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6. 음악
  • 2) 한국음악사의 전개양상
  • (2) 중세음악사의 큰 흐름

(2) 중세음악사의 큰 흐름

 고대 후기의 당악은 12세기 고려조정에 소개된 송나라의 敎坊樂으로 인하여 중세라는 새로운 시대의 지평을 여는 갈래의 음악이 되었다. 중세음악사에서 송의 교방악을 포함한 고려의 당악이 大樂署와 管絃房 같은 왕립음악기관 소속 左坊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따라서 좌방의 당악이 右坊의 향악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한 시기가 고려시대였다. 이렇게 당악이 왕립음악기관 소속 좌방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송나라에서 고려조정에 파견한 敎坊樂師의 공로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렇듯 고려의 당악은 향악과 더불어 중세 전기 음악사의 전개과정에서 대세를 형성한 갈래가 되었다. 그러므로 중세 전기음악사의 주류는 당악과 향악이 담당하였다. 중세 전기의 당악과 향악이 공연예술사의 발전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음은 宮中呈才에서도 발견된다.

 고려조정에 소개된 송나라의 교방악 중에서 大曲에 드는 抛毬樂·五羊仙·獻仙桃·壽延長·蓮花臺와 같은 唐樂呈才는 舞鼓·動動·無㝵를 포함한 鄕樂呈才의 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세 전기 고려의 당악정재와 향악정재가 중세 후기의 조선 전기 향악정재와 당악정재의 창제 때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중세 전기의 당악은 송나라에서 파견됐던 교방악사들에 의해서 왕립음악기관의 좌방 자리를 굳건히 차지할 수 있었는데, 충렬왕(1274∼1308) 때 金呂英과 충숙왕(1313∼1339) 때 金得雨가 교방악사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렇게 김여영·김득우와 같은 송의 교방악사들이 중세 전기의 당악을 향악과 당당히 맞설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송나라의 멸망 이후 고려의 당악이 중세 후기의 조선왕조에 이르러 하향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2세기 고려조정에 소개된 大晟雅樂은 고려 귀족사회의 중요한 음악수용층으로 등장하는 신흥사대부 출신의 유신들에 의해서 중세 후기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됐는데, 그 갈래는 중세 후기의 조선 전기 雅樂의 뿌리였다. 유가의 예악사상을 정치이념으로 건국한 조선왕조에서 아악이 세종조(1418∼1450)에 정비됨으로 인하여 왕립음악기관에서 좌방의 위치를 차지하였고, 그 결과 좌방의 아악은 우방의 향악·당악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렇게 아악·향악·당악이 중세음악사의 대세를 형성하였다.

 중세 후기의 조선 초기에 이르러 당악의 鄕樂化가 가속화됨으로 인하여 세 갈래의 궁중음악은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는데, 당악의 향악화는 선초≪악학궤범≫(1493)에 전하는 唐樂器에서 발견된다. 즉 15세기 당악기 중에서 月琴·奚琴은 향악연주에만 사용되었고, 拍·敎坊鼓·장고·당비파·牙箏·太平簫는 향악연주와 당악연주에서 모두 사용됐음이 당악의 향악화를 입증해주는 결정적인 사례이다. 당악의 향악화가 조선 전기에 가속화된 이유는 첫째로 송나라의 멸망 이후 교방악사의 파견이 조선왕조에서는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로 당악이 掌樂院의 우방에 향악과 더불어 소속되었기 때문이다.

 음악의 갈래 이외에도 井間譜의 창안을 포함한 새 記譜法의 등장이 중세 후기를 중세 전기와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꼽힐 수 있다. 새 기보법들이 중세 전기의 음악을 후대에 전해줄 수 없었던 것을 비로소 가능하게 만들었으므로, 새 기보법의 등장은 중세음악사의 획기적 사건이자, 중세 전기와 중세 후기를 가르는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꼽힐 수 있는 근거이다.

 세종조(1418∼1450)에 창안된 정간보는 기존의 기보법에 표시할 수 없는 音價(time value)를 표시할 수 있는 有量記譜法(mensural notation)이다. 세조조(1455∼1468)에 창안된 五音略譜와 및 성종조(1469∼1494)에 창안된 合字譜와 같은 새 기보법들은 정간보와 함께 고려 향악과 조선 초기 新樂의 실체를 후대에 남기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세종조에 창제된 鳳來儀·發祥·定大業·保太平 등과 같은 새로운 악곡들 및 靑山別曲·西京別曲·滿殿春 등과 같은 고려 향악곡들이 새 기보법에 의해서 후대에 전승될 수 있었다. 이렇게 중세 후기에 창안된 새로운 기보법은 조선 초기에 창제된 많은 악곡을 후대에 전해줄 수 있는 길을 열었을 뿐 아니라, 음악양식의 변천을 고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음악사적 관점에서 새 기보법이 지니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으므로, 새 기보법의 창제는 시대구분을 위한 하나의 기준이 된다.

 음악수용층은 중세에 이르러서도 왕족과 정치적 지배세력의 귀족층이었으므로 고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악사의 사회적 지위가 중세에는 고대사회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낮아지는 변천과정을 거쳤다. 중세 전기부터 차츰 궁중음악인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기 시작하다가, 중세 후기에 이르러서는 조선사회의 천민층으로 전락되었다. 그렇지만 선초 왕립음악기관의 우방에 든 향악과 당악, 그리고 좌방의 아악이 중세 후기음악사의 대세를 형성한 음악의 갈래였다.

 17세기 이후 중세에서 근대로의 移行期에 이르면서 유가적 음악이념을 옹호하려는 양반층의 노력이 강화됐으나, 시대가 바뀌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양반사회의 주도권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배체제의 모순을 절감한 양반사대부 지식인들 가운데 柳馨遠·朴趾源·丁若鏞 등에 의한 실학사상의 등장이 조선사회를 바꾼 결정적인 요인의 하나였다.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 이후 궁중음악의 하향세가 가속화되었고, 이와 대조적으로 궁중밖 중인 출신의 風流客들에 의한 민간음악의 등장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사상적 배경이 실학사상이기 때문이다. 문학수용층의 변천에 따라 漢文學이 國文學으로 바뀌게 되었고, 미술수용층의 변화로 인하여 眞景山水畵와 風俗畵가 조선미술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렇듯 음악수용층의 변천에 따라서 등장한 판소리나 風流房의 正樂 등이 모두 근대로의 이행기에 실학사상의 영향 아래서 전개된 음악예술의 새로운 갈래이다.

 조선 후기 사회의 풍류방에서 중인 계층 출신의 歌客과 律客들이 여러 歌壇의 풍류방에서 연주한 음악활동을 통해서 오늘날 정악으로 알려진 새로운 음악문화를 형성하였다. 전통가곡의 사설집인≪靑丘永言≫의 지은이 金天澤이나≪海東歌謠≫의 저자 金壽長이 대표적 가객이었고, 풍류방 김천택과 쌍벽을 이룬 율객이 金聖器였다. 판소리의 애호가이자 후원자들 중 중인계층의 대표적인 인물이 申在孝(1812∼1884)인데, 그는 구전되는 판소리사설을 기록으로 남기고 판소리이론을 세운 음악인으로 유명하다. 중인과 그 이하의 신분층에서 장사로 돈을 모은 서민층도 민간음악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맡음으로써,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기에서 생성된 민간음악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였다.

 근대로의 전환기에 나타난 음악양식의 새 변화양상도 이 시기의 음악적 특징을 나타내므로, 근대로의 이행기라는 시대구분에서 그런 변화양상들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중세 후기의 聲樂曲들이 이 시기에 器樂曲으로 변천되었고, 變奏曲의 등장과 樂懸의 축소, 그리고 변주곡의 高音化 현상들이 이행기의 음악적 변화양상들을 입증하는 증거물이다. 궁중음악의 악현이 축소됨으로 인하여 管絃樂器의 편성에서 管樂器 위주의 편성으로 변천이 아악·당악·향악의 악기편성에서 일어난 것도 이 시기였다. 與民樂과 靈山會相, 그리고 步虛子와 洛陽春과 같은 악곡들이 본래는 성악곡이었으나, 근대로의 전환기에 이르러 모두가 기악곡화되었다. 기존의 악곡들로부터 여러 변주곡이 파생된 것도 이 시기였는데, 영산회상과 보허자의 여러 변주곡 및 歌曲의 여러 변주곡에서 그 실례를 찾을 수 있다. 변주곡들 중에서 낮은 음역에서 높은 음역으로의 高音化 현상 및 장단의 변화에 의해서 나타난 악곡들인데, 낮은 음역의 尾還入에서 높은 음역의 악곡으로 변주된 細還入 및 가곡의 弄·樂·編 계열에 드는 악곡들이 그 실례이다. 새로운 변주곡들은 근대로의 이행기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출현하게 됐는데, 모두가 연주자들에 의한 것이었지 작곡자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연주자들에 의한 창작활동은 한계성을 벗어날 수 없었으므로, 그러한 변주곡의 창작기법이 근대에 이르러서 등장하는 작곡자들에게 전승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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