역시 갑신정변에 가담했던 핵심 개화파로서 귀국할 수 없는 채 미국 여성과 결혼하고 미국 이름(Philip Jaisohn)을 가지고 살다가 1895년말 정치적 환경이 호전되자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 자격으로 머물며≪독립신문≫을 창간 운영하고 독립협회를 주도했다. 요컨대 최초의 서양의학 전공자였던 서재필은 의사로서 할동하지도 않았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한국인 최초의 과학자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지만, 과학자로서 활동하지도 않았다. 그가 쓴 것이 분명한≪독립신문≫의 글들에서도 별로 과학에 관한 내용은 찾을 수 없다.

 서재필이 의학도도 과학자도 아닌 사회개혁을 위한 계몽운동가로 맹활약하고 있었던 19세기말의 상황은 바로 당시 조선왕국의 지식층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웅변해 준다. 비슷한 경우는 일본에서 최초의 대학 졸업자로 교육받은 尙灝(1879∼?)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1906년 최초로 일본 東京대학 공과대 조선과를 졸업한 최초의 한국 기술자 상호는 바로 귀국하여 농상공부 고위 관직에 취임하여 몇 가지 기술직을 전담했던 것으로 밝혀져 있으나, 바로 나라가 망하자 그의 그후 소식은 아직 연구도 되어있지 않다.

 과학기술을 공부한 개화기 선구자들은 국내에서는 있을 수도 없었고, 외국에서 몇 명이 겨우 나오기 시작했으나 그들은 귀국할 수 없었거나, 귀국하더라도 과학기술에 종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결핵으로 숨지거나, 교통사고까지 일어나 젊은 목숨을 잃어 가는 경우도 있었다. 상호 같은 경우는 그런대로 귀국하여 기술관료로 활약했던 셈이지만, 역시 조선의 뒤진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일에는 종사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결국 과학기술의 발달은 사회의 상당한 안정을 먼저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개화기의 조선조는 전혀 안정된 상태에 들어가지 못한 채 동요 속에 몇 십년을 보내다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것이다.

 때마침 민족주의의 시대를 맞아 조선의 지식층은 새롭게 눈뜬 민족의식과 그에 따른 독립정신 등으로 고뇌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한가롭게 과학기술의 연구와 발전에 몸바치겠다는 각오를 하기가 어려웠다. 모두가 민족을 구하고 나라를 되세우는 일이 더 급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은 부차적인 요소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수학자였던 독립운동가 李相卨(1871∼1917)의 경우가 이를 잘 보여준다. 조선 말기 독립운동가로 그 이름을 널리 날리고 있는 이상설은 1907년 고종의 密旨를 받고, 네덜란드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李儁·李瑋鍾과 함께 참석,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여 전세계에 알리려했던 유명한 사건의 주인공이다. 그후 북간도, 블라디보스톡, 그리고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그는 원래는 수학자로 출발했던 인물이다. 육영공원에서 미국인 헐버트와 교류하면서 영어·프랑스어를 배운 그는 고종 31년(1894) 식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 교수 겸 관장에서 학부협판, 또 한성사범학교 교관 등 여러 관직을 지내기도 했다. 이상설은 광무 4년(1900)에≪算術新書≫를 출간했는데, 이 책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본문은 국한문 혼용으로 세로쓰기를 지키고 있지만, 수식은 가로쓰기로 바꾸고 있다. 당시 학부에서 그에게 맡겨 일본 수학자 우에노 기요시(上野淸, 1854∼1924)의≪近世算術≫을 번역한 것이었다.

 망국을 앞에 둔 조선의 지식층에게 당장 급한 것은 민족과 독립이었지, 과학은 아니었던 것이다. 1900년 전후에 몇 안 되는 젊은이들이 과학기술에 눈뜨고 훈련받기 시작했지만, 민족의 존망을 앞에 둔 위기의식 속에서 그들은 과학기술 안에 머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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