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5. 미술
  • 5) 조선시대 미술의 특성

5) 조선시대 미술의 특성

 조선왕조시대는 현대를 사는 우리와 시대적으로 가장 가깝고 또 미술 작품도 제일 많이 남아 있어서 어느 시대 보다도 중요시된다. 이 시대의 미술은 억불숭유정책의 영향 하에 형성된 유교적(혹은 성리학적) 미의식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전대인 고려시대에는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불교를 토대로 한 푸른색의 청자가 시종 지배적이었던 데 반하여 조선시대에는 깔끔한 흰 색의 백자가 도가기의 주류를 이루었던 점도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비단 도자기의 색깔만이 아니라 유교의 영향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화려함은 피하고 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긴 점, 과장과 장식성을 피하고 자연스러움을 존중한 점, 불교회화와 단청과 민화 등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요란하거나 짙은 원색을 피했던 점 등이 모두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회화 분야에서 濃彩畫가 아닌 수묵화가 시종하여 대종을 이루었던 사실,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인공을 최소화한 造苑예술, 재료가 지닌 木理나 문양을 앞세우고 장식을 최소화한 목공예, 구불구불한 목재조차도 선용한 목조건축 등은 그 구체적인 예들이다.

 유교 이외에도 산수화가 가장 발달했던 사실에서 보듯이 도교의 영향과 불교미술이 입증하듯이 불교의 영향도 조선왕조시대의 미술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었음이 사실이나 역시 유교의 영향이 가장 컸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조선시대의 미술에서 흔히 간취되는 節制의 미도 유교미학과 합치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상 언급한 것들을 모두 유교(혹은 성리학)만의 영향으로 단정하는 것은 부적절할 수도 있다. 그것 이외에도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던 미의식이나 기호가 그에 못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볼 여지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전대인 고려시대의 미술과 연관시켜서 생각해 보면 역시 유교의 영향이 조선시대 미술의 특성을 형성하는데 제일 큰 역할을 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유교적 영향보다도 우리 민족의 성향과 보다 연관이 깊다고 생각되는 특성들도 적지 않다. ‘開闊性’을 중시하는 확대지향적인 공간개념,587)확대지향적인 공간개념에 관해서는 安輝濬,≪韓國繪畫의 傳統≫, 81∼84쪽 참조. 즉흥성과 대범성, 익살과 해학 등이 그 대표적 예들이다.

 확트인 공간을 지향하는 개활성은 조선 초기 안견의 작품으로 전칭되는<四時八景圖>나 필자미상의<瀟湘八景圖>를 비롯한 안견파의 산수화들과 조선 후기의 청화백자에 그려진 소상8경도 계통의 산수문 등에서 전형적으로 엿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자미상의<소상8경도>중에서 ‘遠浦歸帆’을 일례로 보면 원경이, 망망대해에 작은 배 3척만이 떠 있을 뿐 전혀 막힘이 없이 무한히 확 트여 있어서 감상자의 속을 시원하게 해 준다.588)安輝濬·李炳漢,≪安堅과 夢遊桃源圖≫(圖書出版 藝耕, 1993), 14쪽, 圖 18(左下) 참조. 이러한 경향은 다소를 막론하고 안견파 산수화들에서 일관되게 엿보인다.

 이와 같은 확대 지향적인 공간개념, 즉 개활성에 대한 관심은 18세기의 청화백자들의 산수 문양에서도 간취된다. 호암미술관 소장의 떡매병과 청화백자산수인물문 4각연적이나 호림박물관 소장의 청화백자산수문 4각병은 그 전형적인 예들이다. 떡매병의 경우에는 그릇의 표면 전체를 화면으로 삼아 소상8경도의 하나인 洞庭秋月이라고 믿어지는 산수문양을 그려 넣어서 무한의 공간을 시사하고 있다.589)鄭良謨,≪朝鮮陶磁 白磁篇≫, 韓國의 美 2(中央日報, 1978), 圖 75 참조. 4각연적에서는 4면의 가장자리를 선으로 구획하고 각 면에는 최소한의 산수나 인물을 표현하고 나머지는 무한히 트여 있는 공간을 나타내었다.590)≪湖巖美術館名品圖錄≫Ⅰ(三星文化財團, 1996), 圖 150 참조. 이러한 공간 묘사는 호림박물관의 4각병에서도 대동소이하게 나타난다.591)≪湖林博物館 名品選集≫Ⅰ(成保文化財團, 1999), 圖 164 참조. 비슷한 예의 도자기들은 이밖에도 많이 있다.592)방병선,≪조선후기 백자 연구≫(일지사, 2000), 圖 105·107·108·110 참조.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산수화는 물론 도자기 문양에까지 확대지향적인 공간개념을 중요하게 다루었던 것이다. 그런데 개활성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무용총의 수렵도나 고려시대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 정병의 산수문양 등을 통하여 보면,593)秦弘燮,≪工藝≫, 國寶 5, 圖 104 참조. 조선시대에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삼국시대에 자리를 잡았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더욱 발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만약 이를 긍정한다면 개활성에 대한 관심은 우리 민족의 기호나 미의식 중에서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할 지극히 중요한 특성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현대의 우리에게 있어서도 무엇보다도 강하게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즉흥성과 대범성도 조선시대의 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성의 하나이다. 즉흥성과 대범성을 제일 잘 드러내는 대표적 예로는 귀얄문 粉靑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호암미술관 소장의 분청사기 귀얄문 扁甁은 가장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594)≪湖巖美術館名品圖錄≫Ⅰ, 圖 106 참조. 넓은 귀얄을 백토물에 듬뿍 담구었다가 꺼내서 편병의 표면에 종횡으로 거침없이 솔질하여 시문하였는데 자유분방한 귀얄자국이 역력하다. 16세기의 이 편병처럼 이렇게 즉흥적이고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백토 분장은 조선시대를 빼놓고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성이다. 오직 조선시대의 미술에서만 유사한 예들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익살과 해학 역시 조선시대의 미술에서 종종 엿보이는 특성이다. 김홍도와 김득신·신윤복 등의 조선 후기 풍속화에서 특히 짙게 나타나지만 조선 중기의 이경윤 전칭 작품인<濯足圖>등의 작품들에서도 익살스러움이 엿보이는 점으로 보면 그 연원은 뿌리가 깊을 것으로 여겨진다.595)권영필,<해학, 한국미술의 미적 가치>(≪미적 상상력과 미술사학≫, 문예출판사, 2000), 240∼252쪽.
趙要翰,<한국인의 해학미>(≪韓國美의 照明≫, 열화당, 1999), 153∼194쪽 참조.
김홍도의 풍속화 중에서 한 점만을 예로 들자면<벼타작>을 꼽을 수 있겠다.596)安輝濬,≪風俗畫≫, 韓國의 美 19(中央日報社, 1987), 圖 97. 타작하는 농부들과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監農人을 X자 구도로 구성하여 표현했는데 활기에 넘치는 농부들 못지 않게 우편 상단에 있는 감농인의 모습이 보는 이에게 웃음을 자아낸다. 다리를 꼬은채 장죽을 물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감농인의 모습을 보면 갓을 뒤로 재켜 쓰고 있어서 건달끼가 완연하다. 힘들여 일하고 있는 농부들과 달리 이처럼 가장 편하고 여유로운 자세와 건달끼가 넘치는 표정으로 누워 있는 감농인의 모습은 익살과 해학 그 자체라 하겠다. 이러한 익살과 해학은 김홍도의 다른 작품들은 물론 그의 영향을 받은 김득신과 신윤복 등 후대 풍속화가들의 그림들에서도 다소간을 막론하고 흔히 엿보인다. 이상 대강 살펴보았듯이 조선시대의 미술에서는 그 이전의 미술에서 보다도 훨씬 다양하고 색다른 특성들을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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