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6. 음악
  • 2) 한국음악사의 전개양상
  • (3) 근대음악사의 큰 흐름

(3) 근대음악사의 큰 흐름

 양반사대부가 퇴장하고, 중인과 시민층이 사회지배세력으로 나타나며, 양악이 등장하면서 근대음악이 시작되었다. 19세기 말부터 서양선교사들이 세운 새로운 학교나 구한말의 신식 교육체제 아래서 교육 받은 시민층이 양악의 수용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901년(광무 5) 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에 의해서 창설된 서양식 軍樂隊의 등장은 초기 양악 중 기악발전의 터전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에케르트가 작곡한<大韓愛國歌>는 작곡가에 의한 최초의 창악곡이었다. 그는 미국·영국·독일·러시아 등 여러 國歌 및 외국 舞曲연주에서 군악대를 지휘했을 뿐 아니라, 1904년(광무 8) 閔妃의 장례식에서 葬送曲을 지휘하였다.

 선교사의 讚頌歌와 風琴을 통해서 양악을 배운 金仁湜(1885년생)은 1911년에 설립된 朝鮮正樂傳習所의 西洋樂 교사로 있으면서 洪蘭坡(1897∼1941)와 같은 양악인을 길러냈고, 구한말 洋樂隊 출신의 白禹鏞은 1907년 양악대의 해산 이후 京城樂隊를 운영함으로써, 양악의 기악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시민층의 엘리트여서 한반도에 양악의 뿌리를 내리는 데 한 몫을 담당했으나, 무분별하게 양악 일변도로 실시된 서구 지향적 음악교육으로 인하여 새 시대가 요구하는 민족주의음악을 형성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더욱이 일제총독부에 의해서 편찬된≪普通敎育唱歌集≫은 일본창가의 飜案 및 찬송가와 외국민요의 선율로 작곡된 노래로 편성됐으므로, 신식교육제도의 음악교육에서 그 창가집이 학생들에게 왜곡된 음악관을 심어주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비록 한국인에 의한 창작곡들로 김인식의 學徒歌나 군악대 출신인 鄭士仁의 太平歌 그리고 李尙俊(1884년생)의 신민요 및 洪永厚 곧 홍난파의 童謠들이 있었지만, 그 창작곡들은 찬송가식 또는 唱歌式의 창작기법을 못 벗어난 수준이었다. 일제강점기 초기 양악인들의 후배로 玄濟明·蔡東鮮·金世炯·安基永·李興烈 등의 작곡가들이 일본의 전문음악학교에서 양악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양악의 작곡분야와 연주분야에서 각기 중요한 몫을 담당했으나, 이들 중에 홍난파와 현제명은 일제말기에 이르러 친일음악가로 변신하여 민족주의음악의 형성에 이바지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양악작곡가들과 양악연주가들은 광복 이후 대학교의 음악대학에서 양악교수로 재직하면서 음악전공자들에게 서구 지향적 음악관을 심어주는 주역들이었으므로, 근대음악의 시대적 과제였던 민족주의음악의 형성에 그들이 실제적으로 기여하기 어려웠다.

 구한말의 복잡다난했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掌樂院의 궁중음악은 세습제의 타파로 인하여 1913년부터 시민층의 자제들을 뽑아서 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에서 교육시킨 신진들에 의해서 아악·당악·향악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풍류방의 정악 중 가곡·가사와 같은 갈래들은 임시로 초빙된 河圭一(1867∼1937)과 林基俊(1868∼1940) 명인에 의해서 아악부원양성소의 雅樂生들에게 전승될 수 있었다. 그러나 판소리나 散調 또는 민요나 雜歌 같은 민간음악의 여러 갈래들이 근대교육기관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으므로, 그 일부가 사회의 음지 속에서 券番의 藝妓들에 의해서 전승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의 음지 속에서나마 가야금산조는 金昌祖(1865∼1918)·韓淑求·朴昌玉·李且守·沈昌來 등의 1세대에 이어서 韓成基·崔玉山·安基玉(1905∼1948)·金宗基(1905∼1945)·丁南希(1905∼1984)·沈相健(1889∼1965)·姜太弘(1894∼1968) 등의 2세대에 이르면서 여러 流派를 형성하였다. 가야금산조 이외에 거문고산조가 白樂俊(1882∼1933)에 의해서, 대금산조는 朴鍾基(1880∼1947)에 의해서, 해금산조는 池龍九에 의해서 일제강점기(1910∼1945)에 각각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 朴春載(1877∼1948)·崔景植(1874∼1949)·張桂春(1868∼1946)은 잡가의 전통을 柳開東(1898년생)·李眞紅·鄭得晩 등에게 전승시켰다.

 20세기초 신식교육체제에서 외면당한 전통음악의 명맥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던 국악인들은 음악교육의 상승세를 탄 양악에 대항하여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국악인들이 양악에 대한 國粹主義的 사고와 復古主義적 음악관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그 결과 전통음악의 특수성과 과거 지향적 성향에 빠져 음악의 보편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어려웠다. 그리고 광복 이후 국악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어렵게 만든 뿌리는 근대교육제도권에서 전승의 길을 찾지 못하고 사회의 음지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던 근대민족사의 비운에 기인한다.

 1908년에 왕립극장으로 설립된 圓覺社의 출현은 근대음악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원각사의 근대식 원형극장은 음악수용층의 확대에 기여했을 뿐만이 아니라, 판소리의 1인 연주양식을 등장인물에 따른 여러 배역과 근대식 무대공연물로 바꾼 唱劇이라는 새로운 공연양식을 창출한 밑바탕의 무대였다. 일제강점기의 李東伯(1867∼1950)·金昌煥(1854∼1939)·丁貞烈 (1876∼1938)·金昌龍(1872∼1935)·宋萬甲(1865∼1939)과 같은 근대판소리 5명창들이 한편으로는 1933년 朝鮮聲樂硏究會의 판소리 선생으로 활약하면서 金如蘭(1903∼1983)·朴綠珠(1905∼1979)·林芳蔚(1904∼1961)·金演洙(1907∼1974) 등과 같은 후배 명창을 길러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후배 명창과 함께 판소리 다섯마당 이외에<劉忠烈傳>·<裵裨將傳>등과 같은 새로운 창극의 공연종목을 東洋劇場과 같은 사설극장에서 공연함으로써, 시민을 음악수용층으로 확대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극장 이외에 留聲器音盤과 京城放送局의 등장도 시민을 음악수용층으로 확대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민층의 새 음악문화로 나타난 신민요나 유행가와 같은 대중음악이 근대화과정에서 새로 등장한 음악문화의 갈래이다. 초기 신민요와 유행가의 작곡가와 작사자 및 가수들 중에는 일본의 전문음악학교 출신의 엘리트들이 참여했는데, 예컨대 蔡奎燁(1904∼1949)·李冕相(1908∼1989)·金駿泳(1908∼1961)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렇듯 근대음악의 주역들이 한편으로는 궁중음악과 민간음악의 유산, 곧 국악을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양악 및 대중음악과 제휴하여 근대민족주의음악을 수립하여 발전시키는 의무를 감당했어야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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